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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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이미경 [lmkdream] 200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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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부터 이날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십자가 고통의 재현하고 봉헌한 ’비애의 날’이었습니다.
1955년 이후, 성금요일에 부여된 가장 적합한 공식명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금요일」입니다.
이전까지는 ’파스카를 위한 준비의 금요일’로 불리웠습니다
성금요일 전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은 4세기 말 예루살렘에서 발견됩니다
에제리아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성금요일은 순례지를 돌며 기도하는 날로서
신자들은 성목요일 저녁에는 올리브 동산에서 게세마니로,
금요일에는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에서 골고타 언덕으로 옮겨가며 기도했고
이때 주교는 교우들이 경배할 수 있도록 십자가 나무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순례 지점에서 사람들은 수난에 대한 예언서들과 복음을 읽고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성금요일은 로마 전례에서 미사가 봉헌되지 않는 유일한 날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완성하신 인류 구원의 기쁨이 지극한 충만에 달하는 부활성야를 위해 유보된 것입니다.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로 시작하여 영성체로 끝이 나며, 그 중간에 장엄한 십자가의 경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처럼 이날은 요한이 전한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습니다.
그리고 이날의 ’신자들의 기도’는 다른 날과는 달리 사제가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신자들의 기도가 끝이 나면, 부제는 자색보로 가려진 십자가를 사제에게 건네고
사제는 십자가를 받아서 보자기를 벗기면서 ’보라 십자 나무(Ecce lignum)’를 노래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모두 와서 경배하세(Venite, adoremus)’로 화답을 하게 됩니다.
이 예절이 세 번 반복된 후, 신자들의 십자가 경배가 이루어집니다.
이 예절이 갖는 의미는 우리 구원의 성스런 표징인 십자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며 나아가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이라는 신비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라는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이룩하신 구원의 승리를 묵상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지나간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라는 표징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히 구원과 부활의 희망의 빛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려 계시던 십자가 위에는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INRI)’라는 명폐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사람이 의도한 잔인한 역설이 이제는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역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 날은 슬픔만이 지배하는 날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십자가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는 기쁨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성 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죽음을 깨닫는 것은 삶을 아는 것
사람은 ’태어났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신이 태어날 때 스스로 동의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렇게 사람의 생명은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듯이 또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생의 한 가지 절차이다. 필연적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지 못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분명하지만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 또한 아니다.
죽음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거두시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누구나 분명하게 겪어야 하는 절차이다. 또한 삶과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자신의 의지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자기 죽음의 때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며, 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삶을 이해하려면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삶과 죽음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살아있으면서 삶의 의미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어본 적도 없으면서 죽음을 깨달을 수 있는가?
교회는 일년 연중을 지내면서 죽음을 자주 묵상한다. 특히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성월(11월)과 위령의 날(11월 2일)이 그렇다.
성인들의 축일도 모두 그들이 죽은 날이다. 곧 하느님 나라에 새로 태어난 날로 이해한다. 특히 인간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날이 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성삼일을 지내는데, 그 첫째날인 성금요일이다.
교회는 이 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죽음을 당하셨고, 그 죽음으로 부활의 새 생명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렇게 죽음의 의미는 생명을 지향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셨기에 인간이 당하는 온갖 고통과 죽음까지도 그대로 다 맞이하신 것이다.
그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참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① 죄의 결과는 고통이며 고통은 죽음을 가져온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 인류의 모든 범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당하셨다.
② 죽음으로 생명을 가져다주신다.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직접 행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묵상이다.
죽음,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초세기 교회 때부터 성금요일 전례를 매우 깊이 있게 기념하고 거행하였다.
4세기말 예루살렘에서 성금요일은 순례지를 돌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날이었다.
먼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거행하셨던 다락방에서 기도한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채찍질을 당할 때 묶였던 돌기둥이 있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한다.
또 골고타로 자리를 옮겨서 기도하는데, 신자들이 경배할 수 있도록 십자가 나무를 보여주고,
각 순례지점마다 신자들은 수난에 관한 예언서와 복음을 읽고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하였다.
7세기에 와서는 제대 위에 십자가를 현시하고 말씀 전례를 거행한 다음, 십자가 경배와 친구를 하였다.
이어 주님의 기도를 합송하고 십자가를 경배하며 성체를 영하였다. 이렇게 오늘날 성금요일 전례의 틀이 잡히게 된다.
성금요일의 전례는 시작예식 없이, 간단한 경배와 기도를 하고, 말씀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말씀 전례’는 ’우리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신 구세주’(제1독서, 이사 52-53장)와
’예수께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심으로써 당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제2독서, 히브 4-5장)는 내용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대신하는 구세주이심을 밝혀준다.
복음은 요한의 수난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드라마틱하게 입체 낭독함으로써 현장감 있게 생생하게 주님의 죽음을 묵상한다.
아울러 보편 지향 기도(신자들의 기도)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무엇이며,
우리가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죽음의 의미를 우리 생활 안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십자가 경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는 절정에 속한다.
이 경배 때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 그리고 수난과 죽음의 절정으로 보여주신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금요일은 그야말로 대단식의 날이다. 금식과 금육으로 몸을 비우고 따라서 마음을 비운다.
주님 부활의 새 생명을 향하는 관문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 날 우리의 죽음도 함께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되살려보자.
(나기정 다니엘/신부·대구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경향잡지 2002년 3월호에서)
주님 수난 성금요일(금식과 금육)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 이 날에 교회는 주님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경배하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시작된 교회의 탄생을 기념하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한다.
교회는 매우 오랜 전통에 따라 이날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예식만을 거행한다.
본래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도입되어 오늘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십자가 경배는 4세기 말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에테리아 (그 이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데,
처음에는 실비아라고 불리었으나 후에 에테리아 또는 에제리아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가
서방 교회에 알려 8세기 초에 로마예식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주님께서 수난하신 다음 부활하실 때까지 금식을 지키기 위하여 영성체를 하지 않았다.
그 뒤 성목요일에 성체를 모시는 관습이 들어왔으나 전례 개혁 전에는 집전 사제만이 성체를 받아 모셨다.
모든 교우에게 영성체가 허용된 것은 1955년에 있었던 전례 개혁 이후이다.
(가톨릭홈에서)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식중
사제가 십자가를 보여주는 예식을 거행하며
신자들에게 십자가 경배를 권고할 때 부르는 성가입니다.
사제의 권고에 신자들은 "모두 와서 경배하세."로 응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