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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토요일] 탕자의 비유 (루카15,1-3.11ㄴ-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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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3-06 ㅣ No.145048

2021년 3월 6일 토요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탕자의 비유 (루카15,1-3.11-32)

   

 

1독서<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미카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화답송 시편 103(102),1-2.3-4.9-10.11-12(◎ 8)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루카15,1-3.11-32)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미카7,14-15.18-20)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18~19)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18)

미카서 7장 14절에서 예언자 미카는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목양(목자로서 양떼를 다스림사목)을 간구하는 중재(중보)기도를 바쳤다그리고 미카서 7장 15절에서 주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 약속에 대한 미카 예언자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다.

 

이제 미카서 7장 18절 이하 20절에서 미카 예언자는 선민을 향한 주님의 용서와 어지신 사랑을 바라며 선취적으로 찬양을 드린다이러한 새로운 단락의 서두에 나오는 본문은 '누가 당신과 같은 신인가?' (Who is a God like you?)이다.

 

이것을 잘못 알아들으면 하느님 외에도 여러 신들이 있는데그중에서 주 하느님께서 최고의 신이시라고 하는즉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는 말처럼 보인다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런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 성경 곳곳에서 사용되는 표현으로(탈출15,11; 시편81,10; 86,8; 95,3; 135,5) 하느님의 권능과 절대 주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강하심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18)

본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죄악을 묻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허물을용서해 주시고'로 번역된 '노세'(nose; pardon)와 '(죄악을묻지 않으시는'으로 번역된 '오베르'(ober; forgive)를 구분해야 한다.

 

이 두 단어 중 '노세'(nose)의 원형 '나사'(nasa)는 지은 죄에 대하여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사면의 의미가 강하다반면에 '오베르'(ober)의 원형 '아바르'(abar)는 단지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죄악 자체를 말끔히 소멸시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나사'는 하느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하여 형벌을 면제하는 '집행유예'의 의미를 전하는 것이라면, '아바르'는 그 죄악 자체를 아예 없는 것으로 여기는 '공소기각'의 의미를 강조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이란 표현은 '그의 기업의 남은 자' (the remant of His possession or inheritance)이다.

남은 자들이 기업(소유)에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기업(소유)과 남은 자를 동격으로 본다.

이것을 감안하면하느님께서 남은 자들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이유가 더 분명해진다이것은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기업곧 거룩한 소유이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19)

하느님께서 미카서 7장 18절에 언급한 것처럼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본절 상반절에 기록된 것처럼 선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다.

 

이제 본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버려기억도 나지 않게 하시는즉 죄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시는 분으로 고백되고 있다.

 

선민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관련된 하느님의 이런 성품에 대한 묘사가 점진적으로 더 강력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죄악에 대한 용서만이 아니라죄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까지 주시는 자비와 권능의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모든 죄악'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어떤 죄를 용서하시고 어떤 죄는 남겨 두시는 것이 아니라모든 죄악과 죄책(죄의 형벌)에 대하여 완벽하게 청산하실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바다 깊은 곳으로'으로 번역된 '뻬메출로트 얌'(bemetsloth yam; into the depths of the sea)은 바다 위에 던질 뿐만 아니라바다 밑바닥 까지 내려가게 한다는 의미까지 지닌다.

 

원문은 완전한 폐기 처분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폐기되는 죄악의 범위가 전부이고죄악에 대한 폐기의 정도가 완전하고 철저한 것임을 서술한 것이다.

즉 하느님용서의 온전성과 완전성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세상은 하늘을 배우는 교육훈련장입니다. (루카15,11-24)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오늘 두 아들의 비유가 옛날에 있었던 그 어떤 아이들의 이야기로 들으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면 성경이 주님과 나를 분리시키는 케리투투(이혼증서)가 됩니다그러나 오늘 나(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으면 죽음()에서 살아나는 생명책이 됩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아버지가 죽으면 받게 될 유산을 미리 달라아버지의 뜻에 반항하는 못된 자식입니다.

그 작은 아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야 할 죄인입니다.(신명21,18~21참조)

그런데 아버지는 말리지 않고 유산을 주어 보냅니다왜 그랬을까요?


1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아버지의 것이 아닌 자기를 위한 자기의 것으로 챙겨갑니다.

말씀을 하늘의 뜻이 아닌 내 뜻내 욕망을 위한 인간의 규정과 교리로 바꾸어버린 우리의 모습입니다.(마르7.7참조)

그것이 아버지의 뜻과 먼 곳입니다그 아버지의 뜻이 아닌 삶이 곧 탕진의 삶죽음입니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시련이 오자 사람에게 매달립니다하느님보다 사람을 찾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레17,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하느님을 의지하고 믿으면하늘의 복입니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아무도 주지 않았다.

