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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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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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1-03-05 ㅣ No.145044

 

 

오늘 복음은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이건 누구나 다 잘 아는 복음 내용입니다. 탕자가 회개한다는 내용입니다. 결론만 보면 아주 싱거운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루카복음 15장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내용은 15장에서 나오는 세 비유 중 세 번째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아니면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하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는 이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전에 두 비유를 언급하고 탕자의 이야기를 하는 의도는 이 이야기도 회개를 다룬다고 하는 내용을 언급하고자 하는 의도가 밑바탕에 전제되었을 겁니다.

 

조금 흥미로운 것은 양과 은전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표현이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돌아온 작은 아들은 솔직히 잃어버렸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표현을 하면 자기 발로 스스로 나간 거라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말미에 보면 아버지는 이 작은 아들을 두고서 큰아들에게 하는 말씀이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고 하십니다. 사실 오늘 이 복음은 묵상한다면 묵상거리는 무궁무진할 것 같습니다. 늘상 보는 복음이지만 저는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에 앞서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모두 공통적으로 서두에 이 비유를 듣고 있는 대상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시지만 그 이면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어서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하는 의도로 이 비유를 들어주셨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어울렸을까요? 근묵자흑이라는 사자성어처럼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쁜 본을 보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나쁜 모습을 닮게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주위에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이 범주의 예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차원을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꾸짖고 바른 삶을 살아라.” 하고 말씀을 하시면서 얼마든지 훈계를 통해 가르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어울리셨던 것일까요?

 

비록 인간의 눈에는 죄인이지만 만약 그들을 죄인이라고 단죄를 하는 사람과 그들 모두를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되면 사실 도토리 키재기처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겁니다. 예전에 제가 적십자 봉사를 하면서 한 회원 한 분이 보호관찰소 일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민간인이면서 하는 봉사입니다. 여러 차례 그분을 도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비행 청소년이라고 하는 애들을 많이 접해봤습니다. 그 애들을 여러 차례 접하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 학생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빈곤이 아니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집이 부유한 가정의 아이도 있었습니다. 단 한마디로 말하면 애정과 사랑의 결핍이었습니다. 그때 사랑과 애정이 좋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게 결핍이 되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애들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사랑과 애정 결핍으로 사람의 인성이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면 그 결과만을 가지고 그런 사람을 나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그들을 향해 또 한 번 사회가 돌을 던지는 결과를 낳게 되는 형국이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도 그런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어울리신 것도 그들의 영혼이 가엽게 보여셨을 겁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그들과 우리의 죄를 저울로 달아보면 거의 수평으로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큰아들이 화를 내고 하는 이유는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물론 정답은 없겠지만 몇 가지 유추를 한번 해볼 수 있을 겁니다. 혹시나 자신이 다음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에 대해 일정 부분 또 동생에게 자기 몫이 갈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염려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이 부분은 차치하고 아버지는 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아버지의 것이 다 큰아들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행간의 숨은 의미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큰 아들이 생각했던 염려가 실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큰아들은 여기서 눈에 보이는 그런 모습만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왜 하셨는가를 한번 고민을 해본다면 진정한 재산은 눈에 보이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유형의 재산 같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옛날 말이지만 옛날에는 남녀간에 사랑을 해도 남자가 여자를 향해서 너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말하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말처럼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처럼 실제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좋은지를 피부로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건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를 본다면 좀 더 잘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아우가 다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말씀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처음에는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것은 실제 살았다고 한들 그게 산 목숨이 아니라는 말씀과 같은 것처럼 들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실제 오늘 복음의 비유와 전혀 다른 묵상을 하게 됩니다만 저는 오늘 이 복음에서 큰아들의 모습이 제 모습과 같다는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동생이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받아들이는 모습에 못마땅해 하는 모습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지내는 모습 말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품이 바로 하느님의 품이고 또 신앙의 울타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요사이 실제 한 이 년 정도만이라도 아니면 일 년 정도 그냥 하느님 품을 떠나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신앙의 울타리가 아주 좋은 것인데 그게 눈으로 느끼지 못하고 그 가치를 모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포도는 포도나무인 예수님 가지에 붙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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