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돌아도 돌아도 행복한 길♬~순례길165처(청송노래산/상주옥터/신앙고백비/배모기/문경마원성지/진안리성지/여우목성지/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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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남 [agnes536] 쪽지 캡슐

2022-06-24 ㅣ No.101051

지난밤 추적거려 내리던 빗줄기가 오늘 새벽 5시반에는 말끔히 그치고

하룻밤 잠자리 윈 모텔을 빠져나와 차에 오른 바깥 풍경은...

밤새 더 짙은 녹색의 푸르름을 안고 청량제 마구뿜어대고 있는

사과의 고장 청송땅은 어제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는 듯 상쾌하다.


노래산 교우터가 있는 상부댐에 도착한 시간은 5시 47분이다

산꼭대기를 향해 자꾸만 올라가라는 표시등을 켜주는 네비양따라 올라가는데

검문소에서 나온 남자가 길을 막으며 신원을 확인하자고 한다.

천주교 촌락들이 있었던 노래산 자락을 찾아간다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려대며

노래산 저넘어 한농복구회를 찾아가보란다. 그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사는 것같다는... 안내를 받고선...

 

청정지역 노래산 산길을 또 새벽부터 돌아돌아 한없이 달려간다.

"할배요... 노래라도 불러야 하는거 아니라요?^^

오믄서 봉께 신노래길... 새노래길... 다 있는거 보믄 새들도 노래하고, 새로나온

따끈따끈한 노래라도 불러댐서 올라가야 안되겠는기요?..."


산속 깊은 골에 똑같이 생긴 여러채의 집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 마을을 들어서노라니

길가 허리굽은 할매 한사람이 보이길레...

"천주교 교우촌이 있었던 데가 혹시 어디냐고 " 물었더니

"교우촌? 내가 30년전부터 여기 들어와 살았는데 그 전에 살던 사람들은 몰러요"


오늘도 시작부터 찾아가는 교우촌 마을은 꽝! 인가보다.

노래산 한바퀴 둘레길을 다 돌아 허탕치고 빠져나오는데..

저 멀리 산꼭대기 허리춤에 걸려있는 구름인양. 안개인냥...

머리풀어헤친 하얀운무들이 숲들의 숨들을 마구

쏟아 내는 것같은 오염되지 않은 공기들을 어제 오늘... 넘치도록 마셔댄다.


노래산. 머루산. 문수산. 일월산~을 뱅글뱅글 이틀을 돌고돌아 나오며

13년전 관산동 성당 좁은 개수대에 설겆이하며 돌리고 돌리고~로 엉덩이춤 신나게

추어대며 설겆이하던 아가타 형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또 무슨 생뚱한 행복인가!


도회지의 사과를 온통 책임지고 있는 역군의 도시 청송땅 노래산을 빠져나오는

6시 28분의 시간은 리노할배의 입을 계속 찢어지게 한다.

"아함~ 졸려~!"


청송을 찍고 상주를 향해 달려가는 길은 강원도처럼 터널이 꽤 많이 나타난다.

숱한 터널들을 다 지나오면서도 못보았던 고릴라의 콧구멍 두개가 선명하게

멀리서도 보이는 이 현상은 또 무슨 착시현상 인지...

왕복의 두 터널이 가까이 붙어있는 모습이 꼭 고릴라의 콧구멍처럼.... 두 눈알처럼...

재미지다가도 막상 콧구멍속으로 차가 빨려들어갈땐 좀 으시시?하기도 하다.^^

8시경 도착한 상주옥터....에서 성모님따라 십자가의 길로 인사드리며 오늘의

순례길을 열어간다.

이곳 상주 옥터는

구한말 상주.문경 지방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순교한 곳으로 상주 관아의 처형 터 였다.한다

구한말 상주 진영의 옥 터는 현재 상주시 성동동 남문시장 옛 소전걸(현 상주 청과물시장)이다.

 

박해시대 때, 이곳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이 왕산 남쪽 아래에 있는 관아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았는데,

심문을 받는 중에 배교하거나 순교하는 신자들도 많았다. 는 기록들을 읽으며

무수한 신앙의 선조들이 이땅에다 흘리고 쏟은 보배로운 선혈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눈부시도록 쏟아져 내리는 은총의 소낙비 또한 안고 돌아나오며

9시 상주시 청리면에 있는 신앙고백비를 향한다.

상주땅 길가마다 늘어서 있는 곶감들의 요람 감나무의 향연또한 다채롭다.

전화가 걸려온 레지나 형님에게 상주땅을 순례한다 했더니 대뜸

곶감을 사오란다...ㅋ.. 이노무 성님은 맨날 리노할매한테 묵고 노는것만

일러주는 세상속 언니인가?.. 간혹 홀라당 벗고 덤벼들수있는 마음편함이

또한 살갑다.


9시31분에 도착한 신앙고백기가 자리한 거룩한 땅!!...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와 그 부근의 내서면과 공성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청리면 덕산리의 서산 중턱에는

신자들을 처형한 ‘화형바위’도 있다.한다.


