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2월 24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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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56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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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주님의 기도
주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아는 형태로는 오늘처럼 마태오 복음서에, 그리고 보다 간결한 형태로는 루카 복음서에 나옵니다(11,2-4). 그런데 루카 복음서는,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하자,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주님의 기도는 주님이 평소에 직접 하시던 기도 가운데 하나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에 앞서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빈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기도,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기도로 왜곡될 우려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는 따라서 정성이 앞서야 합니다. 설득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주님의 기도는 먼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를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의 ‘하늘’은 우주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모든 공간을 초월하는 요소이며, ‘저희 아버지’는 세례성사를 통해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느님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 모두의 아버지임을 밝혀줍니다. 이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남, 아버지의 나라가 오심,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기도하도록 초대합니다. 다음, 주님의 기도는 땅을, 정확하게 말해서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을 향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우리의 잘못 용서, 우리가 겪는 유혹 극복과 악에서의 구원을 기도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나 기도는 올리고 나서 그대로 이루어지는지 확인해보는 작업으로 완성될 수 없는 신앙인의 위대한 몸짓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의무, 참여하겠다는 다짐과 아울러 실천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아멘’으로 마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동시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 아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라는 고백에는 자녀다운 신뢰심과 함께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와 흠숭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도록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신해야 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서로 사랑함으로써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 곧 그날그날 필요한 양식 외에는 이웃과 나누겠다는 결의를 다져야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해서 마땅히 이웃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죄와 죽음으로 이끄는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악에서 해방’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내 마음의 어두운 구석들을 깨끗이하는 노력을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러 번에 걸쳐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고 일러주신 기도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힘차게 외치면서, 기도의 내용 가운데 한 부분만이라도 실천에 옮기는 가운데 자녀다운 모습을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드러내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6,7-15: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단순한 말의 나열이나 형식적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바로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신다. 이는 단순히 호칭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한 이들이 누리는 특권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부르게 하셨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의 귀에 상달되는 것을 확신하기 위함이다.”(De orat. Dom. 9)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기도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라는 청원은 하느님을 더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의 거룩함이 드러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이미 거룩하시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그 이름이 모독당한다.”(In Matth. Hom. 19,6)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기도는 단순히 미래의 하늘나라만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것이 이미 지금 여기서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을 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 삶과 역사 속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여기서 ‘일용할’(ἐπιούσιον)이라는 희귀한 단어는 교부들에게 깊은 묵상의 주제가 되었다. 성 예로니모는 이를 “미래의 빵, 곧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해석했고, 성 치프리아노는 “성체성사, 곧 구원의 양식”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청원은 단순히 물질적 양식만이 아니라,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다. 사순절에 성체와 더 깊이 결합하는 것은 곧 주님의 기도를 사는 길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여기서 주님은 우리의 용서와 하느님의 용서를 긴밀히 연결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가? 입술로 드리는 기도가 네 가슴을 때리고 있지 않은가?”(Serm. 58,9)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내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그분의 자비를 내 삶에 흘려보내는 행위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교부들은 여기서 유혹을 피할 힘과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함께 청한다고 보았다. 성 오리게네스는 “우리가 악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을 청하는 겸손의 표현”이라 해석했다. 마지막 청원은 앞선 모든 기도의 요약이다. 하느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모시고, 악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주님의 기도’는 단순한 암송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신앙의 길이다. 사순절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기도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모시는 삶, 성체 안에서 양식을 얻는 삶,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 악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지향하는 삶이다. 주님의 기도를 입술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바치는 기도가 될 때, 우리는 부활의 빛을 맞이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9)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마태6,7-15)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7-9ㄱ)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입니다. 그밖에 나머지 기도들은 교회가 만들어 놓은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를 바치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 드러나 있는 일곱 개의 청원 중에서 앞에 세 개는 하느님 아버지와 관련된 청원이고, 나머지 네 개는 우리를 위한 청원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예수님 말씀처럼 행동이 없는 빈말만 늘어놓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기도 저런기도 등등 많은 기도문을 소리를 내어 바치는 것으로 나는 기도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삶으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기도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이 주님의 기도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 안에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6,14-15)
참되게 기도를 바칩시다!
송영진 신부님_<‘주님의 기도’마저 ‘빈말’로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1) ‘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기도입니다.
‘후반부’는 이웃 사랑 실천과 용서와 화해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다짐만 하고 실제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 다짐은
‘빈말’이 되어버리고, 신앙생활은 ‘빈 삶’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빈 삶’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항상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바치는 기도는
‘살아 있는 기도’가 되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바치는 기도는 ‘죽은 기도’, 즉 ‘빈말’이 될 뿐입니다.
‘죽은 기도’는 아무리 많이 바쳐도, 또 아무리 끈질기게
기다려도, 응답을 얻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응답을 얻고 싶으면, 영적으로 살아 있으면서,
실천을 통해서 살아 있는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2) 구약성경 잠언에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이 기도는, 기도와 실천의 관계를, 또는 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는,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할 테니까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합해져서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만일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청하기만 한다면,
이 기도는 ‘빈말’이 되고, 실천 없이 말로만 기도하는
그 사람은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또 ‘정해진 양식’을 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불신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과 ‘우리의 노력’ 가운데에서
무엇이 먼저냐고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도둑질을 한 다음에 “주님께서 나를 가난하게 만드셔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라고, 주님 핑계를 대는 경우가
실제로 있는데, 죄를 짓고 나서 하느님 탓을 하는 것은,
죄를 더욱 키우는 일이 될 뿐입니다.
불신자가 되어서 교만하게 살면서, “주님께서 나를 부유하게
만드셔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3)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면서
특별히 강조하신 것은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하느님의 용서’가
이미 인간들에게 주어졌음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웃을 용서한 사람이 주님께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조건”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위한 조건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예 용서를 안 하려고 작정하는 경우라면,
자신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것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빈말’이 아닌 ‘참 기도’를 가르쳐
주려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실제 현실을 보면, ‘주님의 기도’마저도 ‘빈말’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혼자서 독점하는 경우, 이웃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경우, 유혹을 물리치지 않고
그것에 빠져 있는 경우, 죄와 악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경우 등... 그런 상태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일 수밖에 없는데, ‘주님의 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기도’가 다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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