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반게시판
- 성탄의 유래와 의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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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윤미섭 [klaray] 200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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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유래와 의미(1)
서론
성탄(聖誕, Christmas)은 12월 25일에 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生日)을 일컫는 말로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심을 경축하는 날이다.
Christmas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인데, 성탄시기는 12월 15일부터 주님 공현 대축일
(公顯大祝日)까지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간의 존재 가치가 달라졌기에 인간인 우리가
새로 태어난 것(새 창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탄은 모든 생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생일이다. 이제 성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먼저 성탄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초기 신자들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고,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언제였는지에 대해서는 4복음서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
성탄시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발전하여 생긴
축일이다. 전통에 의거하여 354년의 한 로마 역사가는 12월 25일을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은 이 축일의 기원은 2세기 중반까지 거슬러올라가서 발견된다.
교황 텔레스포루스(Telesphorus)는 이미 부활시기와 성탄시기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이때부터 신앙 생활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황제의 배려로 박해받던 교회가 이제는 국교로 성장하였고 그 결과
4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탄을 지켜 왔다.
이때부터 성탄시기의 두 큰 축일들이 생겨났는데, 하나는 로마 교회가 선택한 12월 25일의
"예수 성탄 축일"이었다.
이 축일은 본래 지중해 전 지역에서 200년 이후 로마인들이 "불멸의 태양신(太陽神)
미트라의 생일(Natalis Solis invicti)"로 지내던 날이었으며 동시에 이 이교 축제는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冬至, Brumalia)를
기념한 축일이었다. 이 이교도 축일은 아우렐리오 황제가 적극 권장하고 명하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에 태양신 숭배를 국교로 승격시켜 결정하여 로마 제국의
전지역에서 지켰던 축제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1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던 주일(主日,
Dies Dominica)을 미트라교의 태양 숭배일(Sunday)과 결합시켜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교
신앙을 승리하도록 배려하였고 주(週) 1회의 휴일을 정하고 모든 관리들의 휴일로 삼았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론에 관한 교의(敎義)가 정리되고, 그리스도 탄생에 대한
신학적 의미 부여가 확정되자, 미트라교의 축일인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대치시키고 확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3세기 이후부터 자주 "정의의 태양"(말라 4,2)으로 묘사되었으므로 교회는
성탄 축일을 지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 태양"이시며 "세상의 빛"이심을 경축하였다.
이 빛은 이교의 태양신을 몰아내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하느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신 날로 여겨졌다.
바로 그날이 3월 25일(성모 영보 = 예수 아기의 잉태)이었다. 그날부터 계산하여
주님의 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하여 믿는 마음으로 지냈다. 이렇게 되어 리베리오 교황
시절에 로마에서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도, 순례자 에테리아 수녀의 기록에 따르면,
4세기 중반에 12월 25일을 성탄 축일로 지내는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축일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자극을 받아 생긴 것으로서, 실제로 성탄 대축일
미사 경문은 아리우스 이단을 물리친 니케아 공의회의 승리 노래와 같다.
민족 대이동이 끝난 후 오랫동안 라틴 교회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곧 프랑크족을 제외한 모든 게르만족들은 아리아니즘에 물들어 있었다.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성탄 축일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의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가르침이 성탄 축일 미사 전례의 본문에 수록되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탄 축일이 대축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탄 축일에 특전이 주어져서 세례성사를 부활 대축일에서와 같이 줄 수 있게
되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민중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과 아울러 구세주의 겸손을 강조함으로써 성탄 축일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두 번째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정한 1월 6일의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다.
동방 교회는 12월 25일보다 1월 6일을 더 선호하였다. 왜냐하면 이날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날이며 성부께서 세상에 당신 사랑하시는 아들을 소개시켜 주신 날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그래서 우리는 이 축일을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고도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참 임금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왕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임금이시다. 그런 이유에서 이날은 또한 거룩한 삼왕(聖三王) 축일이라도 불린다.
동방의 가스발, 멜키올, 발타샬 왕들(동방 박사 세 분)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구세주를 찾아와 경배 드리고 예물을 드린 것을 기념한다(마태 2,1-12 참조).
본래는 1월 6일도 그리스도교의 축일이 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도시 신(神)인 에온(Aeon)의
축제일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희랍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고 상업이 발달한 대도시였다.
