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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 - 윤경재

105 윤경재 [whatayun] 2010-11-22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 - 윤경재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35-43)

  

오늘 복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구원’과 ‘자신’입니다. 유대인 지도자와 이방인 군사와 죽음에 처한 죄수가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라는 빈정거림입니다. 세 사람이 전혀 다른 상황에 부닥쳐 한 생을 살면서 어쩌면 이리도 똑같은 말을 내뱉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부닥친다면 똑같은 말을 할 거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사고 안에 깊이 뿌리박힌 어떤 공통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어떤 요청에도 쭉 침묵을 지키시던 예수께서 꺼내신 단 한마디 말씀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남기는 유언에는 커다란 힘이 담겨 있습니다. 유언에는 마지막으로 떠나는 사람의 생을 압축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유언을 들으면 누구나 그 유언의 뜻을 살펴 지키려고 애씁니다. 회한과 부탁의 말이 대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회한도 부탁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신이 할 일을 그냥 하셨습니다. 당신의 의로움을 마지막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내뱉는 비아냥거림과 예수님 말씀에서 보이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자신’과 ‘함께’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인간의 사고와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다른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사고는 결국 제 한몸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구시렁거려도 극한 상황에 처하면 모든 생각이 자기 자신에 쏠립니다. 심지어 소위 우도(右盜)라고 부르는 다른 죄수의 말도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입니다. 그도 역시 시각은 저 자신입니다. 그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진실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 ‘함께’를 먼저 떠올리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 10,3)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겪는 큰 딜레마가 있는데 악행을 저지르면 ‘회한과 죄책감’에 빠지고 선행을 베풀었을 때는 ‘도덕적 교만’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은 인간이 갖는 시각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인은 불의에 빠지지만, 소위 의인은 자의(自義)에 빠진다는 경고입니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시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주시는 가르침과 키에르케고르가 보내는 경고는 모두 예수님의 언행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침묵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몸 언어를 깨달아 나왔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자신에게 국한하지 않고 벗어나려는 시각을 지니고 모두와 함께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다면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삶을 조금이나마 따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서울로 가는 상행선열차를 타야 하는데 부산으로 가는 하행선열차를 탔다면 얼른 그 열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하행선열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의자 방향만 바꾸어 앉는다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덕분에 우리는 잘 못된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타고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이제 의자만 바꿀 것이 아니라 당장 뛰어내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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