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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가시나무가 구원의 십자가나무로

41 정중규 [mugeoul] 2000-12-04

 

장애의 가시나무가 구원의 십자가나무로

 

  예수께선 당신 교회의 교회됨의 증표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마태 11,5)이라고 단언하셨다. 다시 말해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고 지체장애인이 걷게 되며 나환우가 깨끗해지고 청각장애인이 듣게 되는’ 그런 치유(외적이든 내적이든) 행위야말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시대 장애인들이 그런 치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치유의 한마당이 교회 안에 마련이나 되어 있는 것일까? 오히려 교회마저 하나의 장벽임을 실감하곤 좌절할 정도는 아닌가. 일반인 위주로 되어 있는 교회의 조직체계,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눈앞에 와 닿는 제반 시설물의 非福祉的인 構造는 장애인을 근본적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사실 일반인에겐 아무렇지도 않는 계단 하나, 문턱 하나가 만리장성보다 더 높고 두텁게 느껴지는 게 장애인의 현실이다. 교회가 지닌 이러한 벽은 그것이 장애인 개개인은 물론이고 교회공동체 전체의 구원의 차원에까지 닿는 근본적인 문제인 까닭에 더욱 심각하다. 누구보다 신앙이 필요한 장애인들이 교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교회에 접근조차 못한다면 얼마만한 모순인가. 거기에다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는 제자파견사에서 보듯 그분의 선교는 소외된 이들을 껴안는 작업이었다. 하여 ’共同體性’이야말로 교회의 존재이유로서 그 공동체성을 잃어버렸을 때 교회는 근본적인 죄악(原罪)을 저지르는 꼴이 된다. 그렇게 볼 때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그대로 두기까지 하면서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온 들판을 헤매는, 그리하여 그 양을 되찾고 품에 안고 돌아와 기뻐하는 목자의 마음이야말로 그 공동체성을 온전케 지켜내려는 교회다운 마음씀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가 무엇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데로 우선되고 또 거기에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려면 우선 교회가 낮아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환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올 만큼(마르 2,4) 낮고도 낮았다. 그럴진대 不夜城 같은 첨탑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 시대 어느 교회가 자신의 천정을 찢으면서까지 사회의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일 것인가. 교회가 높은 곳에 세워짐은 자기과시가 아닌,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수렴해 다시 그 아픔을 세상에다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마치 모세의 구리뱀이 그렇듯 세상을 치유케 함이다. 이는 교회의 기원으로 갈바리아 산상에 세워진 십자가의 의미이기도 하다. 왜 하느님께서 유대 땅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고을 베들레헴으로 오셨는가. 그것은 한 사회의 참된 구원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여 높게만 쌓아 올라가는 바벨탑을 허물고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는’(출애 16,18) 나눔의 공동체의식으로 그 벽돌을 소외된 이들과 나누는 작업이 요구된다. 사실 끊임없이 나누어 낮아져 높낮이가 전혀 없게 된 그 땅(이사 40,4), 平地 그곳이야말로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地上의 先取된 하느님 나라인 교회도 마땅히 자신을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된 이들의 쉼터로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소수의 그들’만이 아닌 궁극적으로 교회공동체 전체를 위함이다. 소외된 이가 있는 한 우리의 행복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독점과 나뉨의 ’壁의 構造’를, 나눔의 공동체의식의 ’場의 構造’로 전환시키고서 모든 이를 얼싸안을 수 있는 사랑의 넉넉한 가슴을 교회가 지닐 때, 그 사랑은 교회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성장시키고 성숙시킬 것이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함은 그로서 더욱 더 옳고 참되고 성스러워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로서만이 비로소 옳고 참되고 성스러움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 약자를 배려하는 교회, 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는 교회, 교회 전반에 共同善을 추구하는 의식이 자연스레 뿌리내릴 때, 교회는 自己 身元을 되찾게 되면서 그 생명력으로 인해 말 그대로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이 사회에서의 장애인이 겪는 아픔은 도체 그 어디에도 발붙일 데가 없는 데서 비롯되는 ’뿌리 뽑히는 아픔’이다. 그건 요즘 사회에서 유행하는 名退나 早退 같은 失業者가 겪는 아픔 이상이다. 장애인들은 이제껏 사회시스템에서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조차 철저히 배제되어 왔었다. 이른바 사회에서 흔히 일컫는 장애인들의 심리적 행태적 특성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누구나 비슷하다. 그런 틀 속에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누구라도 장애인의 상황에 처한다면 그 역시 그러할 것이다. 예를들어 누구라도 병원에 장기입원하면, 얼마 안가서 사회로부터 격리된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고, 퇴원해 사회로 다시 나와도 당분간은 마치 별세상에 온 것처럼 어색할 것이다. 하물며 대다수 장애인들은 몇 년, 아니 극한 경우엔 몇십 년을 사회와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왔다. 그런데도 사회적응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참으로 ’이상’한 것은 장애인이 아니라, 오히려 숱한 환경적 ’장애’를 지니고 있어 장애인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이상’한 것이고, 그런 사회가 한 인간을 장애인으로 ’烙印’ 찍었던 것이다. 