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월 1일 교황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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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 김재환 [kjh980817] 스크랩 202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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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4o번역 :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전
2024년 1월 1일 월요일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새해의 시작을 밝혀줍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드님은 여인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다”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고대에는 시간을 물이 담긴 항아리로 측정했습니다. 항아리가 가득 차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때가 차다”라는 표현은 역사라는 항아리가 가득 찰 때, 하느님의 은총이 넘쳐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고, 이는 여인,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도구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한 오랜 세월 동안 한 방울씩 준비해온 사람들과 세대의 절정입니다. 어머니는 그래서 시간의 신비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역사를 뒤집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여인”이라는 단어 하나로 우리를 창세기의 시작으로 되돌려보내어, 어머니와 아기가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을 나타낸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간의 시작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새해가 시작될 때 그녀를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느님의 신실한 백성이 에페소의 그 용감한 그리스도인들처럼 기쁨으로 그녀를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이 단어들은 주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가 우리 인간성에 영원히 결합하셨다는 기쁜 확신을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단순한 구절이지만, 주님의 영원한 계약을 우리와 함께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믿음의 교리이면서, 또한 “희망의 교리”입니다. 하느님이 인간 안에, 인간이 하느님 안에, 영원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때가 차서,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을 보내셨고, 그 아드님은 여인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성 바오로는 또 다른 보냄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6) 성령을 보내심에도 어머니가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성모영보 때에 그녀 위에 머무셨고 (루카 1,35 참조), 나중에 교회의 탄생 때에는 사도들이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때 내려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14). 마리아의 성령에 대한 수용성은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녀는 “존엄한 주님을 우리의 형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토마스 오브 첼라노, 제2 생애, CL, 198: FF 786),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외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어머니됨은 하느님의 아버지의 자비로움으로 가는 길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장 직접적인, 그리고 가장 쉬운 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스타일”입니다: 가까움, 연민, 그리고 자비. 실제로, 어머니는 이론이나 임무가 아닌 무한한 선물인 믿음의 시작과 중심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선물은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만들어 주고, 아버지의 사랑의 성전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요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우리는 ‘마리아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칼리아리에서의 강론, 1970년 4월 24일), 즉 “마리아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의 여성적인 얼굴을 되찾기 위해 마리아가 필요합니다. 여인, 동정녀, 어머니이신 그녀를 모델이자 완전한 이미지로 닮아가기 위해 (민족들의 빛, 63 참조), 여성에게 공간을 만들어주고, 관심과 돌봄, 인내와 모성의 용기를 특징으로 하는 사목 사명을 통해 “생명력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또한 평화를 찾기 위해, 폭력과 증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의 눈과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 어머니들과 여성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모든 사회는 여인이라는 선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여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존경해야 합니다. 단 한 명의 여성을 해치는 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그 여인이 역사의 충만함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처럼, 그녀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보다 자녀들의 성장 단계와 긴급한 필요를 더 잘 알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이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요한 2,3 참조). 자녀들의 필요가 그녀를 움직여,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개입을 요청하게 합니다. 카나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리고 그들은 항아리를 가득 채웁니다 (요한 2,7). 마리아는 우리의 필요를 알고, 우리의 삶에 은총이 넘쳐흐르도록 중재하며, 진정한 성취로 이끌어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우리의 결점, 외로움의 시간, 내면의 빈자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충만의 어머니인 마리아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안으로 움츠러들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녀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매듭을 더 이상 풀 수 없을 때마다, 그녀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평화가 부족한 우리 시대는 인류 가족을 재결합시킬 수 있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보아, 하나됨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녀의 모성적 창의력과 자녀들에 대한 관심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녀는 자녀들을 하나로 묶고 위로하며, 그들의 문제를 듣고 눈물을 닦아줍니다. 그리고 몬테베르기네 수도원의 ‘수유하는 성모’ 성화를 바라봅시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를 돌보시고 가까이 하십니다. 그녀는 우리를 돌보고 가까이 하십니다.
