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온전한 삶 “회개하라, 배워라, 섬겨라, 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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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45 선우경 [forgod] 스크랩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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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28.연중 제26주일
아모6,1ㄱㄴ.4-7 1티모6,11ㄱㄷ-16 루카16,19-31
온전한 삶
“회개하라, 배워라, 섬겨라, 나누라”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의로운 이를 사랑하시네.”(시편146,8)
총체적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나라안팎 모두에 해당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참으로 회개가 절박한 시대입니다. 위기의 본질은 자기를 잊고, 잃고 산다는 것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나의 온전한 삶을 위한 회개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야 하는 작금의 세상이요 파스카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레오 교황의 단편적인 말씀도 회개를 촉구합니다.
“단순한 사람들의 믿음이 교회를 인도한다.”
평범한 이들의 진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실현되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잘 살아라, 그러면 좋은 세월이 될 것이다. 우리가 세월이다”(Live well and the times will be good. We are times).
교황이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마디도 잘 살아야 하는 회개의 절박성을 일깨웁니다. 옛 현자도 회개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길을 확인하면 걷는 자세가 곧아진다.”<다산>
“행했는데 얻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원인을 살펴라.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자기에게 돌아온다.”<맹자>
자신이 회개를 통해 바르게 되면 곧 하느님이, 이웃이 좋은 도움이 되어 줍니다. 공자의 말씀처럼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톨릭교회 양대 신문의 2025.9.28. 오늘 1면 톱기사와 논설도 정부 당국의 회개가 절실함을 보여줍니다.
“정부, 낙태 합법화 강행...교회 강경 대응 예고, 교회의 우려 좌시해선 안 돼”
“낙태를 국정과제로? 생명경시 ‘도 넘었다.’ ‘손쉬운 낙태’가 국정과제라니?”
모두 일사불란하게 낙태합법화의 부당함을 강조하는, 정부 당국의 구체적 회개의 실천을 요구하는 교회의 입장입니다. 오늘은 제111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레오 교황의 담화문도 전세계적으로 이주민과 난민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작금의 시대에 시의적절하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전쟁과 불의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 조차, 이주민과 난민은 희망의 전령으로 서 있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강인함은 신앙에 대한 영웅적 증거입니다. 신앙은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것 너머를 보고 이들에게 현대의 다양한 이주 경로에서 죽음을 이기는 힘을 줍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교회가 궁극적 본향을 향하여 영원한 여정을 떠나며 희망으로 지탱되는 자신의 순례적 차원을 상기하게 해 줍니다. 교회가 ‘안주하고픈’ 유혹에 굴복할 때마다, ‘순례하는 도성’, 곧 천상 본향을 향하여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 되기를 멈출 때 마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안주에서 벗어나 회개의 여정에 오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웅덩이에 고인 물같은 안주가 아니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 순례 여정에 오르는 것이 참된 회개의 표지입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의 삶이지만 안으로는 하느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일 때 그대로 참된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참으로 탐욕과 쾌락의 무지에 눈먼 어리석은 부자들! 회개가 절실합니다. 위로 하늘의 하느님께, 좌우사방 이웃에 완전히 차단된 고립단절의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세의 지옥입니다. 아모스 예언자의 경고는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 불의한 부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부자의 심판이 그대로 실현됩니다. 천망회회 소일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그 누구도 엉성해 보이는 하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의 심판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두 사람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어떤 부자는 영혼이 없는, 생각이 없는 AI 인간처럼, 투명인간처럼 보입니다. 모든 관계가 차단된 고립단절의 삶입니다. 육적 욕망의 충족이 전부가 된 삶입니다. 이름도 없어 존재감없는 무명의 어떤 부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반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고,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합니다. 너무나 적나라한 대조입니다. 부자의 무관심의 죄가 참으로 큽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짐승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은 까맣게 잊고 오직 땅에 보물을 쌓으며 육적 본능만 충족시킨 삶이었습니다.
특기할 것은 부자는 무명이지만 가난한 이는 <라자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이름뜻입니다. 혼자서는 절대 구원이 없습니다. 더불어의 구원이요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바로 어떤 부자는 라자로가 자기를 구원에로 부르는 시험이자, 회개의 촉구였음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사필귀정, 인과응보, 마침내 사후 이들의 운명은 극적으로 바뀝니다. 어떤 부자의 호소가 참 절박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서로 건너갈 수가 없다.”
단절의 큰 구렁은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계속됐음을 봅니다. 살아 있을 때부터 회개와 함께 나눔으로 큰 구렁을 메꿨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분열과 단절, 차별과 멸시, 혐오와 증오로 인해 건널수 없는 크고 작은 구렁은 곳곳에 얼마나 많은지요! 이어지는 부자의 호소가 절박합니다. 부자는 누군가 다섯 형제에게 가서 회개할 것을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지만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만으로 회개는 충분하다 하며 거절합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살았을 때 회개이지 죽으면 회개도 없습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을 닮으라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오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의 궁극적 목표도 우리 모두의 회개에 있습니다. 부자는 물론이고 모든 신자들의 구원에 필수적인 회개의 의무와 실천입니다. 회개는 배움의 공부로 또 섬김과 나눔의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는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 제자에게 주는 가르침의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이런 수행의 노력과 더불어 섬김과 나눔의 삶입니다. 독점이 대죄입니다.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은 당신의 것 모두를 우리에게 주셨고, 주시고,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배움, 섬김, 나눔의 실천으로 표현되는 주님 사랑이야 말로 진정 참된 회개의 표지입니다.
이 모두를 제때에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1티모6,15-16).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와 일치를 이루시는 하느님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주님은 이방인을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길러 주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시편146,9).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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