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목요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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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이미경 [lmkdream] 200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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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목요일은 전례적으로 서로 다른 두 시기에 속해 있습니다.
저녁기도로써 사순절이 끝이 납니다.
이어 저녁에 이루어지는 주의 만찬 미사로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날 오전에 이루어지는 성유축성미사는 사순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만찬 저녁미사
부활 성야 전 목요일은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져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오래된 명칭이며 공식적인 명칭은 아마 「Feria Quinta in Coena Domini (주의 만찬 목요일)」인데,
그 이유는 이날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념하는 예절이 행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마태 26, 26-30)
이미 4세기 경에 주의 만찬(in Coena Domini)으로 알려졌던, 성체성사가 제정된 바로 그 시간인 목요일 저녁에 성체성사를 재현하는 이 전통은
예루살렘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목요일을 지내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결코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날은 비오 12세의 성주간 전례서에서 볼 수 있듯, 한 본당이나 혹은 한 단위 수도 공동체에서 한 대의 미사만 허용됩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날 미사 중에는 강론 후에 세족례를 행할 수 있습니다.
세족례는 ’어떤 자격 조건’에 따라 선발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 가운데 아무나 12명을 선발하여 발을 씻어 주는 예식을 일컫습니다.
발은 신체 가운데 가장 낮고 더러운 곳 가운데 하나이므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종이나 하는 것이고 상대방에 대해 최상의 봉사를 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기 전에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이셨고
제자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기까지 하는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신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기 위해서 입니다.(요한 13, 1-20)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본받아
신자들의 발을 씻으며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라는 그리스도의 뜻을 신자들에게 실천함으로써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미사를 끝으로 예수님의 성체를 모셔두는 감실을 비우고 성체를 미리 마련된 감실(수난 감실)로 모시며
제대는 정리하고 성전안의 모든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 치우거나 치울 수 없다면 ’자색의 보’로 가립니다.
왜냐하면 이날의 미사가 부활 성야 전에 드리는 마지막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날의 미사를 통해 성체성사와 신품성사의 제정 및 형제적 사랑의 새 계명을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도록 합니다.
즉, 우리 생활의 중심인 성체 성사를 세우신 그 날의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영함은 물론, 성체 조배를 통해 주님 사랑에 합치하고 이웃 사랑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 조배 때에는 다음에 올 신자들이 오기 전에는 성체 앞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요즈음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청춘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종류의 사랑 이야기도 적지 않다.
부모와 자식 간의 깊은 사랑 이야기며, 스승과 제자 간의 사랑 이야기도 있다.
어린 시절 추억의 순수한 우정도 있고 노년의 진정한 이해와 포용을 다룬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도 젊은 남녀들의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나 잘못된 생각의 사랑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그런 이야기 전개를 거쳐서 사랑의 본질, 본래의 의미를 찾아가려는 의도인 것 같다.
이런 종류의 미성숙한 사랑 이야기에서는 흔히 사랑의 본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부작용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이해가 자기 중심적일 때, 상대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완력으로 밀어붙일 때 그런 갈등이 생겨나고 참사랑의 관계가 잘 설정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 참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이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우월한 위치에서 상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사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항상 생각하고 위해준다.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사순절이 막바지에 이르면 부활을 맞이하는 데 가장 가까운 시기가 ’성삼일’이다.
부활절은 교회 생활 절기의 절정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크고 깊으신 사랑을 드러내주는 결정판이다.
성삼일은 여기에 가장 근접한 준비기간이다.
성삼일은 성목요일, 성금요일(주님 수난 금요일), 성토요일(부활 성야)이다.
이미 사순시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인 은총과 축복을 체험하지만, 이 성삼일 동안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부활 성야를 앞둔 성금요일에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묵상한다면,
성목요일에는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낮추시고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겸손한 사랑을 묵상한다.
그렇다면, 성목요일의 경우 이날을 기념하는 역사는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일까?
본래 성삼일 전례는 예루살렘의 전례에서 유래하였다.
예루살렘 순례지에서 부활을 앞두고 거행하였던 전례였다. 그래서 성사적 전례가 아니라, 교리교육적이며 신비교육적인 전례이다.
성목요일이 되면 예루살렘의 ’순교 성당’(Martyrium)에서 두 번의 미사를 거행하였다.
첫째 미사는 사순시기의 단식을 마감하는 미사였다. 사실 단식을 실천하였던 수난시기에는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찬례가 이미 ’먹고 마시는 잔치’이므로 단식 중에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미사는 특히 사순시기 동안 이름을 등록하고 실천하였던 ’참회자’들과 공동체의 화해 예식으로 마련된 것이기도 하였다.
지금 이야기할 것은 두번째 미사이다.
이 미사는 특히 골고타의 십자가가 서있던 자리에서 거행하였으며, 주님의 성찬제정을 기념하는 ’만찬 미사’를 지냈다.
이렇게 시작한 성찬제정 기념 미사는 단식 마감 미사와 이미 구별하여 거행하였다.
로마에서 4세기까지는 성목요일을 참회자를 위한 화해의 날로 지냈지만, 7세기경에는 아침의 단식 마감 미사와 저녁의 만찬 기념 미사를 거행하였다.
이때에는 말씀 전례 없이 봉헌 예절부터 시작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말씀 전례와 함께 온전한 미사 형태를 띠게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7세기 때부터 만찬 미사에서 거행했던 ’발을 씻어주는 예식(세족례)’이다.
