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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너는 어디에 있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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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1-19)”
1)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라는 말씀은, 그 병자들이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냥 가버린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라는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으셨던 일이 연상됩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창세 3,9).”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으신 것은 아닙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깨달아라.”입니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잘못된 것들을 고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라는 말씀도, 그 병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알고 계시지만, 그들 자신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라고 아담에게 물으셨는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 아홉 명의 병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것 자체를 모르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라는 말씀은,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너희는 그 아홉처럼 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넓게 생각하면, 오늘날의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2) 예수님께서 지금 “너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 주님. 저는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떳떳하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3) 이야기에 등장하는 열 명의 병자들 모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믿었습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는,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으니까 간청한 것인데, 그들이 그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많이 고쳐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문만 듣고서도 믿었다는 점만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아홉 명의 믿음은 그 단계에서 멈추었고, 한 명은 다음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다음 단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단계입니다. 그 차이가 생긴 이유, 또는 원인은 무엇인가? 아홉 명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한 명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태도를 근거로 한 해석이고, 진짜 이유는(원인은) ‘궁극적인 희망’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아홉 명은 현세만 생각했고, 현세의 일만 중요하게 여겼고, 인생의 목표와 희망이 현세에만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돌아온 한 사람은 현세보다 내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인생의 목표와 희망이 내세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도 병이 나은 것을 알았을 때 하느님께 감사드렸을 것이고 하느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라는 것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하느님만 생각하고 예수님은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몸의 치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까 메시아이신 분만이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되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일보다 예수님께 돌아온 일 자체가 더 중요한 일이 됩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그 믿음을 잃지 말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몸의 건강’은 현세에서만 유용한 ‘현세의 보물’입니다. ‘하늘의 보물’은 ‘영혼 구원, 영혼의 건강’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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