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디학교가 꿈꾸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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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박도영 [nam80387] 200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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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학교가 꿈꾸는 것은?
양 희 창
간디학교 교장
중학교 문을 닫으랜다. 말 안 들으면 인가받은 고등학교도 지원을 끓어 숨통을 조르겠다고 윽박지른다. 대단한 관리 나으리들이다. 하기야 일제식 교육에 절어 있다가 갑자기 교육 붕괴다, 조기 유학에 이민까지 들썩대니 이모든 혼란을 누구 탓으로 돌리나 눈알을 굴리다가 간띠(간덩이) 부은 놈들을 발견한 것이다. 간디학교 너 이놈들, 잘 걸렸다. 목소리를 지긋이 깔고 하시는 말씀, "대한학교를 살리면 공교육이 망합니다. 천하의 명언이다. 이제까지 공교육이 잘 안 된 것은 머리는 아무렇게나 기르고 『바위처럼』같은 운동권 노래를 교가로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간디학교 때문이란다. 정말 크게 반성할 일이다.
이 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간디학교를 세웠는가 하는 근본심과 초심을 돌이키게 된다. 고난이 오면 먼저 자신이 맑은 지를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떳떳하면 무서울게 없는 법이다. 간디학교는 어떤 꿈을 갖고 있을까?
대안을 만들어 가는 학교?
"도대체 뭐가 대안이지요? 왜 간디학교를 대안학교라고 부릅니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이왕 오신 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시지요" 호기심에 가득 찬 분들이 잔뜩 기대감을 갖고 오셔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을 때 뿌루퉁하게 묻는 말이다. 무엇에 대한 대안일까? 학교 교육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찬미하는 『조선일보』는 이러한 교육현실에 부응할 역시 멋진 말을 만들어냈다. ’교육 액소더스!’ 한겨레는 좀 더 분발 해야 한다.
학교가 아이들을 잡고 있다. 어제도 어떤 학부모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자기 아이가 도저히 학교를 못 다니겠다고 하는데 우리 학교로 전학을 할 수 없겠냐는 거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어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오늘부터 당장 열시 반까지 보충수업을 한다고 하니 도저히 삼 년을 못 견디겠다며 학교를 그만 둔다는 거다.
대학을 가기 위한 도구로 전략해버린 학교에서 어이들이 배우는 것은 생존 경쟁일뿐이다. 허울좋은 정보화니 세계화니 떠들지만 아이들은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만약 졸업장을 중 테니 학교는 안 나와도 된다고 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 대신 다른 공간을 선택할 것이다.
간디학교가 생긴 까닭은 간단하다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싶어서여다. 거닐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학교를 하나 만들어 보자고 꿈을 꾼 거다.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학교는 즐거워야 하며 스스로 원해서 행동하도록 기다려줘야 한다는 거다. 즐거운 학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건물도 어설프고 시설도 변변찮은 학교에서, 때때로 더 힘들고 마음고생을 지독히 하면서도 다시 일반학교로 돌아가겠다는 말만은 입밖에도 내지 않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나느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간디학교가 대안학교일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아이들을 보는 눈이다.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기능적인 면이 떨엊도 그 아이는 존중되고 사랑받아야 한다는 점이 생활 속에서 고백되고자 한다. 고증학교 신입생들의 첫 인사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저는요, 선생이라면 지긋지긋하고 꼴도 보기 싫었는데요. 여기서는 안 그래서 좋아요." 최소한 이 학교에서만은 교사와 학생은 친하다. 매우 친하다. 너무 친하다 그래서 버릇이 없다고도 한다. 그래도 친한 게 좋다.