사람을 찾으면부정한 짐승돼지와 짝하는 삶이 됩니다.


(레위11,7-8) 돼지는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너희는 이런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도 안 되고그 주검에 몸이 닿아서도 안 된다그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새김질 않는 것되새김질 하지 않는 부정한 것입니다먹은 양식을 새김질 하지 않는 것또는 먹은 양식이 없어서 새김질을 못하는곧 기억하지 못하는 것부정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늘의 대속 그 진리로 먹은(깨달은것이 없어 되새길 수 없는(기억할 것이 없는그래서 용서 받지 못한 부정한 죄인입니다.


1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작은 아들은 돼지보다 못한 부정한 죄인의 밑바닥까지 간 것입니다시련이 계속 되어서야 자신의 부정함 그 죽음의 실체를 봅니다사람은 그 시련의 때에 자신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배가 부르면세상 삶에 만족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아버지의 뜻과 먼 내 뜻을 위한 삶이먹을 것 없는 부정한 죄의 삶이라는 것그래서 그 부정한 삶에 자신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아야체험해 봐야아버지의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참인지 깨닫습니다.

그때 부정한 삶에서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야고1,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럼 작은 아들이 떠나 살았던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든 것(14절에)은 작은 아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시련?

시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실패를 바라는 시험(페이라조), 성공하기를 바라는 교육용 시험(도끼마조)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한 교육을 위한 시험(도끼마조)을 하십니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먼 곳에서 거지꼴로 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곧 바로 달려 나오십니다.

아들이 떠날 때부터 아들이 도끼마조하여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기다리며 그 먼 곳을 바라보고 계셨기에 뛰어 오십니다.

급하게 달려 나오셨습니다당연히 반가운 마음도 있었겠지만 더 다급한 것이 있었습니다율법에 의한 돌동네 사람들의 그 심판의 돌에 맞을까 봐 염려 돼서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대신 돌을 맞으시려 달려 나와 부정한 아들을 껴안으신 것입니다그리고는 입을 맞춥니다아들이 먹었던 부정한 것을 아버지가 얼른 받아먹어 버리십니다.

죄인을 덮으시어 한 몸이 되었습니다하느님의 속성인 덮으심대속의 사랑입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다른 내 뜻을 위한 그 먼 고장의 삶은참 생명의 양식이 없는자격이 없는 죄인의 삶이였음을 깨닫고 돌아온 아들입니다아버지는 아들의 그 깨달음을 위해 유산까지 내어주어 보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먼이 세상 나라에 태어난 이유입니다도끼마조’ 하라고~~~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아들의 죄를 아버지께서 먹어 버리셨기에 아들의 자격이 회복되었습니다.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먹고 즐기자.

히브리어 알레프는 와 하느님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소를 하느님으로 비유합니다.) 아들의 부정함을 먹은 아버지그 하느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시어죽었던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그래서 그 죽음의 제사로 기쁨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하느님 나라에서 먼 이 땅(세상)의 내 뜻을 위한 삶이되새길 것 없는구원의 헛된 양식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 참 양식인 하늘 아버지의 구원의 약속그 말씀 양식의 필연성을 깨닫고 돌아오라 보내신 작은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요점입니다.

성경 말씀을 사람의 뜻을 위한 사람의 지혜로 보고 듣지 말고 하느님의 지혜의 뜻곧 대속의 죽음그 십자가의 복음을 진리로 깨달아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향해 살다가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라 하심입니다.

그때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하늘 아버지께서 곧바로 달려 나오시어 반가이 안아주시며 입을 맞춰 주실 것입니다나를우리를~~~

깨달음의 때지금입니다생각만 해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합니다아버지아버지 품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의탁합니다성령이여 늘 함께 하소서~~~

 

♡ 아멘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15,1-3.11ㄴ-32)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2)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카15, 2. 21~24 참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정한 자 혹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로 여겨지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애초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한결같이 거부하므로(루카14,18~20), 그들은 단 한 명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루카14,24). 

 

그래서 대신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사람들곧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 속에서 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식사를 즐기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랑하는 율법과 거리가 먼 이들을 받아들이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신 이유는 당신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선취하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루카14장). 

 

여기서 '받아들이고'로 번역된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 receives; welcomes)의 원형 '프로스데코마이'(prosdechomai) 어떤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며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로마16,2; 필리2,29). 즉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는 도움을 얻거나 존경하기 때문에 맞아들이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실 때, 마치 유대인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하듯 하신 것이다. 경멸받으며 기피되던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당시의 사람들,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루카7,34). 유대인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같은 부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람들 중에서도 경멸받는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필리2,7). 