올해를 하느님의 어머니께 맡깁시다. 우리의 삶을 그녀에게 봉헌합시다. 그녀의 부드러운 사랑으로 우리의 눈을 충만으로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시간의 충만함”이시며, 모든 시간의 충만함이시며, 우리 각자의 충만함이십니다. 사실, 이렇게 쓰인 적이 있습니다: “시간의 충만함이 하느님의 아드님의 파견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의 파견이 시간의 충만함을 가져왔습니다.” (마르틴 루터, 갈라디아서 강해 1516-1517, 18 참조). 형제자매 여러분, 이 해가 주님의 위로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이 해가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부드러운 모성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이제 함께 세 번 외쳐봅시다: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회원 김동영 레오나르도, 김현중 요셉 형제님 번역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전
2024년 1월 1일 월요일
https://youtu.be/I7m8M9-AuKc?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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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새해의 시작을 밝혀줍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갈라 4,4). "때가 찼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고대에는 물이 든 항아리를 사용하여 시간을 측정했습니다; 시간의 경과는 빈 항아리가 채워지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표시되었습니다. 따라서 "때가 찼다"는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의 항아리가 가득 차면, 하느님의 은총이 넘쳐흐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한 여인, 성모님을 통해 사람이 되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수단이시며,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을 "한 땀 한 땀" 준비하신, 긴 인류의 계보의 정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시간의 신비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역사를 뒤바꾸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여인"이라는 한 단어로, 성경은 우리를 시작, 창세기로 되돌려 보내며, 어머니와 아기가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을 나타낸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시간의 시작에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우리의 거룩하신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해를 성모님을 부르며(성모님께 간구하며) 시작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들이 에페소의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듯이 성모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로 기쁘게 칭송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주님, 즉 엄마의 팔에 안긴 작은 아기가 우리의 인성과 영원히 하나가 되셨다는 기쁜 확신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인성은 더 이상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이는 우리와 맺으신 주님의 영원한 계약을 고백하는 간단한 문구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이는 신앙의 교리이지만 또한 "희망의 교리"입니다. 인간 안에 계신 하느님, 하느님 안에 있는 인간, 영원히.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때가 차자,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성 바오로는 또 다른 파견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시어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갈라 4,6). 성령을 보내시는 데에도 성모님께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수태고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님께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알리는 사건) 때 그녀 위에 내려오시고(루카 1,35 참조), 후에 교회의 탄생 때 “어머니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모인 사도들 위에 내려오십니다(사도 1,14). 성령의 활동에 대한 성모님의 수용성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선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모님은 "위엄의 주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토마스 첼라노, 제2생애, CL, 198: FF 786).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모성은 우리를 하느님의 부성적 온유함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가장 가깝고 직접적이며 쉬운 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가까움, 연민, 온유함. 실제로 성모님은 우리를 신앙의 시작과 중심으로 인도하십니다. 신앙은 이론이나 과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받는 아들, 딸로 만들고 아버지의 사랑의 성막으로 만드는 무한한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에 성모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심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의 필수사항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마리안(Marian)'이 되어야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칼리아리에서의 강론, 1970년 4월 24일). 즉 "성모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의 여성적 얼굴을 회복하고, 자신의 모델이자 완전한 이미지인 동정녀이자 어머니신 성모님(교회헌장 63항 참조)을 더욱 닮기 위해,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관심과 돌봄, 인내와 모성적 용기로 특징지어지는 사목을 통해 "생명력"을 갖기 위해 성모님이 필요합니다. 세상도 평화를 찾고, 폭력과 증오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인간적인 눈과 마음으로 다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 어머니들과 여성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회는 선물인 여성, 모든 여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한 여성을 해치는 것임을 알고 여성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성모님, 그 여인이 때가 찼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듯이, 성모님은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결정적입니다. 어머니만큼 당신 자녀의 성장의 단계와 긴급한 요구를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또 다른 "시작"에서 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행하신 첫 번째 표징입니다. 거기서 성모님은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깨닫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분입니다(요한 2,3 참조). 자녀들의 필요가 성모님을 움직여 예수님께 개입해 달라고 간청하게 합니다. 카나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들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요한 2:7). 성모님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우리 삶에 은총이 넘치도록, 그리고 우리 삶이 참된 성취로 나아가도록 중재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결점이 있고, 외로움의 시간이 있으며, 채워져야 할 내적 공허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충만의 어머니신 성모님이 아니면 누가 우리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신 안으로 물러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마다 성모님께 달려갑시다. 우리 삶의 매듭을 더 이상 풀 수 없을 때마다 성모님께 피신합시다. 평화를 잃은 우리 시대는 인류 가족을 재결합시킬 수 있는 성모님이 필요합니다. 일치의 장인이 되기 위해 성모님께 의지합시다. 성모님의 모성적 창의성과 성모님의 자녀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렇게 합시다. 성모님은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고 위로하며, 그들의 고민을 듣고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몬테베르지네 수도원의] 젖 먹이는 동정녀의 그 부드러운 성화를 바라봅시다. 우리의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를 돌보십니다: 얼마나 부드럽게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지. 성모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곁에 머무십니다.
다가오는 새해를 하느님의 어머니께 맡겨드립시다. 우리의 삶을 성모님께 봉헌합시다. 성모님은 부드러운 사랑으로 우리의 눈을 충만함으로 열어주실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때의 충만", 모든 때의 충만, 우리 시대의 충만, 우리 각자의 충만이십니다. 실제로 한때 이렇게 쓰여졌습니다: "때의 충만이 하느님의 아들을 보내게 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심이 때의 충만을 가져왔다" (마르틴 루터, 갈라티아서 강의 1516-1517, 18).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가 주님의 위로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올해가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성모님의 부드러운 모성애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함께 세 번 선포하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원문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4/documents/20240101_omelia-madredidio-pace.html
김동영, 김현중의 번역문 : https://cafe.naver.com/cellfatima/196
바티칸 교황청 2024년 1월 1일 미사 영상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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