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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4년 12월 28일 (토)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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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원리 10

232511 조병식 [goodactor] 스크랩 2024-12-22

서로가 함께 못사는 이유

사적 의식과 감정의 강화와 확대
그 사적 신원과 정체에 원죄라고 하는 선에 대한 반목과 거역과 저항이 있는 성격이 다분할 때, 이에서 비롯되는 상태와 양태가 빚어내는 가능태와 현실태
서로에게 그런 사적 의식과 감정, 정서가 함께 살므로써 생기는 상호간의, 상대적인 갈등과 대립, 대치와 충돌, 다툼과 싸움이 벌어지는 현상 속에서 그 상호성과 상대성을 기반으로 한 서로에 대한 반감의 형성, 적대적 의식과 정서의 고취(충동과 자극과 유발과 야기), 바람직한 관계성의 미성립과 불확정, 상실과 포기, 파탄과 절멸

사람들이 어떠어떠하고 그러저러하다고 할 때는, 대체로 하느님이 사람들을 그런 성격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신비와 미지를 분명히 분간할 수 있는 것이다
신비란 쉽게 말해 하느님은 알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신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에게도 미지로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거나 생기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 것이 별도로, 따로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과연 그런 것이 있을까
보통 악이나 죄는 하느님을 원인으로 삼기에는 대단히 부적합하고 부당한 성격이자 작동이다
그렇다고 그런 성격이나 작동을 하느님과 상관없는 어떤 미지로 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실제에서 사람이 악하게 굴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보통 악이나 죄는 사회성이란 토대와 공동체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없이는 그 발화적인 성격을 성립시키지 못하고, 실현가능성이 전제되지 않기에 사실로 나타나기 어렵다
사람의 어디에서 악이 형성되고 죄로 발화될까
많은 경우는 감정에서, 그 감정의 덩어리들이 의식적으로 커지면 어떤 지향점과 방향성을 갖는 내적결정을 만들어 스스로 작동가능한 심리상태를 만드는 것 같다
사람은 어디에서 억울함과 부당함을 느낄까
'느낄까' 이다
분명히 말이다
억울함과 부당함에 사무치면 어떤 보복이나 복수에 대한 심리상태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면 그런 보복과 복수의 대상이 되는 쪽은 이미 특정이미지로 굳어져 그런 심리상태의 일방적 관점이 관철되어야 하는 그 작동의 대상으로만 각인된다
참으로 인간성의 깊은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구약에는 요셉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현실, 그곳에서 인간삶의 사실들이 빚어지고 펼쳐진다
인간들의 사랑과 미움, 애착과 적대, 편애와 소홀, 그 인간중심의 호불호는 감정의 결합과 호응이 그 중심에 있다
인간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감정의 결합이 상호간에 친밀하고 원만해 원활한 소통과 교감을 이루고, 다정하고 애틋한 상호간의 호응과 친분이 두텁다는 말과도 거의 같다
대체로 양자간의 단일화를 이루는 서로가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관계일수록 그 사실은 더욱 뚜렷해진다
실제로도 한 인간이 여럿에게 그 감정을 똑같이 분산하고 나누듯이 발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한 인간은 한 인간에게만, 대체로 사실에 가까운. 인간의 성격과 역량에 비추어도, 인간이 수용하고 감당할 정도의, 그 몫에 알맞는 실제인 것이다
어떤 종교에는 천수를 가진 신적존재가 있다는데, 그 이미지는 대충 말을 안해도 그 신적성질을 그런 이미지로 나타낸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이야기 속의 존재가 아니다
야곱은 인류사로 치자면 어떤 부족의 시조이다
야곱으로터의 부족은 열 두 지파라는 공동체의 형태로 만들어지는데, 야곱의 열 두 아들이 그 시조들인 셈이다
한 아내로부터 열 두 아들을 얻은 것이 아니라, 야곱의  일편단심은 라헬이었지만, 삼촌 라반의 기만으로 그 언니인 레아를, 그 둘의 시기와 경쟁으로 그 둘의 몸종들로부터도 그 아들들을 얻은 것이다
문제는 야곱의 마음과 성격인 것이다
인격적인 감정이 가는 대상과 그런 인간성의 사유가 없는 대상을 똑같이 여길 수 없다는 것은 같은 사람으로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야곱은 그래서, 그 열 두 아들 가운데 라헬이 낳은 자식인 요셉을 유독, 편애했다
성경이야기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은, 카톨릭신자들이 성조라고 하는 야곱도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다
그런 야곱의 편애는 요셉의 다른 형제들에게 어떤 감정이 생기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 요셉의 다른 형제들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감정이 생기게 되었다)
보통은 그 관계상의 존재들을, 그 사람들을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 보았을 때, 야곱의 편애가 지극히 인간적인 행태라고 보았을 때, 그런 상황에서 보이는 감정을 시기라고 한다
요셉의 다른 형제들은 그 시기심에 불탔고, 아직은 철이 없는 요셉의 행태로(자랑질과 고자질을 일삼는, 꿈쟁이의 요점인 스스로를 높이고 형제, 부모마저 낮추는 식의 인생관과 인생행로가 피력된) 더욱 그 악감정에 더한 악감정으로 북받쳤고, 요셉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이 극에 달해 결국은 요셉과는 함께 살 수 없는 그 악화의 끝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감정이란 함께 살면서 생기는 측면들도 강하다