이곳의 석단산 아래, 현재의 청리면 삼괴 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고백비가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상주에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고백비가 서 있는 삼괴 2리 마을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 김씨 집안

김복운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 중 차남인 삼록(도미니코, )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박해의 참혹한 손길을 피해 목숨을 구한 그는 1886년 프랑스와의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94년부터 1900년 초 김삼록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표징을 단단한 바위 위에 직접 새겼다.


자신과 집안의 문중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 높이 127cm, 폭 39cm, 두께 22cm의 화강암에

전통적인 직사각형의 비석 몸체와 십자형을 하나의 돌로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얹어

신앙고백비를 건립한 것이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상단의 십자형 안에

천주(天主)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비석 부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비록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하나 아직 지방에서는 사사로운 박해가 끊이지 않고 있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을 이렇듯 담대하게 고백했다는 점에서

신앙고백비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둥그런 동산을 돌며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평화와 안도함이

높다란 십자고상 앞 예수님께 마음을 다한 "주님은 나의 목자~의♬

신앙고백의 찐한 찬미노래를 울려나오게 한다.

다음코스는 상주시 이안면에 있는 배모기교우촌...

뱀의 목처럼 생긴 배모기에 세워진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된 후

첫 박해 때부터 형성된 교우촌으로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문중 박해로

낙향한 서광수의 가정이 배모기에 우거해 옴으로써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부근 여러 곳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한다.

 

역대 박해 때마다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한다.

서광수의 자녀 중 3남인 서유오 가정과 4남인 서유도 가정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그들의 후손 중에서 순교자가 4명이나 나왔다.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은

대구 지방의 명문인 달성 서씨 집안으로 초기 경상도 지방의 복음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다.한다


이곳 역시 배와 복숭아들만 잔뜩 심겨있는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모르쇠~땅!...

차에서 내려 산 높은길까지 살피러 올라가자 마자 쏟아지는 폭우속 소나기는

기냥 가라카이~! 고집부리고 올라오니까 벼락비 맞지롱~! 하며 놀려대는듯하다.

도대체 교우촌이라고 찾아가는 데마다 모두 허탕만 치고 돌아나오는 것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신 수양과 인내의 시간이라 받아들여야 하리라~~!!

문경땅을 향해 달려간다.

11시25분에 도착한 문경땅 마원성지엔 대구서 왔다는 교우부부가 

순례길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모님께 인사드리고 둥그런 동산에 붉은피 얼룩졌던 그날의 시간을 청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 올라간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어제완 달리 햇빛이 쏟아지는 작은동산엔 싱그러운 이슬의 합창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는듯 우리와 함께 행복하다.


경북 문경군 문경읍 마원1리는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빼앗긴 박상근 마티아 등

30여 명 순교자들이 살았던 신앙의 터이다.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들면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아기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그러던 중 이곳에 박해의 회오리가 불어온 것이 1866년 병인년 마을의 교우 30여 명은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돼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특히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이곳에 남아 있다.

문경 토박이로 아전이었다고 전해지는 그는 아마도 신유박해 이후 이 지방으로 숨어든 듯하다.

충청도의 신자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지방인으로서는 빠른 시기에 입교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칼레 신부는 그의 출중한 신앙심과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은신시킨 용기에 대해 치하하고 있다.

결국 병인년 12월에 체포된 그는 평소 친분을 가졌던 문경 현감의 간곡한 배교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칼을 받았던 것이다.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발굴된 것은 1985년 9월의 일이다. 마원리 박씨 문중산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가 있었는데 여러 정황과 중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치명 일기」에서 말한던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인 것으로 확인됐다.

 

안동 교구는 마원에 순교 성지를 조성키로 결의하고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다각적인 성지 개발 계획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한편 순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현양 대회를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12시18분 다음성지 진안리 성지를 찾아 출발하며 가는길에서....

생긴것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어정쩡한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쌩~하니 속도내는

오토바이 한대를 만나 신기하게 구경하며 달려가다 속도위반 빨간 글씨가

띠리링~ ! 하고 울려대어 정신을 차려 현실로 돌아와 보니....

"에구~! 우짜믄 좋으노.. 속상해 죽겠네.. 고속도로에서 속도위반이니

벌금도 수월찮게 나올껀데... 아이구~ 아부지! 우짜믄 좋아요..ㅠㅠ"


12시26분에 도착한 진안리 성지는..

영남의 관문인 새재와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해 있으며 사목보고차

서울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이다.

문경새재는 옛날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이다.

뜨거운 햇살아래 피땀으로 얼룩진 몸을 늘어뜨리고 매달려계신 주님께 인사드리고

성모님과 함께 또 대낮의 열기속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참음과 극기의 삶을

청하며 내 신앙의 자유를 향해 날아간다.

한길 대로변 가의 진안성지는 온갖 차들의 고성방가로? 정신이 산란한데

최양업 토마스 사제에게 쬐끔은 죄송한 마음이 들어옴 또한 강산이 몇백번도

더 바뀌어버린 시대의 소란스러움 이라..어쩔수 없나이다..!! 얼버무려 본다.


