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편지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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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이재경 [clausura] 200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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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공사가 거의 끝나가니까 신자분들이 저마다 새 성전에 있으면 좋을 것, 하면 좋을 것을 말씀해 주신다. 탁구대를 놓아달라는 분, 당구대를 놓아달라는 분도 계시고 문화센터처럼 여러 강좌를 개설하달라는 사람까지 백인 백색이다. 그동안 구성전, 임시성전에서 살면서 다른 성당을 보고 부러워했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된다 안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고 일단 입주를 해서 살다보면 모자라는 것도 있고 넘치는 것도 있고 하니 그때가서 조금씩 바꾸자고 말씀드린다.
주일미사 끝나고 마당에서 인사를 하는데 어떤 분이 오셔서 ’신부님 성당 공사가 다끝났지요 ?’ ’네’ ’그럼 이제 신부님 가시겠네요 ?’ ’갈때가 다 되었지요’ ’신부님 성당 다 지어놓고 아쉽게 그냥 가시네요’ ’바로는 안가는데요 ?’ ’그래도 곧 가시잖아요’
성당 다지었으니까 빨리 가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하기사 대개 성당을 짓는 신부님들이 공사가 끝나면 거의 임기가 다 되어 다른 임지로 이동을 하게 되니 그런 말씀을 하실만도 하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까 문득 ’그래 떠날때가 다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떠나가는 삶. 어느 한곳에 정착하거나 머무르지 않고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삶이 사제의 삶이고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 아닌가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여벌옷도, 지팡이도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되 혹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을 만나면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고 그동네를 떠나라고 하신다. 분명 이 먼지를 터는 말씀 뒤에는 종말론적인 전망이 있지만 조금 다른식으로도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나는 제자의 삶은 복음을 받아들인 동네를 떠날때도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발에 묻은 먼지마저 털어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사람들이 더이상 손가락 끝을 보지 않고 달을 본다고 해서 서운해 할 것은 없다. 손가락은 자기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달만 쳐다보고 손가락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손가락은 그자체로 구원에 이른 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외치는 이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