이 방면에 도움을 주는 신이 바로 에온이었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공현"(Epiphania)은 본래 태양이 떠오를 때를 가리키는 말인데, 황제에게 적용시켜
황제나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방문을 할 때 도착 때에 쓰던 종교적 의미가 담긴 말이다.
이 서민적이고 전(前)그리스도교적인 관습이 영향을 끼쳐 전 동방 지역 교회에 1월 6일을
참 왕이시고 세상의 통치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시기로 삼아 지내는 축일이 된 것이다.
386년 12월 20일(성탄시기 전 주일),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안티오키아 교회
에서 중요한 강론을 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12월 25일에 미사에 초대하였다.
로마 교회의 본보기를 그들에게 알려 주면서, 로마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
실시된 국민 호구 조사의 명단이 기록 보존실에 비치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곳 로마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를 더 확실히 알 것이니,
우리 교회에서도 그들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의 성탄 축일을 12월 25일에 지내야 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그 결과 12월 25일에 주님의 성탄 축일을 지내는 일이 동방 전역에
확산되었다. 반면에 로마 교회는 또한 동방 교회의 전통에서 1월 6일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받아들여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통치자의 도착을 알리는" 공현 축일의
내용을 여러 날에 걸쳐 분산시켜 지내게 되었다.
곧 12월 25일은 베들레헴에서의 공현을 기리고, 1월 6일은 별들이 빛난 사건과 동방 박사
들의 도착을 기념하고, 세례 축일은 1월 6일에서 1월 13일로 옮겨서 지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그 내용이 또한 "공현"을 포함하는 축일로서 공현 대축일 후 2번째
주일에 지내도록 하였다.
반면에 희랍 교회는 12월 25일에 조금은 조촐하게 성탄을 지내고, 1월 6일에는 아주
성대하게 지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선호하였고,
동시에 바다와 식수를 축복하는 등 아주 화려하고 장엄한 전례를 마련하였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 교회에는 특별한 축일, 곧 주님의 성탄 축일이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고, 미사 후에는 사제와 신자들이 행렬을 이루어 세례대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사제는 물을 축성하면서 "요르단강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그리고 신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세례성사를 기억하고 마귀에게서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모든 질병에서 치유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그 축성된 물을 가지고 집으로 간다.
서방 교회에서 1월 6일에 세 분의 동방 박사들이 새로 태어나신 메시아를 만난 것을 기념하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핵심으로 등장시키는 반면에,
동방 교회에서는 구유의 아기 예수님보다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핵심으로 삼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1월 6일에 지내던 공현
축일에 대한 동방 교회의 최초의 언급은 이미 3세기에 나타난다.
동방 교회의 이 전통 중에 일부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곧 주님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을
예수님의 세례 축일로 지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의 독서에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행하셨던 예수님의 첫 기적을
상기시킨다. 이 세 가지 사건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표로 이해된다.
사건마다 있었던 외적 표시들이 이 점을 드러낸다. 곧 하늘에 나타난 신기한 별은
동방 박사들을 안전하게 베들레헴으로 안내하였다.
또한 요르단강에서의 세례 때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로
표현하였고, 가나의 혼인 잔치 때에 예수님께서 물이 술이 되게 하는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바로 파견되어 오신 구세주, 참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다(요한 2,1-11).
이 세 가지 사건들을 일컬어 "Theophania" 또는 "Epipania"라고 부른다.
서방 교회에서는 이 세 가지 원천 중에서 다만 새로 태어나신 메시아의 공현만을 선택하여
1월 6일에 지내게 되었고 민중 신심은 "삼왕 축일"이 탄생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복음서에는 왕들의 이름이나 숫자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9세기에 처음으로 삼왕들의 이름, 가스팔, 멜키올, 발타샬이 등장한다.
삼왕들은 인류의 3종족을 대표하고 그 당시 알려졌던 지구의 세 지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전승을 보면 4세기에 삼왕들의 유해가 발견되었고
밀라노(이탈리아)에 보존되어 오다가 1164년에 바르바로사 황제가 쾰른(독일)의 대주교에게
선물하여 특별히 제작된 금궤 안에 모셔져 쾰른 대성당 안에 모셔져 있다.
독일어로 "Weihnacht"라는 말은 "거룩한, 축성된 밤"(Heilige Nacht, Holy Night)
이라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신 이 밤보다
더 거룩한 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인산(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신부/교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