 

하지만 잃어버린 자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이 초청을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들이 분명하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카 복음 15장 6절과 10절이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 '잃은 은전 한 닢의 비유'의 결론이 되어서, 잃어버린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런 기쁨은 한 명의 죄인이라도 찾고 찾으시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발견할 때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 돌아온 죄인들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반드시 놀라운 기쁨이 생겨난다. 

 

루카 복음 15장 10절의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표현은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속한 천사들도 기뻐할 정도로 너무도 중요한 사건임을 나타낸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카15, 21~24 참조)

 

원문에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휘오스 수'(hyos su; your son) 즉 '당신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주인으로 인식하고 부르고 있는 것을 드러내 준다. 아들에게 있어 그의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의 자의식(自意識) 속에는 아버지가 주인(主人)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서'라고 표현되는 '타퀴'(tachy; quickly)라는 부사로서 응답하신다. '재빨리','신속하게'로 시작되는 이 말에는 아들을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깨끗하게 단장하여 집으로 맞아들이려는 부성애(夫性愛)가 녹아 있다. 

 

한편,'옷'이라고 번역된 '스톨렌'(stolen; robe)은 발까지 내려오는 남자용의 헐렁한 겉옷을 말한다. 이런 류의 옷들은 주로 왕들과 사제들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만 입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존귀하게 여겨 이전에 그가 지녔던 아들로서의 권위와 품위와 지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좋은'으로 번역된 '프로텐'(proten; best)이라는 단어가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처음의', '첫째의'라는 의미로서 명사, 관사와 함께 쓰여 실제로나 생각에 있어 가장 완벽한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그가 입었던 옷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옷을 말한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에 해당하는 '도테 닥튈리온 에이스 텐 케이라 아우투'(dote daktyllion eis ten cheira autu; put a ring on his finger)에서 '가락지'('닥튈리온'; daktyllion; a ring)는 '손가락'을 뜻하는 '닥튈로스'(daktyllos)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손가락이나 가락지는 어떤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가락지도 아버지의 재산이나 권위를 이어받는 상속자로서의 자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반지를 끼었다는 그 사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위를 아들에게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에서 '신겨 주어라'에 해당하는 '휘포데마타'(hyodemata; shoes; sandals)는 '휘포데마'(hypodema)의 목적격 복수로 '발에 매는 것' 즉 '샌달'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에게 신발은 자유인의 표시였다. 

 

당시의 종들은 맨발로 생활하였고, 또한 손님이 집에 들어오면 신발을 벗게 되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주인(主人)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버지가 신을 신도록 허락했다는 것은 종살이하던 먼나라에서 맨발로 돌아온 아들을 집을 나가기 전과 같이 여겨주었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상속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락지도 손가락에 끼웠으며, 더군다나 아버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인만이 신을 수 있는 신발을 가져다가 신김으로써, 아들의 신분은 이제 집에서 나가기 전에 누렸던 상속자의 위치로 회복되었다. 

 

작은 아들이 자신을 스스로 아버지의 종으로 생각한 것과는정반대의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살진 송아지'로 표기된 '톤 모스콘 톤 시튜톤'(ton moschon ton siteuton; the fattened calf)는 가장 귀한 손님이 오는 날에 잔치를 베풀기 위하여 준비해 둔 것이다.

 

 이 송아지는 여러 마리 송아지 가운데 살이 가장 많이 오르고 기름이 흐르는 것으로서 귀한 손님이 올 경우에 잡으려고 특별히 양육해 왔던 송아지이다. 그것은 원문상으로도 '톤 모스콘'(ton moschon; the calf)로서 정관사 '톤'(ton; the)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잡아라'로 표기된 '튀사테'(thysate; kill it)의 원형인 '튀오'(thyo)가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주로 희생 제사에 관련된 것이기에 일단은 사람이 먹기 위해 송아지를 죽이는 의미가 있지만, 그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송아지는 어쩌면 죄를 지은 자신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 앞에서 송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송아지가 죽는 저 자리에 죄를 지은 자신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버지와 하느님께 크나큰 죄를 지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리라 보는 것이다.  

 

이제 그래서 잃은 것의 회복과 그로 인한 주인의 기쁨이 '먹고 즐기자'에 해당하는 '파곤테스 유프란토멘'(pagontes eupranthomen; let's have feast and celebrate; let's eat and be merry)로 나타난다. 

 

이처럼 하느님을 떠났다가 회개하고 다시 하느님의 자녀의 자리로 돌아온 자를 맞이하는 하느님의 기쁨이 바로 이런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이렇게 다시 정리되니 참 기쁘다. 

 

무엇보다도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죄인들인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품에 돌아왔을 때, 하느님께로부터 이런 감당치 못할 자비를 영적으로 얻어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래서 이런 주님의 크신 용서와 자비로 표출되는 사랑에 대해 어떻게 사랑으로 보답해야 되겠는지를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묵상하게 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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