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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6년 6월 5일 (금)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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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전삼용 신부님_나에겐 왜 하.사.시.가 기쁜 소식이었을까?

189964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9:46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마르 12,37)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9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아주 신비로운 대목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율법 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스스로 성령의 바탕에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 12,35-37 참조).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성서 해석이 끝나자, 성경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군중은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기뻤을까요? 예수님이 성경 퀴즈 대회에서 율법 학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었기 때문에 그저 통쾌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군중이 환호하며 기뻐했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그 한마디가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들의 '자존감'을 단숨에 우주 끝까지 끌어올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던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다"라는 교리는 철저히 혈통과 행위, 그리고 세상적 권력을 중심에 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잣대 안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군중은 영원히 구원의 변두리에 머무는 쓸모없는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백성들에게 613가지나 되는 복잡한 규정을 들이밀며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끊임없이 '행위'만을 강요했습니다. 이처럼 행위의 굴레에 얽매인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희망도, 기쁨도 주지 못하는 무거운 감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는 단순한 다윗의 핏줄이 아니라, 다윗조차 우러러보는 창조주 하느님 본인이시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치하러만 오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시어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끌어올리러 오셨다는 위대한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먼저 "너 왜 그것도 못 하니?"라고 행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장 먼저 "너는 하느님께서 친히 목숨을 걸고 찾아오실 만큼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줍니다. 사람은 딱 자신이 가진 자존감만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먼저 주지 않고 행위부터 요구하면, 복음은 짐이 되고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얽매임이 됩니다.

오늘 군중이 느꼈던 이 '복음의 기쁨'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강렬한 체험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원래 활자 매체, 즉 책을 읽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유튜브 쇼츠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저는 빠르고 자극적인 쾌감을 즐기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무려 10권짜리나 되는 방대한 책을 장장 5년에 걸쳐 끝까지, 그것도 너무나 기쁘고 가슴 벅차게 읽어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비가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원제: 내게 계시된 대로의 복음)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읽기를 그토록 싫어하던 제가 왜 이 방대한 책에 푹 빠져들었을까요? 그 책 속에서 저는, 제가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던 '무섭고 명령만 하시는 심판관' 예수님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님은 너무나 자주 눈물을 흘리셨고,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보잘것없는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심장을 다 쏟아내시는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제가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분이 그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제게는 숨이 멎을 듯한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그 따뜻한 예수님과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 다니는 제자들이 미치도록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저분과 더 가까이 머물고 싶다. 저분의 곁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싶다." 이 간절한 갈망과 기쁨이, 세속의 쾌락을 좇던 저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결국 사제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기뻐야 합니다. 나를 심판하는 규칙서가 아니라,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분의 정체성을 깨달아 그분 곁에 찰싹 달라붙어 머물고 싶게 만드는 거룩한 자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미사에 빠지면 대죄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 "봉사를 해야 축복받는다"라는 행동 강령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전하여 신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보다는, 율법의 채찍으로 영혼을 닦달하며 "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만 지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성모님의 진짜 정체성을 온전히 마주할 때, 우리 영혼이 얼마나 압도적인 경외감과 마주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사제 성소에 대해 깊이 갈등하며 고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송탄성당에 홀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당 마당에 세워진 성모님 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성모님 상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처럼 변하더니, 온몸에서 푸르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압도적이고 거룩한 빛 앞에서, 저는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밀려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성모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성모님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분들의 진짜 위대하고 거룩한 정체성을 티끌만큼도 모르고 있었구나.'

복음이 우리에게 하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히 알던 주님과 성모님의 정체성을 거룩한 빛으로 뚜렷하게 보여주어, 우리 존재가 그분들 발치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영원히 머물 수 있도록 우리의 낡은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진행했던 '요한복음 8주 강좌'를 들으신 어느 형제자매님의 후기 글은, 이 '머무름의 신비'가 우리 영혼을 어떻게 부활시키는지 완벽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분은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오랜 냉담과 방황의 고독 속에서 고아처럼 헤매던 나를 따뜻한 말씀의 빛으로 이끌어 주신 신학적 통찰과 다정한 강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강좌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지식도, 신앙의 무지를 단숨에 깨부순 것도 아니라, '그 문이 어디 있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분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조금씩 살아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8주의 여정 동안 말씀의 표징들을 따르는 사이, 나는 언제부턴가 다시 걷고 있었다.

거창한 결심이나 극적인 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강의를 열고 말씀을 듣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 걸음이 어느새 내가 광야를 벗어나 그분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아주 정확하게 복음의 핵심을 꿰뚫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대단한 업적이나 거창한 결심을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분처럼 그저 주님의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성체 조배를 하며 뜨거운 눈물로 주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다 내어주시니, 이제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까요?" 그때 제 영혼 깊은 곳에서 아주 부드럽고도 단호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 네가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내 살과 피,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니, 너는 그저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

이 얼마나 벅차오르는 사랑의 선언입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드시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머무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찰싹 달라붙어 머무르기만 하면 됩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헉헉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있으면, 나무의 수액인 성령께서 가지인 우리에게 흘러들어와 저절로 기쁨과 사랑의 열매를 밀어내 주십니다.

세상의 거짓된 율법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네 힘으로 짐을 지고 가라"며 윽박지르지만, 우리를 진짜 사랑하시는 분은 "짐은 내가 질 테니 너는 내 품에 안겨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복음 선포는, 주님이 나무이심을 알게 하고 우리가 가지임을 깨달아 그분께 기쁘게 붙어있게 만드는 생명의 초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품 안에 찰싹 달라붙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가장 벅찬 기쁨을 누리는 복된 가지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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