이 예식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기념하는 예식이다.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 거행하신 당신의 성찬례를 기념하고 그대로 재현하듯이 똑같이 거행한다.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높으신 어른이 먼길을 왔을 때, 귀하신 손님을 맞았을 때 집주인은 그를 맞아 발을 씻어주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귀중한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을 위해 ’봉사할 자세’를 갖추었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의 이 행위는 상황이 다르다.
제자들이 스승의 발을 씻어드린 것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무한히 낮추신 겸손한 사랑이며,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며,
봉사받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상대편을 이해하고 봉사하는 사랑임을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하신 행위에 대해 덧붙여 말씀하신다.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15).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일, 이것은 사랑의 참모습이다.
이 예식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음식으로 내어주신 사랑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성금요일에 기념하게 될 ’십자가의 희생제사’, 곧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내어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 만찬 미사와 세족례를 통해 자신을 무한히 낮추시고 당신을 모두 내어주신 주님의 깊은 사랑을 묵상해 보자.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천할 때도 진정 그들의 발을 씻어줄 수 있는 겸손한 마음과 봉사의 자세로 사랑을 베풀도록 해보자.
부활은 생명의 승리로 기뻐하는 날이지만,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은 ’봉사하는 겸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기정 다니엘/신부·대구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경향잡지 1999년 4월호에서)
요즈음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청춘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종류의 사랑 이야기도 적지 않다.
부모와 자식 간의 깊은 사랑 이야기며, 스승과 제자 간의 사랑 이야기도 있다.
어린 시절 추억의 순수한 우정도 있고 노년의 진정한 이해와 포용을 다룬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도 젊은 남녀들의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나 잘못된 생각의 사랑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그런 이야기 전개를 거쳐서 사랑의 본질, 본래의 의미를 찾아가려는 의도인 것 같다.
이런 종류의 미성숙한 사랑 이야기에서는 흔히 사랑의 본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부작용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이해가 자기 중심적일 때, 상대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완력으로 밀어붙일 때 그런 갈등이 생겨나고 참사랑의 관계가 잘 설정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 참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이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우월한 위치에서 상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사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항상 생각하고 위해준다.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사순절이 막바지에 이르면 부활을 맞이하는 데 가장 가까운 시기가 ’성삼일’이다.
부활절은 교회 생활 절기의 절정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크고 깊으신 사랑을 드러내주는 결정판이다.
성삼일은 여기에 가장 근접한 준비기간이다.
성삼일은 성목요일, 성금요일(주님 수난 금요일), 성토요일(부활 성야)이다.
이미 사순시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인 은총과 축복을 체험하지만, 이 성삼일 동안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부활 성야를 앞둔 성금요일에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묵상한다면,
성목요일에는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낮추시고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겸손한 사랑을 묵상한다.
그렇다면, 성목요일의 경우 이날을 기념하는 역사는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일까?
본래 성삼일 전례는 예루살렘의 전례에서 유래하였다.
예루살렘 순례지에서 부활을 앞두고 거행하였던 전례였다. 그래서 성사적 전례가 아니라, 교리교육적이며 신비교육적인 전례이다.
성목요일이 되면 예루살렘의 ’순교 성당’(Martyrium)에서 두 번의 미사를 거행하였다.
첫째 미사는 사순시기의 단식을 마감하는 미사였다. 사실 단식을 실천하였던 수난시기에는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찬례가 이미 ’먹고 마시는 잔치’이므로 단식 중에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미사는 특히 사순시기 동안 이름을 등록하고 실천하였던 ’참회자’들과 공동체의 화해 예식으로 마련된 것이기도 하였다.
지금 이야기할 것은 두번째 미사이다.
이 미사는 특히 골고타의 십자가가 서있던 자리에서 거행하였으며, 주님의 성찬제정을 기념하는 ’만찬 미사’를 지냈다.
이렇게 시작한 성찬제정 기념 미사는 단식 마감 미사와 이미 구별하여 거행하였다.
로마에서 4세기까지는 성목요일을 참회자를 위한 화해의 날로 지냈지만, 7세기경에는 아침의 단식 마감 미사와 저녁의 만찬 기념 미사를 거행하였다.
이때에는 말씀 전례 없이 봉헌 예절부터 시작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말씀 전례와 함께 온전한 미사 형태를 띠게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7세기 때부터 만찬 미사에서 거행했던 ’발을 씻어주는 예식(세족례)’이다.
이 예식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기념하는 예식이다.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 거행하신 당신의 성찬례를 기념하고 그대로 재현하듯이 똑같이 거행한다.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높으신 어른이 먼길을 왔을 때, 귀하신 손님을 맞았을 때 집주인은 그를 맞아 발을 씻어주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귀중한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을 위해 ’봉사할 자세’를 갖추었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의 이 행위는 상황이 다르다.
제자들이 스승의 발을 씻어드린 것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무한히 낮추신 겸손한 사랑이며,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며,
봉사받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상대편을 이해하고 봉사하는 사랑임을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하신 행위에 대해 덧붙여 말씀하신다.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15).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일, 이것은 사랑의 참모습이다.
이 예식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음식으로 내어주신 사랑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성금요일에 기념하게 될 ’십자가의 희생제사’, 곧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내어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 만찬 미사와 세족례를 통해 자신을 무한히 낮추시고 당신을 모두 내어주신 주님의 깊은 사랑을 묵상해 보자.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천할 때도 진정 그들의 발을 씻어줄 수 있는 겸손한 마음과 봉사의 자세로 사랑을 베풀도록 해보자.
부활은 생명의 승리로 기뻐하는 날이지만,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은 ’봉사하는 겸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기정 다니엘/신부·대구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경향잡지 1999년 4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