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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회
나요한 신부님을 추모하며

7 정선숙 [yk9775] 2003-05-05

나요한 신부님을 추모하며

 

 

  눈비가 몰아치고 바람이 불어 매섭도록 추웠던 지난 2003년 1월 26일 오후 4시. 서울 도심의 명동대성당에서는 교회의 쇄신을 위해 온 교구민이 3년 전부터 준비해온 시노드의 개막미사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러나 교구 끄트머리의 시골 본당에서 서둘러 달려온 한 외국인 사제는 결국 개막미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성당으로 오르는 언덕 입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61년 동안의 삶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스물 넷의 젊은 나이에 멀리 아일랜드에서 전쟁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가난한 나라 한국으로 와 37년간 봉사하신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나요한 (존 나이한) 신부님이었습니다.

 

  나요한 신부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토록 건강해 보이던 분의 갑작스런 죽음은 크나큰 충격이었고, 특히 신부님의 생활과 인품을 알고 있던 신자들에게 그분과의 갑작스런 이별은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사흘 뒤인 1월 28일, 시노드의 개막미사가 있었던 명동성당에 나요한 신부님의 장례미사를 위해 다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갑작스런 죽음이 주는 고통과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장례미사의 강론에서 정진석 대주교님은 미사에 참석한 서울대교구의 사제들과 골롬반회 신부님,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 나요한 신부님을 시노드의 제물로 데려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시노드가 필요로 하는 성직자의 표본으로 사셨던 그분을 하느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제물로 선택하시어 거두어 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나 신부님은 시노드의 개막 미사를 하던 바로 그 시각 명동입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개막 미사에 참석하려고 오시다가 바로 그 시간에 돌아가셨습니다... 개막 미사를 시작할 때 당신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훌륭한 한 꽃, 영혼의 꽃을 제물로 원하셔서 이 분이 가신 것입니다...”

 

  대주교님은 나요한 신부님이 왜 가장 아름다운 제물로 선택되셨는지에 대해 설명하려는 듯, 그날 있었던 입관 예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제였을 때부터 주교가 된 지금까지 성직자 수도자들의 입관 예절을 주관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보면 본당의 레지오 단원, 성모회원이나 가족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오늘처럼 이런 자리는 처음 보았습니다. 오늘 나 신부님의 입관 식에는 코 흘리는 어린아이부터 학생, 대학생, 청년들까지 모두 와서 울었습니다. 아이들이 신부님 입관 식에 참석한 것도 처음이지만 와서 이렇게 우는 것도 처음입니다...”

  

 대주교님이 요약해서 말씀하셨듯이 나요한 신부님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빛을 남겼습니다. 오랫동안 그분을 지켜본 이들의 영혼 속에 밝혀졌던 이 빛은 그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드러난 빛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감동과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분이 남긴 충격과 감동은 우선 가난한 신설 본당인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 본당의 허름한 사제관에 남겨진 유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하늘나라로 떠난 그분이 남긴 유품은 옷가지들과 책, 한문 공부를 하던 카드 두 박스, 오토바이, 한국에 온 이후로 만난 신자들의 사진이 담긴 책자와 고지서였습니다. 책이 담긴 궤짝 다섯 개는 침대로 사용하기 위해 호평동 본당으로 부임할 때 가지고 온 것이었고, 고지서는 신부님이 그 동안 남몰래 도와왔던 장애인 단체등 많은 단체에서 보내온 후원회비 지로 통지서였습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봉사하신 호평동 성당은 평내 성당에서 독립한 신설 본당입니다. 호평동 성당이 분가하기 전 평내 본당의 주임사제였던 나 신부님은 대주교님을 직접 찾아가 호평동 성당 주임사제를 자청했습니다. 나 신부님의 장례 미사에서 들려주신 정진석 대주교님의 회상에 따르면, 이 때 대주교님은 신부님에게 그곳이 재정도 없고 가난한 지역에 어려운 곳이니 너무 힘들 것이라고 말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 신부님은 “주교님, 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저를 꼭 보내주십시오.”하고 간청했고 그 간청에 따라 호평동 본당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40여 년 가까이 한국에서 봉사하면서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정신 중 하나인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 사람들 가운데 교회를 세운다(회헌 101조)”는 회헌의 한 구절을 실현한 곳이라, 호평동 성당은 각별한 애정을 지녔던 곳인지도 모릅니다. 30여 년 가까이 지낸 강원도 춘천교구의 강릉, 동해, 속초, 춘천, 거진 등 여러 본당들도 그랬겠고, 서울 대교구의 도봉 성당, 평내 성당도 그랬겠지만 호평동 성당에 대한 나 신부님의 애정은 특별했습니다.

 

  조촐하기 짝이 없는 이삿짐을 가지고 도착한 호평동 본당의 사제관은 헌 기와집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이 사제관 안에 손수 만든 탁자 위에, 주워 온 가스 렌지를 올려놓고 식복사도 없이 손수 식사 준비를 하셨습니다. 식복사를 두지 않은 것은 평내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것은 신설본당의 취약한 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신부님 자신이 식복사를 두는 돈으로 북한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성당의 내부 장식도 신부님이 손수 만든 것이었고, 성모동산과 정원도 오토바이로 돌을 주워 나르며 손수 쌓아 만든 것이었습니다.