교장실 문을 두드리고는 뒤가 급하다면서 화장지를 달란다. 두루말이 화장지를 주지 않고 왜 티슈를 주느냐고 실실 웃으며 화장실로 달려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에서 나는 간디학교의 존재이유를 발견한다. 가정 같은 학교에서 아이들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일등해서 좋은 대학가고, 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아라는 경쟁과 소비 중심의 가치관에 발끈하여 간디학교는 불복종의 정신으로 학교를 꾸려왔다. 공부라는 잣대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대부분의 아이들을 패배자로 만드는 꼬락서니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돈도 없는 놈들이 학교를 만들겠다고 듯만 갖고 나선 거다. 그리고 용케도 4년을 버티어온 거다.
일각에서는 간디학교를 두고 신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나타나는 배부른 자들의 그렇고 그런 학교가 아니냐고 비꼬는 사람도 있다. 특히 다양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야기하는 자체가 국가에서 말하는,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다양한 교육의 실현과 다를 게 뭐냐고 물을 때는 억장이 무너진다. 뿌리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다양한 교육이란,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국가가 모두 관리하는 획일적 교육형태를 부정하는 것이며 다양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근원에는 적자 생존의 경쟁원리만 존재라는 잘못된 교육에 저항하는 가치 지향적 교육을 해보자는 것이다. ’사랑과 자발성’ 간디학교의 교육철학은 입에 발린 소리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간디학교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학교이기를 거부한다. 1%를 위한 대안이라면 99%에게도 희망이어야 한다. 지금도 학교로 인해 불행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과 함께 아파하며 "학교란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라고 모델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사교육에 진지를 다 뺏기고 장래 치를 일만 남은 공교육이라지만 그 아래 신음하는 아이들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째 사는고?
간디의 아이들은 공동 생활을 한다. 같이 살아간다는 것 이상의 큰 공부가 없는 것 같다.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고통이 시작되고 서로를 밀치게 되지만 결국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고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밑거름이다. 도저히 일반 학교에서는 어울릴 수 없는 아이들이, 톰과 제리 같은 아이들이 투덕거리며 하나가 되어 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요즈음 아이들은 모두가 이기적이고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하다고 하지만 그건 공동체 훈련은커녕 청소년기에 자녀야 할 최소한의 과정도 생략한 채 공부만을 강요하는 거짓발싸게 같은 사회 현실 때문인지 아이들 탓이 아니다. 정말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도 가르치치 않고 쓰잘데없는 것만 꾸역꾸역 넣어주니 아이들이 망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게다.
오전에는 지식 수업을 한다. 영어도 배우고 수학 문제도 풀어 본다. 시를 짓기도 하고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한다.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교사의 스팩트럼과 학생의 자발성이 결합되면 무서운 상승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번에 첫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그렇게 땡땡이를 치고도 거의 다 대학진학을 하게 된 것은 3년 내내 이빨을 튼튼하게 해준 토론 중심의 교육 덕분이었던 것 같다.
자기 생각을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오후에 이루어지는 감성교육과 의식주 수업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남학생이 바느질을 기가 막히게 잘하고 무를 귀신같이 써는 작업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톱질 잘하고 만들기 좋아하는 여학생의 팔뚝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일등이 되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다고 생각되면 살아가는 과정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단돈 십만 원으로 3주 동안 중국여행을 하고 온 친구가 있는가 하면 인권단체를 찾아다니며 이웃에 대한 관심을 늘려 가는 아이도 있다. 자립적이고 절제와 나눔을 터득한 아이라며 어디 가서 무엇을 한들 그 삶이 떳떳하고 진지하지 않겠는가?
간디학교는 문제가 없는 학교인가? 자랑만 늘어놓은 것 보니 오히려 수상하다고 추궁을 당하기 전에 먼저 다 불어버리는 것이 낮겠다. 그렇다. 간디학교는 문제 투성이다. 준비되지 않은 교사, 준비되지 않은 부모, 준비할 마음이 없는 학생이 모여 일반학교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을 문제까지 일으켜가며 답답해하기도 하고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전혀 생태적인 삶을 살아보지 못한 교사가 갑자기 농사를 지으려니 이건 즐겁기는커녕 고역이다. 자신의 전공 외에도 한 가지 이상씩 감성 교과나 의식주교과를 개발해야 하고 교사 공동체가 모든 일을 결정해야 하니 권한에 따른 책임도 엄청나다. 부모들은 전인교육도 시켜달라, 대학도 보내달라, 이것저것 다 요구하지만 도깨비 방망이라도 있으면 몰를까 하나라도 재대로 하기가 어렵다.