1시 조금넘어 출발한 다음코스 여우목성지엔...

103위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부근의 교우촌인 ‘건학’과 ‘부럭이’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서로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고 서로 도와가며 열심한 교우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초대 교우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이 충북 청원에서

이곳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때 순교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와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의 가정이

몇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으로 우거해 살았다. (이양반들은 보은 멍에골성지에서 만났던 분들인데)

또한 경상도 첫 신자 가정 중의 한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이 기해박해쯤 이곳 여우목으로 피난 와서 살았다.


서치보 요셉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 49세였다. 그 후 선산(현 여우목 마을이 있는 뒷산)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이곳에 새로이 산소를 마련하여 아들 서인순 시몬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한편 이곳에 살다가 상주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들인 서인순 시몬과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이 두 순교성인들을 만나다 보니 이윤일 요한이란 분이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름같아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하! 용인땅 한덕골 근처 500미터 산꼭대기에 진토로 조성된

묘를 찾아갔던 일이 생각난다. 골고타 기둥팻말들이 주욱~ 늘어서 올라있던... 그곳.

그분의 형제가 용인땅에 묻었는데 나중에 대구주교님이 대구교구로 모셔갔다 ..

더니 이 여우목에 잠들어 계셨나 했는데  다음 대구교구를  가서보니... 관덕정에  잠들어 계심을  확인했다.

국 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깨달아 지는게 있다.

똑 같은 이름의 순교자들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전국 곳곳에 나타나는게

첨엔 참 이상타? 어떤게 진짜인고? 했는데.... 옥살이. 처형장.. 시신수습 가묘장.

시간이 지나 진토의 흙이라도 떠다 관련된 모든 땅(성지)에 영혼이 잠들어 계시다는걸..

알아가면서 금수강산 전체가 순교선조들의 통공의 기도로 하늘을 날아 우리후손들의

마음에 신앙의 싹을 틔우고 있다는 하느님 역사를 배워간다.


반짝거리던 해가 이곳 여우목에 도착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때쯤에...

또 질척질척 비가 내려댄다. 행여나 싶어 가져간 우산덕에 비는 피했지만서도...

십자가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골짜기는 깊고.... 비는 내리고.... 저 아래 어디선가 간간히 들려오는 옥타브높은 여인의 소리..

 

"반석아부지... 여게가 여우들이 넘어다니던 길이라서 여우목 아일까요?

어째 쫌 으시시~ 한데 서둘러 내리갑시더"


2시18이 되는 걸 보고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 한실교우촌을 또 찾아 떠난다.

한시간 가까이 걸려 찾아온 한실마을교우촌 역시나 저 산꼭대기에서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동네주민들과의 마찰로 성지가는 길에 바리케이트가 쳐져있어

갈수 없다는 휴대폰 너머 관할성당 사제의안내를 들으며

"에구~ 할수없제... 그래도 꼭대기는 간신히 올라왔응께..." 

문경현에서 아전이었던 박상근 마티아는 1866.3.15 경에 한실마을에 좁쌀을 사러 갔다가

칼레 신부가 숨어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신자마을로 알려진 한실에 있는것보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오히려 문경관아 근처에 숨는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관아근처 처남의 집에 칼레신부를 모시게 된다.

3일째 되는날밤 칼레신부가 방문을 잠그는것을 잊고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마침 이웃주민에게 발각이 되어 동이 트기 전 박상근 마티아와 함께 문경을

빠져나와 산을 넘고 계곡을 넘어서 백화산으로 중턱에 도착하였다한다.


박상근 마티아가 체력이 떨어져서 더 이상 걷기 힘들게 되자 칼레 신부는

그의 안전을 염려해 집으로 돌려보낸다 .

집에 돌아간 박상근 마티아는 얼마뒤 숙모 홍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고 문초와 형벌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내다. 결국 1867년 1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한다.

 

한실마을로 피해온 칼레신부는 이후 수많은 위험을 넘기며 문수마을, 한실마을, 연풍마을,

소로골 등으로 피신하다가 10월 페롱신부와 만나 중국으로 넘어갔다한다.

이후 여러차례 한국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타국에서 박해를 피해 전교활동을 하며 건강이 악화되어 프랑스로 귀국하여.

본당신부와 수도생활을 하다 모벡수도원 산하 봉쇄 수녀원에서 선종하였다한다.

 

이번 순례길에는 교우촌들이 많은 안동교구를 찾아 산이란 산은 모두 돌아다닌것 같은데

골짝골짝 숨어 살았던 그네들의 삶처럼 아직도 그날의 포졸들이 두려워서 임인가

도대체 찾을길이 없을 정도로.... 반경 킬로안의 거리에서만 돌다 온 길인 것 같다.

못찾겠다 꾀꼬리~~!!

그래도 숨은 일도 보시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리노할배네의 열정과 끈기와 신앙을

어제보다는 더 키워주셨으리라 믿으며 지친몸 끌고 북으로 북으로....

막혀있는 고속도로를 뚫고 질주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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