 

  나요한 신부님은 이처럼 아주 청빈한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일찍이 강원도에서 생활할 때부터 방에 불을 잘 때지 않았고, 여름에도 선풍기조차 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신부님은 청빈을 위한 청빈을 사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결속이라는 입장에서 증거와 봉사, 대화를 통하여 구원의 보편적 메시지를 선포(골롬반 외방선교회 회헌 103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청빈을 사신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깊은 애정 때문이었으리라는 추측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분이 하늘 나라로 떠난 뒤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분에게서 매달 20만원씩 일주일에 5만원씩 생활비를 받는 본당 노인들이 여럿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놀라운 일들에 비하면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1997년의 경제 위기 때에는 거리로 쫓겨나게된 어느 신자 가족에게 가능할 때 갚으라며 이천만원이나 되는 큰돈(부모님 유산)을 주신적이 있었고, 본당 신자들 중에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신자가 있으면, 다른 신자에게 돈을 주며 자신이 준 돈이라고 하지 말고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한 사실도 나중에야 알려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요한 신부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통해 영혼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요한 신부님이 새로운 본당으로 부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면담실을 만들어 전 신자들과 상담을 하는 것이었고, 가정 방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의 문제점을 파악하시고 기도하면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나 신부님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사랑은 개별적인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신부님이 미사중에 성체를 나누어주며 특히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부님이 “그리스도의 몸” 하고 아멘하면 다시 신부님이 “마리아”하고 다정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던 신부님의 목소리를 특별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신부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특별합니다. 신부님은 언제나 카메라를 갖고 다녔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은 다음 그 사진을 오려 이름을 붙이는 방법이었습니다. 도봉동 성당에 부임한 뒤 이런 방법으로 오천 명이나 되는 신자들의 이름을 일일히 기억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부님이 돌아가신 뒤 그분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한국에 부임한 뒤로 만난 모든 사람들의 사진이 정리되어 있는 책자를 발견한 신자들은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십 대에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마비가 된 도봉성당의 박판서 바오로와의 우정은 신부님과 신자 개개인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박 바오로 형제는 말하는 것 외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환자입니다. 박 바오로는 나요한 신부님을 좋아하고 따랐는데 견진 성사를 받을 때 본당 신부님인 나 신부님에게 견진 대부를 서달라고 요청합니다. 규칙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신부님은 박 바오로가 그것으로 기쁨을 느낀다면 기꺼이 대부를 하겠다고 승낙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로 인해 상대방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바오로가 잠시라도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난 모든 것을 합니다.”

 

  95년 9월 박바오로가 견진을 받을 때부터 지난 1월 26일 돌아가시는 날까지 8년이 넘도록 나요한 신부님은 매일 박 바오로와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면 직접 찾아가 함께 놀아주고 그의 마음에 삶의 희망과 사랑을 심어주었습니다. 나 신부님이 박 바오로와 마지막 통화를 한 것은 신부님이 하느님의 품에 안긴 그날 아침이었습니다.

  “바오로, 오늘 바오로에게 가는날인데 시노드 개막미사가 있어서 방문을 할 수 없어. 대신 내일 갈게.”

  

  최희준의 “노신사”라는 노래가 애창곡이었고, 신자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즐겼던 존 나이한 신부님의 별명은 ‘슈퍼맨’이었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오토바이를 타고 만면에 웃음을 띄며 달려오던 분이기에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언제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그분은 강원도 속초에 있는 파티마 양로원(13년전 나요한 신부님이 직접 설립한 양로원)으로 가다가 도로의 가드 레일을 받고 이십 미터 아래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온 몸과 다리 뼈, 갈빗대 일곱 개가 부러지는 대형 사고였습니다.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입원해 있으라는 신자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은 열흘만에 퇴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휠체어를 타고 미사를 집전했는데 이때 신부님은 살아서 다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셨고, 신자들은 또한 그런 신부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나가 되어 미사를 드린적이 있습니다. 휠체어에 탄 채, 윗몸을 제대에 기대고, 창백한 얼굴로 미사를 드리며 목욕하듯 땀을 흘리면서도 고통의 그림자 한 줄기 없던 신부님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신자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일년 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미사를 드리는 모습과 미사 전이면 늘 장궤하고 기도하는 신부님의 모습, 신자들이 있거나 없거나 정해진 한 시간을 고백소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신부님의 모습도 신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요한 신부님을 구식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나신부님의 방식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법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신부님 주변의 신부님들은 늘 의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도봉동, 평내, 호평동 신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열렬할 수가 있을까? 기가 막히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아마 나요한 신부님의 이러한 열정이었을 것입니다.

 

 

나요한 신부님에 대한 추모(전기)의 글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관련된 자료를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요한 신부님 추모 사업회    대표  정 선 숙(마리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 144번지

E-mail : sunsugj@hanmail.net

HP :018-205-4175

2003.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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