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제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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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98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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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에게 ‘불문율’이 하나 있습니다. 꼭 묻지 않아도 아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성당은 되도록 가지 않는 것입니다. 군 생활도 비슷합니다. 제대했으면 다시 근무했던 부대로 가지 않으려 합니다. 사제가 전에 있던 성당엘 가지 않으려는 것과 제대한 군인이 다시 부대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비슷하지만 이유는 다릅니다. 제대한 군인이 다시 부대로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군 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징병제’입니다. 원하지 않아도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에 입대합니다. 20대의 피 끓는 청춘이 3년간 군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남자들은 누구나 군 생활에 관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들었기에 더 진한 추억이 되는 것입니다. 사제가 전임 본당에 가지 않으려는 것은 후임 신부님에 대한 배려의 차원입니다. 후임 신부님이 사목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특별히 초대받지 않았으면 전임 성당에 가지 않았습니다. 혹 교우들이 후임 신부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후임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4곳의 본당에서 8년 동안 보좌 신부로 지냈습니다. 첫 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던 일입니다. 어머니의 정성과 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뒤로는 ‘덤’과 같이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2년 동안 본당 신부님을 ‘3분’ 만난 일입니다. 덕분에 사제관을 3번 옮겼습니다. 불필요한 짐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세 번째 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사제관’입니다. 성당 신축으로 사제관을 따로 얻어야 했습니다. 사제관에서 성당은 6정거장 정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미사에 늦지 않도록 늘 긴장하며 지냈습니다. 걸어 다닐 때는 운동도 되고 좋았습니다. 네 번째 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본당 신부님’입니다. 책을 좋아하셨던 신부님은 제게 좋은 책을 권해 주셨습니다. 본당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셨고,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번째 본당에서 보좌 신부를 마치고 드디어 본당 사제가 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하나 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나를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내 생각, 내 기준, 내 경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일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갈등과 분열의 시작이 됩니다. 원의 중심이 나 자신이라면, 주변의 모든 점은 서로 다른 거리와 방향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중심이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모두 같은 거리에 서게 됩니다.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을 설명했던 세 명의 심리학자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쾌락’을 추구한다고 했습니다. 아들러는 ‘권력과 우월성’을 추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의미’를 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프랭클은 극한의 상황, 죽음이 가까운 수용소 안에서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줍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쾌락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의미’,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 되려 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 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느님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다른 사람을 품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학연, 지연, 혈연, 이념, 생각의 차이로 나뉘고 있습니다. “나와 같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서로 멀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함께 서 있다”라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서로 가까워집니다. 신앙은 나를 중심에 두는 삶에서,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제의 불문율도 결국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지 않기 위해 물러나는 것, 다른 이를 위해 자리를 비워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 됨’을 위한 작은 실천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서로 다른 상처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중심에 둘 때, 그 모든 다름은 갈등이 아니라 ‘조화’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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