사실 산업화의 병폐로 ’人間環境’이 극도로 악화되어 교통사고나 성인병 등이 다반사인 작금의 이 사회에선 누구나 豫備障碍人이며, 실제로 후천적 장애가 80%를 상회하는 현실은 더 이상 장애인문제가 ’소수의 그들’만의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누구라도 세월가면 장애인이 되고만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건강한 자일지라도 늙으면, 시력 떨어져 시각장애인 되고, 청력 떨어져 청각장애인 되고, 말 어눌해져 언어장애인 된다. 심지어 다리힘 없어져 지체장애인 되고, 속 병들어 내부장애인 되고 만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장애란 불완전한 인간존재의 분명한 표상이다. 우리 교회가 ’장애인’, 아니 ’장애’ 앞에 보다 겸손해져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어쭙잖은 동정을 말함이 아니다. 흔히 교회에선 장애인들을 비롯한 병자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세상의 죄를 대신해 고통을 겪는다’는 식의 代贖思想으로 풀어 그들을 아자젤의 염소 꼴(레위 16,21) 같이 애꿎은 희생양으로 만든다. 그건 참으로 편한 논리 전개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겪는 고통의 무게에 비해 너무 가볍고도 천박한 이해가 될 수도 있다. 누가 장애인의 아픔을 다 알 것인가. 오직 ’장애’를 가졌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다운 삶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이 서글픈 현실의 실체 그 크기는 어쩌면 그 자신마져도 죄다 모르리라. 하여 인간실존에 대한 정직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겸허함과 깊이 있는 통찰에 따른 접근이 요구된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한 肢體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肢體도 함께 아파한다(Ⅰ고린 12,26)는 말 그대로 한 인간의 장애는 공동체 전체의 것으로 共有되어져야 마땅하다. 그럴 때 비로소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배려는 단순한 베풂이 아닌 공동선의 차원이 된다. 거기에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하느님의 눈엔 누구나 장애인이다. 그러나 ’죄가 있는 곳에 은총도 있다’고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완전함에 도달케 만드는 가능성의 희망스런 닻이다. 그렇게 빠스카의 신비에 비추어 볼 때 장애는 분명 구원의 도구로서,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의 구원은 각자가 지닌 장애(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를 통해서만 비로소 성취될 것이 분명하다. 原罪로 인해 聖子의 降生이 이뤄졌음을 묵상하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오 복된 탓이여!"라고 외쳤다던가. 그처럼 장애야말로 새 세상을 낳는 구원의 보화를 담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질그릇인지도 모른다. 그 누가 말했던가. 네 잎 클로버는 분명 장애를 가진 클로버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를 ’행운의 네 잎 클로버’라고 부른다고. 그처럼 우리 모두가 근본적인 인식 전환을 통해 장애가 지닌 깊은 의미와 참된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인간이 지닌 모든 장애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네 잎 클로버가 될 것이다. 이름하여 障碍의 靈性이다. 교회는 장애에 대한 영성 및 신학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대적 요청이다. ’시대의 징표’를 복음의 빛으로 밝혀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교회는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새롭게 대두된 장애인문제 역시 끌어안고 그 해결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사목은 단순히 特殊司牧의 한 부분으로만 그치지 않고, 敎會의 身元과 正體性 그 핵심에 닿는 문제로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가름하는 바로메터가 된다. 거기에다 장애란 분명 하나의 個性이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장애도 하나의 ’다름’으로 파악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장애인이 재활이나 치료를 통해 이른바 정상인이 될 수 없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획일화된 잣대로 장애를 ’모자람’으로 쉬 판단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다름’의 고유한 삶으로 받아들여 주는 깨어 있는 인식이 교회에 요구된다. 어쩌면 그 ’다름’이야말로 삼라만상을 낳은 하느님 창조사업의 신비가 아닌가. 특히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시대를 맞아 ’一致의 聖事’인 교회는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기 위한 宣敎戰略次元에서라도 ’다름’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 장애인을 무언가 베풀어주어야 할 ’對象’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 여기는 인식의 개선이 교회 내에서부터 이루어지길 진정 기원한다. 그와 함께 70년대의 억압적 상황이 民衆神學을 낳았고, 南美의 프락시스적 상황이 解放神學을 낳았고, 가부장적 상황이 女性神學을 낳았듯, 새로운 障碍人神學의 창출을 기대 해마지 않는다.

  언젠가 장애인 모두가 교회 안에서 사슴처럼 마음껏 뛰어 놀며 닫혔던 귀가 열리고 굳었던 혀가 풀려 신명나게 노래할(이사 35,5-6) 그날, 교회의 따스한 손길 안에서 모든 눈물이 씻겨져 장애인 모두가 온전하게 다시 태어날 치유의 그날, 무엇보다 우리의 삶과 함께 하며 아픔과 슬픔의 까닭이었던 장애의 가시나무가 빠스카의 신비를 통해 구원을 가져다 줄 향기로운 생명의 십자가 나무로 변형되어 나타날 새 하늘 새 땅의 그날, 교회의 共同體性 곧 全體性은 온전히 회복될 것이고, 그로써 2천년 前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解放과 自由의 傳喝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드러내신 禧年의 선포(루가 4,18)로 시작된 敎會의 旅程은 비로소 그 완성의 대단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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