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반게시판
- 대림 2주 (회개와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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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윤미섭 [klaray] 200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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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2주 (회개와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의 전제 조건인 회개
오늘의 주제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 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주제들 중 하나인 "회개" 라는 말마디를 들으면 어떤 생각부터
떠오르십니까? 회개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광야, 세례자 요한, 예수님, 죄, 고통, 참회 등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지옥과 지옥 벌들이 생각나시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라는 의미를 신약성서에서 살펴본다면,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마르 1,15 참조)라는 말씀에 우리의 신앙이 집중되고 있음을 접하게 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회개와 하느님 나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그러니 죄 있는 자들아, 너희의 죄를 알고, 또 하느님께 참회하고,
회개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자"는 말입니다.
영원한 축복과 행복이 있는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가자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설교 말씀의 중심은 분명히 회개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실재이며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회개를 합니까? '나는 아무런 죄도 없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신 분은 혹(!) 없으십니까?
제가 이런 질문을 하였을 때에 여러분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신부님, 한 톨의 죄없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죄악들을 범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 각자에게 주님께서 "지금 당장 죽어도 좋겠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분명히 우리들은 "아이고, 예수님! 아직 할 일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고백성사를 통해서 저의 죄를 다 사함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애원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지금 당장 죽게 된다면 천당은 고사하고 연옥도 못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당장 회개를 할 의향이 있습니까?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어쩌면, 여러분 중의 어떤 분들은 저의
이런 질문을 듣고 이런 이야기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회개를 하기는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도대체 회개는 무엇이고, 하느님 나라와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회 개
우리는 신약성서 안에서 회개에 대한 몇 가지 유형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는 말씀으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로서의
회개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둘째,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기쁜소식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회개와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셋째,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 사도는 저 유명한 오순절 설교에 감명을 받은 군중들의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하는 질문에 대해,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사도 2,37-38)라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번째 단계가
회개와 세례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넷째,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역시 당시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시의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쟁쟁한 철학자들과 문인들을 향하여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무지했던
때에는 눈을 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누구든지 다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사도 17,30)라고 하시면서, 사람은 신분상의 귀천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회개할
존재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러한 '회개'에 대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신약성서에만도 "회개하라"는 말은 70번
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회개는 성경이 가르치는 중심 사상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회개라는 말의 신약 성서적 용어인 Metanoia는 종종 도덕적 회심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이 '메타노이아'의 의미는 '사고방식, 관점, 마음의 바꿈'을 뜻1)하기도 합니다.
한편, 구약성서도 신약성서 못지 않게 회개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구약성서는 죄인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바라시는 야훼하느님의 지극하신 자비와
또 이 자비에 응답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서인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아모스서 등은 "야훼를 찾으라,
야훼의 얼굴을 찾아라, 마음을 야훼께로 향하라, 인생의 길을 바꾸라, 돌아오라, 회개하라"
등의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요엘도 "너희는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요엘 2,12-13)는 말씀으로
예언서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우리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따라서 회개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한 개인의 구원과 더 나아가서는 한 민족의 운명이 회개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회개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죄인이라는 인간의 존재성과 또 구원
받아야 할 인생의 목적 의식에서 오는 절대적 요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의 행복 속에 영생할 수 있도록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느님을 배신하였고(창세 3장), 그 결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리고 이들의 후손인 인류는 원죄의 유산을 이어받아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으며(로마 5,14), 따라서 사람은 "죄의 종"(로마 7,14)으로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비뚤어진 존재"(로마 3,12)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어딘가 잘못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사람은 예외없이 다 죄인이라는 의미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인 동시에
하느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1요한 1,8.10)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루가 5,21-32)고
말씀하신 구절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에, 우리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빛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인간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회개해야 하고, 또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끊임없는 회개의 자세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구원은 우리에게 선사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회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상을 면밀히 알아내는
'지적 요소', 죄를 뉘우치고 마음 아파하는 '정적(情的) 요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분께로 돌아가는 '의지적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를 합리화시키며 회개를 방해하는 다음과 같은 사탄의 속삭임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즉 사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유혹의 소리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첫째로, 죄는 누구나 짓는 것이니까…
둘째로, 이까짓 것쯤이야, 다른 사람도 저지르는데 뭐 어때 …
셋째로, 한 번만 더 하고 다음엔 끝내지 …
넷째로, 아직 살 날이 앞으로 많으니까 …
다섯째로, 정말 천당과 지옥이 있을까? …
여섯째로,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되겠지 …
하느님 나라
다음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하느님 나라는 회개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중심 사상입니다.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말씀이 "때가 다 되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라."(마르 1,15)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라.
그러면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덧붙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야 할 삶의 지침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신약성서를 보면 많은 구절들이 하느님 나라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또는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리고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태 7,21).
그렇다면 이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언제 오는 것입니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기에, 우리 가까이에,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주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마르 13,32-33) 하신 말씀처럼, 그 나라는 '아직' 완전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 김웅태 신부(가톨릭 교리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