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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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유웅열 [ryuwy] 200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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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
박 완 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할 수
도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무서운 사실
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고 죽
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요즈음 나의 하루의 사고 내용을 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반 이상 된
다. 내가 어떻게 죽을지가 그렇게 걱정이 된다. 요새는 왜 그렇게 암이
많은지 남편도 그랬지만, 친지들의 죽음이 거의가 다 암으로 죽었거나
죽어간다.
그 과정의 고통을 잙 알기 때문에 내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치료를
받아들일 것인가, 치료를 거부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도 지
금부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이다.
죽음보다도 죽을 때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죽음은 역시 무섭다. 그러
나 장수해서 치매가 되는 것은 더 무섭다. 내가 사랑하던 이들로부터
그런 방법으로 정을 떼고 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오래 안 죽고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나보다 나중에 죽어야할 사람이 먼
저 죽는 걸 보는 일이다. 그래서 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있다.
고통도 없이 노망도 안 들고 죽을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죽음이 무서운
것은, 죽으면 아무 것도 느낄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가슴을 에이는 비
통 중에도 꽃 피는 계절이 아름다웠고, 새로 태어난 손자를 안아보는
기쁨은 황홀했고, 자식들을 위해 맛있는 것을 만들 때는 신바람도 났
건만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가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섭다.
그러나 완전한 무가 바로 무한이란 생각도 든다. 죽음과 동시에 느낄
수는 없게 되더라도 무한한 것의 일부로 환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피는 꽃을 보고 즐거워하는 대신 꽃을 피우는 대 자연의 섭리의 일부
가 될 테이고, 육신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대신 무심한 바람
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옷깃을 스치게 될 터이다.
또 자식들은 가끔 내 생각을 하며 그리워도 하겠지만, 아직도 바램이
있다면 이 에미가 남기고 간 희미한 자국을 혐오하지 말고 따뜻이 받
아 들였으면 하는 게 이 세상에 대해 내가 못 버리고 있는 미련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엔 어떤 자취도 남기고 싶지 않다.
특히 내가 소유하고 있던 물건이 내가 죽은 후에도 남아 있을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가진 것을 줄여야지, 죄소 한도만 가져야지 벼르건만
가진 것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특히 옷은 없앤 만큼 사게 된다.
책만 해도 그렇다. 읽고 좋았던 책, 앞으로 읽어야지 하는 책, 두고두고
다시 보는 책, 사진 류, 참고로 할 필요가 있는 책만 가지고 있으려 해
도 그게 여의치 않다. 정성스러운 서명이든 책도 버리게 되지 않고 견
고한 전집류도 꽂아 놓은 게 그럴 듯해서 못 버린다.
내 딴엔 옷가지고, 그릇이고, 책이고 제때제때 없애느라고 애를 쓰고있
지만 나 죽은 후까지도 남아있을 내 소유물은 결코 적다고 할 수가 없
다. 부피가 안 나가는 소유라고 해서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얼
마간의 돈이 들어 있는 예금통장만 해도 그렇다.
알지 않고, 아프지 않고, 너무 오래 살지도 말고, 남들이 조금은 아깝다
고 애석하게 여길 나이에 죽고 싶은 게 나의 마지막 허영이지만, 나라
고 중풍이나 치매에 걸려 몇 년씩 병석에 있다가 죽지 말란 법이 없다
는 것을 왜 모르랴.
예금통장은 그럴 때에 대비한 약간의 목돈이지만 그걸로 남을지, 모자
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모자라면 자식들에게 미안한 노릇이지
만, 남거나 천복으로 앓지 않고 죽어 고스란히 남는다고 해서 자식들
에게 복이 될까 ?
불로 소득 때문에 그만하던 자식들의 우애가 상할까봐 걱정도 해보지
만 내가 죽으면 이미 나는 이 세상 아무 것도 내 것이 아니다. 일생동
안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내 육신에 대한 권리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마
당에 그 까짓 푼돈에 대한 권리를 왜 주장하려고 하나 ?
나는 모르지만 내가 죽는 날은 미래 어느 시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시점이 가까워지는 것과 비례해서 내 안의 생명력도 착실하게 소진
되고 있을 것이다. 생명력이 소진되는 것과 같은 속도로 내가 소유한
모든 것도 조금씩 작아지다가 죽음과 동시에 소실 돼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꿈꾸는 죽음은 고작 그 정도다. 그러면서도 꿈도 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