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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수원교구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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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믿음의 힘!' 오늘 복음(루카17,1-6)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과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으라.'고 하시고, '나의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4)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주님이신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8) 어떻게 너를 죄짓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에게 잘못한 너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완전의 의미를 지닌 일곱 번씩이나. 믿음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입니다. 믿음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단순합니다. 단순하기에 그 믿음이 겨자씨 한알 만한 아주 작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 단순하고도 작은 믿음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지혜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고, 마침내는 십자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너를 죄짓게 하지 않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고,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 신부님_쓸모 없는 종의 행복 찬미 예수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의 위대함과 그 허무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어부로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먼바다로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거대한 청새치를 만납니다. 그는 사흘 밤낮의 처절한 사투 끝에 그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취해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습니다.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배에 묶여 있던 것은 살코기 한 점 없는 거대한 '뼈'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듭니다. 이 노인의 모습은, 이 소설을 쓴 작가 헤밍웨이 자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의 모든 '일'을 성취했지만, 그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일'을 했지만, 세상은 그의 '일'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토록 위대했지만, 왜 그 '일'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지 못했을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마트에서 '일'을 하지만, 그 '일'은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지 못하고, 그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습니다. 여기, 이들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는 공사장을 한 여행자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똑같은 벽돌을 나르고 있는 세 명의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빌어먹을 벽돌을 나르고 있소." 그에게 '일'은 그저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브룩스나 헤밍웨이의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비록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눈을 빛내며 환한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서 머무실 위대한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 사람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사람은 고통 속에서, 두 번째 사람은 의무감 속에서 일했지만, 세 번째 사람만이 완벽하게 행복했습니다. 그의 '일'은 더 이상 '대체 가능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비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밭에서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얼른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하고 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령한 것을 다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 ...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9-10)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차갑게 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고작 '쓸모없는 종'이라니?"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그 자체로 즐거울까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압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그 '일'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임을 압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부모님께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부모님께 달려가며 행복해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벽돌공이 "나는 성전을 짓고 있다"고 행복하게 외쳤을 때, 그가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제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자랑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주님,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 '일'을 하는 내내 제가 가장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의 진짜 의미입니다. "주님, 저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 '일' 자체가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상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그날의 행복도는 매우 높이 상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배신하고 '쓸모없는 종'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죄책감에 빠져 자신의 옛 '일', 즉 생존을 위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단 하나의 관계를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와 살아갈 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스승으로, 목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설거지이든, 운전이든, 아이를 돌보는 일이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헤밍웨이의 허무함이 아니라 세 번째 벽돌공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7,7-10: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비유로 드시며,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특별히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는 곧,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아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한 모든 선행은 은총 덕분이다. 우리가 그것을 내세우려 한다면, 은총을 거부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것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8,31) 즉, 우리의 모든 선행은 하느님 은총의 열매이며, 우리는 그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낮추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봉사가 본래 하느님께 대한 의무임을 고백하는 겸손의 태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을 빚 갚음으로 여기라. 은총을 얻기 위한 흥정이 아니라, 주님께 진 빚을 갚는 것임을 잊지 말라.”(Homiliae in Matthaeum 25) 따라서 참된 제자는 자신이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며, 더 큰 사랑과 봉사로 나아간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이 말씀의 완전한 모범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으로서 순종하시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셨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교회의 진정한 힘은 권세가 아니라, 봉사이며, 자기 자신을 낮추어 형제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랑이다.”(104항 요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을 묻는다. 나는 봉사할 때, 은근히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바라지 않는가? 내가 한 선행을 내 공로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봉사와 직무를 통해 그리스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는가?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높여주는 태도이다. 우리가 맡은 일을 다하고도 “주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봉사는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귀한 향기가 된다.
김건태 신부님-쓸모없는 종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예를 찾아, 당신 교회의 구성원들, 특별히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계약을 하느님에 대한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하는 협약 정도로 인식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내리신 율법의 규정들을 준수한다면, 하느님은 마땅히 그에 대한 대가 또는 보상으로 답하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개념이 그들의 오만과 자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겸손과 함께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종속을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 왜곡된 계약 개념을 멀리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들에서 고된 일을 막 끝내고 돌아온 종에게 자신이 먹을 것을 준비하도록 지시하는 주인의 모습을 예로 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주인의 모습을 윤리적 또는 인도적으로 평가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다만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종인 인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쏟으실 뿐입니다. 종은 주인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지니지 못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나아가 어떠한 긍정적 평가나 감사의 표시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미천한 종일 뿐입니다. 우리의 행보를 돋보이게 할 어떠한 권리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종의 기능을 다 하는 것 외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분도 하느님이며, 언젠가 그 생명을 거두실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으며, 그분의 가장 근원적인 요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해야 하는 삶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아울러, 스승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사도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종으로서의 모습’, 그것도 철저한 종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스승이 온몸으로 가르쳐주신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는 고백을 외치며, 입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주님을 전하면서, 제자들은 주님의 이 강렬한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며, 말씀 선포에 최선을 다해 나갔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주시고 늘 이끌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가운데,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기쁘게 외칠 수 있는 신앙인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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