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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수원 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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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청원과 감사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 치유 이야기는 기도에 관한 두 시기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는 청원기도이며, 다른 하나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감사기도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청원 과정은 단순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주님께 호소하기만 하면 됩니다. 청원기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나병 환자들을 가까이하지 말도록 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하는 몸짓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 사회로부터 축출된 이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들을 치유하시나, 곧바로 치유 기적을 일으키시지는 않으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실 뿐입니다. 치유의 상태를 확인하고 공동체나 가족 합류를 명할 권한이 사제에게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도의 한 시기인 감사기도의 진정성을 확인해보시려는 의도로 이해됩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그것도 유다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방인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의 예를 행합니다. 기도의 두 시기를 정성스럽게 완성한 이 이방인에게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치유를 넘어 구원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아마 이 사람은 이제 완치자 또는 정상인으로 살아가면서, 나병보다 더 고통스러운 문제가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하며, 곧 청원하고 감사하며 믿음의 길, 구원의 길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터득했을 것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한 시기를 채우지 못한 사람들, 나머지 아홉 사람은 분명 잠시나마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고, 사제에게 보이고 난 후 전처럼 마을 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신나는 삶을 살아갔을 것이나, 나병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고통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고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변한 게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육체적 치유뿐, 영적인 치유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감사의 몸짓이야말로 인생 여정을, 영적인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는 가르침 앞에 섭니다. 진심으로 감사할 때, 구원 선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참 행복 앞에 설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하루,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이 감사의 마음을 이웃들을 위한 봉사와 사랑 실천으로 표현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신앙인으로서의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7,11-19: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만난 열 명의 한센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전한다. 한센병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종교적 고립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치유는 단순히 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회복, 공동체와 화해, 하느님과의 친교 회복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에게 곧바로 “깨끗하여져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하신다. 이는 율법의 절차를 따르게 하시면서 동시에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명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치유가 순명의 여정 안에서 주어진 은총임을 보여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순명은 모든 기적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순간, 이미 기적은 시작된다.”(Hom. in Mt. 25,2) 열 명 모두 병은 나았지만, 오직 한 사람, 곧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무릎 꿇고 감사드렸다. 그는 단순히 은총의 결과에 머무르지 않고, 은총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나아갔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선언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치유와 구원의 차이를 봅니다. 아홉은 육체적 회복만을 받았지만, 사마리아인은 감사의 믿음을 통해 전인적 구원에 이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강조한다. “감사하지 않는 자는 이미 받은 은혜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감사하는 이는 받은 은혜 위에 새로운 은혜를 더 받는다.”(Sermo 36,1) 감사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은총을 굳건히 하는 신앙의 행위다. 교리서는 “감사는 교회 기도의 본질적인 차원이다. 감사하는 기도는 교회의 모든 전례와 기도 안에 스며 있다.”(2637항) 가르친다. 사실 우리의 중심 전례인 성체성사(Eucharistia)라는 단어 자체가 “감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감사의 성사적 실현이어야 한다. 또한 전례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성체성사는 모든 감사와 찬미의 원천이며, 교회의 생활과 사명의 정점이다.”(10항 참조). 즉, 감사하지 않는 신앙은 이미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이다. 아홉 사람은 치유되었지만, 기쁨을 자기 안에만 가두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감사함으로써 공동체와 다시 연결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자리에 나아갔다. 감사하는 태도는 개인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불평과 원망은 공동체를 무너뜨리지만, 감사는 공동체를 세운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은혜를 새롭게 하고, 불평하는 마음은 은혜를 죽인다.”(Hom. in Ps. 33,1) 따라서 감사의 영성은 단지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생명을 지탱하는 힘이다.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받은 은혜를 삶에서 증거하는 감사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다. 전삼용 신부님_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 찬미 예수님!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에는 작은 개척교회인 '샬롬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의 김정하 목사님은 루게릭병을 앓고 계십니다.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고, 결국엔 숨 쉬는 근육마저 멈춰버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휠체어에 앉아 겨우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 컴퓨터 마우스로 세상과 소통하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다섯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필리핀 등지에 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컴패션 후원 아동들입니다.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였던 그는 이 아이들을 도울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구두닦이’였습니다. 건강했던 시절, 그는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구두 통을 메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 번 돈, 그 피 같은 돈을 모아 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루게릭병이 찾아와 손이 굳어가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구두솔을 놓지 않았습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구두약이 온통 옷에 묻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목사님은 어눌해진 발음으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빛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 심장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죽는 것처럼, 이 일을 멈추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목사님에게 무엇을 해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은 그에게 남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줄 때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나의 ‘피’를 쏟을 때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 안에 자신의 피와 살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가르쳐 준 비밀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의 수많은 장미꽃을 보고 실망했을 때, 여우는 말합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바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를 위해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바람막이를 씌워주었습니다. 그 수고와 희생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 장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과 ‘책임’이, 어린 왕자가 지구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별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구원’의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고, 모두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치유자’, ‘문제 해결사’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만 돌아왔을까요? 나머지 아홉 명에게 예수님은 그저 ‘병을 고쳐준 고마운 분’ 정도였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치유’라는 선물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선물을 가지고 각자의 삶으로, 세상 속으로 바쁘게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더러운 몸을 깨끗하게 해주신 분,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을 그냥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예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아홉 명은 ‘치유’를 받았지만, 이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치유는 육신의 문제 해결이지만, 구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그분은 우리의 ‘문제 해결사’입니까, 아니면 ‘구원자’이십니까? 많은 신자가 성당에 와서 청합니다. “주님, 이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이 사업이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녀가 잘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치유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단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아홉 명의 나병 환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주님을 잊고 세상 속으로 떠나버릴 것입니다. 김정하 목사님의 후원 아동들이 목사님의 도움만 받고 끝난다면, 그들은 목사님을 ‘이용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목사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도 목사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편지를 쓰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그들은 신부님의 뜻을 이어받아 의사가 되고, 약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부님을 위해 자신들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그러자 그들 안에서 이태석 신부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전부’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내어드렸을 때, 비로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살아계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심장’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분께 응답하고 있습니까? 주일 미사 한 시간 참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 예배, 봉헌, 기도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분께, 나의 ‘피’와 같은 소중한 것(시간, 재물, 마음)을 쏟아붓는 시간입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문제 해결사’로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내가 너에게 어떤 보상을 주면 좋겠느냐?” 세상의 부와 명예, 지혜, 무엇이든 청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Non nisi Te, Domine.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문제 해결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부’였고, 그의 유일한 ‘구원’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이 베풀어 주신 치유와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당신을 더 원합니다. 당신만이 저의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성 요삿파 주교 순교자 기념일>(11.12.수)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8) '얼마나 감사를 드리며 사는가?' 오늘 복음(루카17,11-19)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와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17,14) 하고 이르십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나병이 나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한 사람은 외국인(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7-18) 그리고 외국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 '이런 하느님께 나는 얼마나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루에도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 청하면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나병 환자들처럼,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하면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니 매순간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다시 부활하는 우리들입니다. 배은망덕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받은 은총에 감사드리며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8 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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