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이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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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유웅열 [ryuwy] 200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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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이 주는 선물 -
도스토에프스키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간질병과 사형수의 고통이었다.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든 것도
끊임없는 여인들과의 실연과
청신경 마비라는 음악가의 고통이었다.
고통은 불행이나 불운이 결코 아니다.
고통이란 도리어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희생물인 것이다.
당신이 지금 지나치게 행복하다면
그것은 곧 불행이다.
당신이 지금 지나치게 불행하다면
그것은 곧 행복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용광로 속에 들며
용광로 속에선 신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모양으로 새롭게 빚어진다.
- 강 유 일 시인 -
-고통이면에 있는 하느님의 뜻-
고통의 문제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고통을 접하는 첫 반응은 그 고통에서 회피해 보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회피를 통해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비록 힘들지만 우리가 나름대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신앙적으로는 「고통의 이면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를 찾아보면서, 고통으로 인해 우리의 삶을 깨우치게 하고자하시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믿음 그 자체로 받아드리면서 순명하고 인내한다면 그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고통의 아픔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 홍 금 표 신부님의 글을 읽고-
-고통의 신비-
김 귀 웅 신부 (서초동 본당 부주임)
나는 몇 년 전에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지난여름 동안 1주일 사이에 두 차례의 수술을 또 받아야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수술은 수술 후에 어찌나 고통스럽던지 ‘그냥 죽어 버렸으면 !’하고 몇 차례나 되 뇌이곤 하였다.
고통은 정말 싫다. 내가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는 그 고통이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으로 여길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또 다른 고통에 신음하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 한다.
살면서 누구든지 고통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을 해보게 마련이다. 육체적인 고통 뿐아니라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며, 특히 무죄한 이의 고통, 선한 사람들이 당해야하는 억울한 고통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돌보시고 이끄신다면 왜 ? 고통이 우리를 괴롭히도록 가만히 놓아두시는 것일까 ?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했다면 그 대가로 하느님나라에서는 행복을 보장 받는 것인가 ? 고통은 정말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신비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욥기는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욥은 아무런 티도 없이 하느님을 섬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욥의 처지에서 보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란 고통을 한꺼번에 다 겪게 된다.
여기서 무죄를 주장하는 욥과 틀림없이 무언가 지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욥의 세 친구사이에 논쟁이 오간다. 물론 욥이 당한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답은 제시되지 않지만 고통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것인지 그 모습을 살짝 드러내고 있다.
무죄한 이가 당한 고통, 그리고 그의 기도를 통해 벌 받아야 할 사람들이 용서 받음, 사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 주셨다. 병자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셨고, 사랑하던 이 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던 분이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결코 행복하게 사셨던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고통을 받은 덕분에 영원한 행복을 얻으신 분도 아니시다. 또 당신의 고통으로 이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 주시지도 않으셨다. 즉 고통 끝에 행복한 삶이 기다린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신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고통가운데서 돌아 가셨을까 ?
수술 후 병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모르핀 주사에도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고통은 오히려 은총이었다. 고통이 심하여 안깐 힘을 기울이며 버티다 못하여 차라리 죽고 싶다고 고백할 때, “하느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절규하시던 그 분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그 분을 떠올리며 그 분이 내 옆에서 함께 고통스러워하신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고통에 힘겨워 할 때 많은 분들이 옆에서 기도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정말로 커다란 사랑의 체험이었으니 고통스러웠지만 오히려 감사했던 시간이었다. ‘고통은 정말 신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