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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수원 교구청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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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1-13 ㅣ No.186270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 나라의 때와 곳

 

 

오늘 말씀은예수님이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곧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하는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하는 단호한 답을 주시는 장면으로 열립니다바리사이들은 분명히 언제라는 시간을 여쭈었음에도예수님은 어떻게라는 모습을 먼저 일러주시는 것으로 답하십니다여기까지는 선문답처럼 보입니다.

사실하느님 나라의 도래 문제는 유다교에서 중요한 문제였으며라삐들과 묵시 문학가들은 그때를 추정할 수 있는 표징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여왔습니다(다니 9,2 참조). 율법을 충실하게 준수하면 의인으로 판단되어 하느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 살아왔던 유다인들특히 바리사이들에게 이 나라는 어떻게라는 모습보다는 언제라는 시간으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곧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는 말씀 속에는 어떻게와 함께 언제에 관한 답이 들어가 있습니다예수님의 오심으로더 정확하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다고 단정하십니다그러나 마음이 닫혀 있고 귀가 막혀 있던 바리사이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받아들여제대로 듣고 보고 깨달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하느님 나라의 적대 세력인 마귀를 쫓아내는 여러 행적과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거부하니 참 어려운 일입니다하느님의 나라곧 구원의 시간은 시작되었으나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 나라를이 시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바리사이들과의 대화에 이어예수님은 이제 시선을 제자들에게 돌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여신 분이며그분은 이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마지막 때에 다시 오셔야 함을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기 전에제자들을 번민 속에 몰아넣을 불행의 날들공포의 날들이 앞설 것임을 예고하십니다따라서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인내심으로 기다려야 합니다이러저러한 표징들을 찾으려 하고거짓 예언자들의 말씀 앞에 혼란을 겪기도 하겠지만,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종말의 시간에 앞서예수님은 당장 이 세대의 사람들나아가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조롱받고 천대받고 배척을 받으실 것이며제자들은 이를 목격할 것입니다물론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사랑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나증오와 분열을 완전하게 정복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이 시간이 바로 교회의 시간이며박해의 시간입니다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앙인은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며마지막 때에 오실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늘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준비 과정에서 고통을 오히려 큰 버팀목으로 받아들일 것을 이르십니다온갖 반대와 배척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신 주님의 가르침이며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시는 간절함이 읽히는 대목입니다.

 

 

오늘 하루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지내는 가운데지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맛보는보람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묻는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현존하는 실재이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은 곧 예수님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의 마음 안에 하느님 나라가 머무른다.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De Oratione Dominica 13)고 가르쳤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며, 그것은 인간의 내적 변화 안에서 시작된다. 성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즉, 하느님 나라는 외적인 모습보다, 성령의 내적 열매로 드러난다. 우리가 정의를 실천하고, 평화를 이루며, 성령 안에서 기뻐할 때 이미 하느님 나라는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와 있으나,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25절).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열렸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의 힘을 본다.”(Adversus Haereses V, 20,1)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자리 잡으려면,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감사와 사랑,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가정은 이미 하느님 나라다. 반대로 불의, 분열, 미움이 지배하는 곳은 이미 지옥의 씨앗을 키우는 공간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종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은총에 응답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그대가 가난한 이를 도울 때, 하느님 나라는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대가 분노를 참을 때, 하느님 나라는 그대 안에서 다스린다. 하느님 나라는 먼 곳이 아니라, 그대의 선택 안에 있다.”(Hom. in Mt. 14,3)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 갑자기 떨어지는 번개처럼 올 종말의 사건일 뿐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하느님의 통치다. 그 나라는 성령의 열매로, 십자가의 길을 통해 드러나며, 우리의 삶 안에서 사랑과 감사, 정의와 평화의 실천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전삼용 신부님_하느님 나라를 위한 겨자씨 믿음 만드는 법  

 
 
찬미 예수님!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은행가 아들로 태어난 '자크 페쉬(Jacques Fesch)'는 24살에 인생의 막장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빚더미에 올랐고, 은행 강도를 시도하다 경찰관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1957년, 단두대 이슬로 사라질 사형수였습니다. 
 
그가 갇힌 '상떼(Santé)' 감옥의 독방은 빛 한 점 없는 절망의 공간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고, 세상과 자신을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수감 1년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밤, 칠흑 같은 독방 안에서 그는 갑작스러운 '강렬한 빛'을 체험합니다.
그는 자신의 옥중 일기에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강렬한 외침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외침이 내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 순간, 나는 믿었습니다. ... 그날 밤, 그분께서 내 감방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는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자크 페쉬, [빛이 내 눈을 뜨게 하다(Light over the Scaffold)]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변화입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3년 동안, 그의 감방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좁은 감방 안에서 춤을 추었고, 찬미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내 마음은 넘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단다.
나는 이제 곧 그분을 만나러 간다.
그분은 나에게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주셨다."
사형수 자크 페쉬의 감방은 가장 비참한 곳이었지만, 그가 자기 안의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곳은 가장 거룩한 '성전'이 되었고 '하느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옵니까?"
그들은 하느님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로마 제국을 물리치는 거대한 정치적 변혁으로 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여기서 '너희 가운데(entos hymon)'라는 말은 '너희들 사이(관계)'라는 뜻도 있지만, 더 깊게는 '너희 안(내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밖으로 헤맵니다.
돈을 더 벌면, 좋은 집에 살면, 건강해지면 행복할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동화 속 틸틸과 미틸이 온 세상을 헤매다 결국 자기 집 새장에서 파랑새를 발견했듯,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진리를 뒤늦게 깨닫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 님은 제 안에 계셨거늘, 저는 밖에서 님을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내면에 이미 와 계신 '그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크 페쉬처럼 가장 비참한 순간에도, 내 안에 계신 그분을 만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습니다.
배신과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외부 환경 속에서도 그는 평정을 유지했습니다.
그 비결을 그는 [명상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는 언제든지 네 자신 속으로 물러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평화로운 은신처는 없다.
나는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성을 쌓았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안의 '성전'에 있습니다.
세례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집을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성전을 탐욕과 걱정, 미움이라는 먼지로 뒤덮어 놓고, 밖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무너져 가는 다미아노 성당을 돌 하나하나 다시 쌓아 올렸듯, 우리도 매일 우리 내면의 성전을 재건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크 페쉬처럼, 가장 절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이 외침은 단순한 비명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만이 나의 생명이십니다"라는 최고의 신앙고백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에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총살형 집행 5분 전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는 비로소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만약 저에게 다시 한번 생명이 주어진다면, 그 삶의 매 순간을 기적처럼 여기며 살겠습니다!"
그 순간 황제의 특사로 감형되어 극적으로 살아난 그는, 이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성경을 읽으며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살려달라"는 절박한 기도가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열어준 것입니다. 
 
정말 나는 진실하고 절박하게 그분께 바라는 게 있습니까?
가장 힘들 때, 가장 외로울 때, 길게 기도하려 하지 마십시오.
자크 페쉬처럼, 도스토옙스키처럼, 단 한 마디의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십시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이 짧고 진실한 겨자씨만 한 외침들이 하나씩 쌓일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세상 그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루카17,20-25)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사람의 아들의 날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바로 그곳,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십니다. 그러니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11.13(목)은 '대학수능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그동안 최선을 다한 노력들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수험생들 마음 안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길 기도합시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각자의 자리(성소)에서 기쁘게 최선을 다하는 것, 바로 그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이고,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주님, 수험생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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