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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교토(京都) 천주교 성지 (11) 천주교와 다도(茶道) 2

151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5-11-12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천주교성지 ⑪ 천주교와 다도(茶道) 2


 

일본의 다도(茶道)와 천주교의 관계는 이제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일본에 존재하는 다도의 여러 파(派) 가운데에 센노 리큐(千利久)를 창시자로 한 센노 다도삼가(千의 茶道三家) 중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14대 이에모토(家元: 종가의 당주)인 센소우슈(千宗守)는 1994년 바티칸을 방문하여, 그 당시의 교황이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 키리시탄들이 소중히 간직해 왔던 나츠메(棗: 다도에서 가루차를 담는 그릇의 일종. 어느 미술관에 있었던 예수회를 상징한 IHS라는 글이 새겨진 다기의 복제품)를 증정하였다고 한다.

 

무샤노코지센케는 키리시탄들이 조리돌림을 당하기 전에 귀를 잘렸던 이치죠모도리바시(〈빛〉잡지 2015년 3월호 참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실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종가의 당주가 그 곳에 살고 있다. 이치죠모도리바시는 일본의 26성인 중 24명이 고문을 당했던, 키리시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슬픔이 남아있는 곳임과 동시에 센노 리큐의 목이 매달린 곳이기도 하다. 리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측근으로, 히데요시가 가장 아꼈던 다인(茶人)으로 각별히 신뢰를 받았으나, 점점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 리큐에게 히데요시는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화려함을 선호하는 히데요시의 지향과 수수함을 추구하는 리큐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 리큐가 자신이 자주 참배했던 교토의 다이토쿠지(大德寺) 산문(山門)의 수리비를 기부했을 때, 다이토쿠지 쪽에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산문 위쪽에 세워주었던 리큐의 목상(木像)이 마치 밑을 지나가던 히데요시를 모욕하는 것 같다는 누명을 씌어서 리큐에게 할복(割腹)을 명하여 리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그 문제의 목상을 이치죠모도리바시에 옮긴 다음, 리큐의 목을 그 목상 발밑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무샤노코지센케의 다실인 칸큐안(官休庵)에 놓인 징검돌, 츠쿠바이(손을 씻거나 입을 헹구는 물을 담아 놓기 위해 구멍을 파놓은 돌), 등롱(燈籠), 그리고 계절마다 은근한 아름다움을 연출한 푸른 화초들 등등 그 하나하나가 다도가 가지고 있는 조용함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이 다도를 통해서 키리시탄들이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할 공간을 찾아내었다고 전해진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다실의 구조에도 천주교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지만 다도의 의식 속에도 그 정신이 살아 있다. 무샤노코지센케 14대 당주인 센소우슈가 신문 칼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다도 의식에서는 다실에 둘러앉은 4~5명의 손님들이 하나의 찻잔을 돌려서 같은 부분에 입을 대어서 차를 마신다. 이것은 다도가 시작했던 전란의 시대에 다실에서 자리를 함께한 무사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목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일본사람들은 가정에서도 개개인이 자신만이 쓸 젓가락과 밥그릇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의 전통음식점에서 식사를 해본 사람이면 아는 사실이지만 모든 반찬 종류는 각자 앞에 개개인의 그릇과 접시가 놓인다. 그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일본은 음식문화에 있어서는 지극히 개인주의인 나라이다. 그런데 다도의 의식에 있어서는 왜 예외일까 하는 의문을 나는 계속 생각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가톨릭에서의 성찬의 전례가 진행될 때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으로 하며 빵을 먹고 포도주를 하나의 성작으로 돌려 마신 기억과 이어졌던 것이다. 리큐의 시대는 유럽에서 문화가 들어와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의 선교가 한창이었다. 리큐의 제자 중에도 키리시탄 대명(大名: 영주)이 있었으니 이 추측은 완전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센소우슈는 이러한 내용을 담아 성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제가 교토에 있는 가톨릭계 학교에 다녔을 당시를 떠올려 보니, 이미 다도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던 저는 학교에서 미사참례를 할 때 가톨릭과 다도의 공통점 몇 가지를 발견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고, 그 후 1994년 3월 9일에 “당신의 가설을 증명할 자료는 있을 것이니 언젠가는 공개될 것이다.”라는 답장이 왔었다고 한다. 천주교와 관계가 깊었던 다도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키리시탄 박해시대부터 천주교를 금하였던 에도시대에 걸쳐서 불교, 특히 선종(禪宗)의 시점에서만 설명되었고,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하지만 천주교 신앙이 두드러지게 깊었던 큐슈 시마바라지역(九州 島原地域)에서는 십자가 등이 그려져 있는 다기들뿐만 아니라 칼, 투구 등이 현존하고 있다.

최근 바티칸에 잠자고 있던 편지나 기록, 회화 등으로 인해 와비차(侘び茶: 센노 리큐가 확립한 다도)의 완성에는 천주교가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일본에서도 그것을 말해주는 자료들이 나와 천주교의 미사와 다도의 공통점도 드러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미사 때 사제가 성작을 들어 올린 후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다도에서 찻잔을 들어 올린 후 차를 마신다는 것, 성작수건과 비슷한 삼베로 만든 행주인 챠킨(茶巾)으로 그 찻잔을 닦는 것도 성찬의 전례에서 행하여지는 형태와 비슷하다. 또한 리큐가 즐겨 썼던 모자도 옛날에 바테렌(파드레이, ‘신부’라는 뜻)이 썼던 것과 같은 모양이기도 하다. 이렇듯 일본의 다도가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뿌리를 내려 현대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에 하느님의 신비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참고도서 : 스기노 사카에 저서 《교토의 키리스탄사적을 돌아보다》, 산가쿠출판)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10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월간빛, 2015년 11월호, 이나오까 아끼(쥴리아, 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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