결국은 서로에 대한 자의식과 자존감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평화란 함께 살만한 자의식과 자존감의 형성, 그리고 성장, 그리고 완성인 것이다
보통은 인격의 완성이라고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살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실에서 서로의 자의식과 자존감이 평화를 이룰만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언제든지 악감정이 생겨 서로가 함께 살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인간들의 어떤 감정들이 바로 서로가 함께 살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결정적 결과의 씨앗들
사람들은 과정인 삶 속에서 결정적 결과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통해 삶의 노고와 수고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
그런 보람들이 없다면 인간삶의 모멘텀은 계속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모든 일들은 그런 관점에서 만들어진다
인간삶의 현주소이자, 인간됨됨이의 정도와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는 바로 현실인 것이다
그 현실에 함께 살아있지 않는 신은, 그 보람을 채워주지 못하는 신은 섬김받지 못하고 숭앙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사람들끼리도 대체로 그 평판과 평가를 좌우하는 것이 그런 관점인 것은 사실이다
정의는 그런 보람의 기준이 되고, 그런 삶의 현실에서 그 보람찬 일들의 질서를 세우는 기초인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정의는 최소한 사람들에게 그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그런 보람들을 없애려 하는 정의가 포기된 듯하게, 정의가 상실된 듯하게, 정의가 실패된 듯하게 꾸미고 부추기는 작동에 대해 냉철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 모든 일이 다 일어나고 벌어지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리는 그 모든 일에 가차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언제나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동양쪽, 인도에서부터 비롯된 종교들, 힌두교나 불교같은 종교는 인간삶에 대한 관점과 세계관이 카스트라는 제도화된 관행과 카르마라는 관습화된 정체를 내세워 인간삶이 그런 원리로부터 파생된, 부과된 삶이란 것을 수용하고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
그러나 카톨릭은 인간삶이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삶임을 가르친다
생명, 축복은 그런 삶의 기본적인 전제이자 전형성이다
그러나 동양쪽의 종교들은 대체로 삶이 고해라고 한다
그래서 그 고해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런 종교적 삶의 목표 아닌 목표로 삶 전체가 목적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쪽의 인간삶에 대한 관점과 이를 아우르는 세계관은 그 갈래들인 것처럼, 주역이니, 사주팔자니, 풍수지리 같은 논리들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삶의 자유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 자유를 억제하고 어떤 굴레에 속박시킨, 그 지배율이 가동된 상태에 놓여진 사물화된 정형처럼 그 틀을 입힌 노예화의 산물같이 여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은 하느님의 본질과 성격에 따라 선사된 삶의 충분함과 충만함을 살도록 가르친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
단지 삶이 고통스럽기에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을 작동하도록 만들고 작동시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정치판에서의 혼란은 언제나 그치지 않는다
정치적 감정이란 대체로 권력을 두고 벌이는 정치적 이슈들과 사태들로 점철된다
권력을 빼 버리면 누가 정치를 할까 싶지만은, 결국 사람들이 함께 잘 살기 위해 정치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권력 때문에 정치를 하려고 드니 언제나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감정은 현실적으로 권력적 감정과도 같은 말이다
그래서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그 행태를 부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처럼 공동체의 삶이 사랑으로 결속되고 함양되어 그 사랑을 그 삶의 지속가능성으로, 원동력으로 삼으면 언제나 평화는 변함없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그러한 평화로 영원할 것이다라는 것은 진실이다
인간성도, 사람이 지닌 지성도, 욕망도, 본능도 모두 사랑에 귀속되어, 사랑에 융화되어 그러한 인격을 이루어 사랑에 부합하는 삶을 산다면 그런 이들이 함께 사는 삶에는 그 모두에 부합하는 평화가 함께 할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언제나 정의에 목마른 세상, 언제나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 할 세상, 삶은 그 세상 속에 있는 지금 이곳에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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