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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관련
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부활신앙(1)

540 심재엽 [simjy] 2005-04-01

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부활신앙(1)

부활은 오늘 삶을 위한 염원

지치거나 넘어지더라도

굳게 믿으며 힘을 얻어야

 

부활신앙을 빼놓고서 「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를 말할 수는 없다.

부활은 그리스도교인의 실존원리이다.

궁극적인 희망이기 이전에 이미 「지금 여기」를 위한 당위(當爲)이며 현실(現實)이다.

이제 그 현실적인 의미를 짚어보기로 하자.

 

죽은 자는 말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건 이 말은 저잣거리에서 통하는 말이다.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 반대가 오히려 진실이다. 신앙인들은 힘 있게 주장한다.

『죽은 자는 말한다』

-로마외곽 아피아 안티카 가도(Via Appia Antica)에는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지하묘지)가 있다. 그곳의 층계 벽에는 묘석(墓石)으로 쓰

였던 여러 비문들이 부착되어 있다.

그 중에는 사람이 사망한 날을 가리켜 「죽은 이가 빛 속에 들어간 날」(CUIUS DIES INLUXIT)이라고 일컫는 다음과 같은 비문들이 발견된다.

『아그리피나가 (하느님께 영혼을) 바치고 … 빛 속으로 들어갔으며 … 달 15일에 (여기) 안장되었다』

『사랑스럽고 무죄한 세베리아노, 그리스도의 표지 아래, 평화의 영면 속에 잠들다. 50세 가량을 살았다. 그의 영혼은 주님의 빛 안에 받아들여졌다』

박해를 피해 지하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살았던 저들은 자신의 죽음을 영원한 「빛」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활신앙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 직전 교우들에게 남긴 편지는 신앙인의 의연한 모습을 웅변적으로 그려준다.

『모든 세상 일을 생각하여 보면 실로 허무한 것뿐이고 슬픈 것뿐이외다. 만약 우리들이 이러한 거칠고 허무한 세상에 있어서 자기의 조물주이시며 다시없는 천주를 깨달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난 보람이 있으리오. 오직 우리들은 천주의 은혜로써 이 세상에 나고 다시 큰 은혜로써 성세를 받고 성교회의 한 사람이 되어 귀여운 이름을 받들고 있는 것이오나 그러나 그에 어울릴 만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이름만이 무슨 쓸 데가 있으리오. (중략) 재앙에 겁내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천주를 섬기는 데서 물러나지 말고, 오로지 성인들의 자취를 밟아서 성교회의 영광을 늘이고, 주의 충실한 병사이며 참된 시민임을 증명하여 주시오…』

 

약관 26세의 나이에 김대건 신부가 가졌던 저 순교신앙의 바탕은 부활신앙이었다.

사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그가 지니고 있던 서구 학문에 대한 당대 최고의 학식과 외국어 능력을 아깝게 여기고서 『신앙만 버리면 살려 줄 뿐 아니라 조정의 높은 관직을 주겠노라』며

그를 회유하고 있던 터였다.

누군들 이 세상의 목숨에 대해 집착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 교황 요한 23세는 임종시에 지극히 평범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제 나의 여행 채비는 다 되었다』

이 말에서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묘한

「설렘」이 묻어나온다.

이렇듯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때를 동경한다. 이는 요즈음 문제거리인 자살충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부활찬가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한 희망이 아니다. 부활은 오늘 우리의 삶을 위한 염원이다.

그러기에 시인 강계순은 「해바라기」의 심정

을 빌려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붙박힌 자리 지키고 서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먹장구름으로 가려져 있지만

왜 태양 아니리오

타는 인두로

지지고 지져 마침내

가슴 속 검은 무덤 하나 키우면서

무망(無望)한 세상에

흔들리는 키

꺽이어 쓰러져 눕는 날에도

왜 목마름 아니리오』

(강계순, 「2000년 한국가톨릭시선」)

 

이 얼마나 타는 「목마름」인가! 「먹장구름」의 현실 속에서도, 「가슴 속 검은 무덤」의 한(恨)을 키우면서도, 마침내 「꺽이어 쓰러져 눕는 날에도」 체념하지 않고 「태양」을 꿈꾸는 저 끈질긴 소망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부활신앙인 것이다.

죽음 너머의 부활이 아닌 삶 한 복판에서의 부활에 대한 간절한 믿음인 것이다.

 

구상 시인은 여기서 한 술 더 뜬다.

그에게 부활은 「오늘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아야 할 터무늬이다.

그는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자신의 부활신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상략)

//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이 우주만물과 더불어/ 비롯함도 마침도 없는 님의/ 그 신령한 힘으로 태어났다.

// 이제 이 지구란 별에 와서/ 육신이란 옷을 걸치게 되었지만/ 마침내 우리는 또다시 그 님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 님의 품, 우리의 그 본향(本鄕)이/ 광대무변한 이 우주 안에 있는지/ 아니 그것도 넘고 넘어서 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 하지만 우리는 돌아갈 고향이/ 저렇듯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고/ 또한 거기에는 축복된 새 삶이/ 펼쳐질 것을 추호도 의심치 말고/

아무리 오리무중과 같은 시대 속에서도/ 아무리 미혹과 방황의 표류 속에서도/ 아무리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 아무리 실패와 좌절

의 수렁 속에서도/ 아무리 파탄과 절망의 구렁 속에서도/ 아무리 풍랑과 격동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굳게 굳게 믿으며 거기서 힘을 얻자.

// 그리고 그 님이 우리의 육신 속에/ 사람의 징표로 은혜롭게 심어주신/ 양심의 소리에 언제나 귀 기울이며/ 오늘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자』 (구상,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에서)

 

그렇다. 부활은 오늘 우리를 위한 가장 힘 있는 위로이다. 온갖 「오리무중」, 「미혹과 방황」, 「칠흑」, 「실패와 좌절」, 「파탄과 절망」,

「풍랑과 격동」 등으로 혹은 지치고, 혹은 넘어지고, 혹은 주저앉은 오늘의 우리를 위한 격려이다. 「굳게 굳게 믿으며 거기서 힘을」 얻어야 할,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이다.

「오늘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아야 할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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