"간디학교는 자유가 많은 학교라고 들었는데 순 뻥이네요.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무슨 학교가 이래요?" "기숙사에서 떠드는 게 뭐가 나빠요? 공부하기 싫어서 놀겠다는데 웬 간섭이 이렇게 많아요?"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레 나타낼 수 있게 될 때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행사하려는 얌체들은 어김없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 문제 투성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서는 치유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서서히 썩어가는 것보다는 드러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인 것이다.
식구총회를 통해 안건들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과정 또한 인내와 지혜를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실험장이다. 교사나 학생이 똑같이 한 표이기에 아무리 교사의 의견이 옳게 보여도 뒤집어질 수 있다. 차근차근 설득하고 이해의 폭을 넓이지 않은 한 공동체 모두가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몸살을 앓는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한 자루의 촛불이 되자고 결의하며 학교를 시작했던 그 마음으로 간디학교는 변화하고 있다. 자식이 간디학교에 오고 나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시는 부모님들이 계신다. 많은 도전을 받으신다고 한다. 남의 이목을 생각하면서 과시하며 사는 것이 다인 줄 알았는데 살아온 인생이 무척 후회스럽다고 눈물 흘리시는 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간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단순한 학교가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전달하며 사회변화를 꿈꾸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고난를 디딤돌 삼아 꿈꾸는 학교가 되기를
학부모들이 함께 모여 경남 교육청 앞에서 시위를 하였다. 중학교 과정을 해산하라는 교육청으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항의 시위였다. 교육감은 법대로 하겠다고 학부모들을 범법자로 몰았고 논리가 약한 학부모들은 자식교육 올바르게 해보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쫓아 내냐고 언성을 높였다. 권력자가 상대적인 약자들에게 법대로 하겠다는 말을 하 때는 어지간히 못된 인간이 아니면 말하기 어려운 폭력이 된다. 반대로 약자들이 법대로 해달라고 할 때는 공의를 베풀어달라는 호소가 된다.
의무교육이 확대되면서 중학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의무교육의 취지로 볼 때 의무교육이란 국민이 누릴 수 있는 교육의 ’권리’로 받아들이는 반면 교육관료들은 몇 푼의 돈을 주는 대신 교육 내용이나 학교 운영의 방법마저 더 통제할 수 있는 족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유로운 교육이나 대안적인 프로그램 자체가 못마땅하던 차에 다양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없음을 단단히 알려주자는 뜻에서 극양처방을 내린 것 같다. 아무리 아이들이 학교를 뛰쳐나오고 이민의 행렬이 사회를 뒤흔들어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오신 분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중학교는 문 닫고 인가받은 고등학교라도 잘 하면 좋겠지만은 우리도 ’한 성질’ 하는 더러운 놈들이라 더 세게 붙기로 작정하였던 거다.
고난이 있으면 배우는 게 많다. 겸손히 자기를 돌아보고, 미움의 대상을 정하기보다는 우리 모두를 악하고 약하게 만드는 구조적 모순을 깨닫게 되어 분노를 삭이게 된다. 그리고 함께 고민해주는 넉넉한 이웃들을 발견하게 되어 부딧히는 한 잔의 술이 그리 촉촉함을 알게 된다.
외로운 섬이 되기보다는 역사의 제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간디학교가 되고 싶다.
역사의 수레를 타고 가는 편안함보다는 당당히 수레를 끌고 가는 땀흘림을 택하고 싶다.
칭찬 속에 허덕이기보다는 욕먹으며 자라나는 나무이고 싶다.
절망의 시대에서도 결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간디인이 되고 싶다.
출처 : 월간 인물과 사상 2001년 4월호
2001년 봄. n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