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석 그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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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김락준 [tutti] 201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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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듯한 미소가 근사했고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요절 포크가수 김광석.
그는 8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기성 가요계에 진출하여 성공한 첫 가수이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친구에게서 선물받은 민중 가요집,
'젊은 예수'에 수록된 '못생긴 얼굴'이란
노래를 부르다가 울었다.
당시 우연히 접한
한돌, 김민기씨 등의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고
노래서클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래서 3학년이 된 84년서울지역대학생의 노래연합서클인
'연합메아리'의 멤버가 되어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김민기의 주도로
대학가 노래운동의 주역들이 규합하여 만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창단멤버가 되어 1집 앨범에 참여했다.
민중가수가 된 것이다.
이후 85년 1월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 중 큰 형이 사망해
6개월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복학을 한 그는 노래인생을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87년 10월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정기공연에 참여했다.
호소력이 담긴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가수로 떠오르며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되었다.
이처럼 투쟁성을 앞세운
민중노래운동에 열심이던 그에게
본격적인 대중가수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찾아왔다.
87년 여름,
음악친구들과 모여 별 생각없이 녹음한 습작들을
록 그룹 '산울림'의 리더 김창완이 듣고
음반제작을 주선해 주었다.
용기를 얻은 김광석은 89년 10월,
솔로가수로 독립하여
기성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자작곡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첫 솔로 데뷔음반을 발표했다.그리고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열심히 음악활동을 하던 중에
1년간 연애를 해 오던 서혜순과 1990년 결혼을 했다.
이후 91년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
92년 '나의 노래'가 담긴 3집을 발표했다.
인기가수로 성공한 그는,
"얼떨떨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노래를 처음 시작했을 때 보다
노래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다소 약화돼 가는 것을 느낀다"며
성공적 변신의 달콤함을 스스로 경계했다.
그는 특유의 소탈하고 진솔한 무대매너로
관객들과 거리감을 없애는
성숙한 공연문화의 시금석을 마련했다.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다.
96년 1월 6일,
'가수 김광석, 또 자살 가요계 충격'이란 기사가 눈에 박혔다.
팬들은 경악했다.
새벽 4시 30분께 마포구 서교동의 원음빌딩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그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부인 서씨는 "남편과 함께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맥주 4병을 나눠 마신 뒤 혼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거실에 인기척이 없어 나가보니,
남편이 옥상으로 연결되는 16계단 중 8번째 계단에서
굵은 전기줄에 목을 매단 채 숨져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팬들의 가슴에 맑은 웃음과 노래를 심어놓고
그는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뒤따랐다.
캐나다 유학문제 고민,
음악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발생한 조울증,
여자문제, 심지어는 타살설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더욱이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 서지원에 이어
김광석의 죽음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연 은퇴선언 등이
줄을 이어 벌어지자
조직폭력과 연관설까지 불거져 나왔다.
이에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김광석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이 이루어졌고
경찰전담반이 긴급편성이 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들은
급격하게 비대해진 대중문화 속에서
연예인의 자기관리의 한계에 대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앞에서
유가족들과 김민기, 백창우, 안치환, 노찾사, 동물원 등
50여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제가 치러졌다.
노래 패 '노래 마을'의
대표 백창우는 조시를 낭송했다.
벽제에서 화장을 마친 후,
팥알 크기의 대형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었던 그의 유골은
서울 서초구 수안사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부활이었다.
49제 날엔 60명의 가수가 참여해
연세대 대강당에서 추모콘서트가 열렸고,
9월엔 팬클럽 '둥근 소리'를 중심으로
그의 유작 라이브 CD 앨범
'인생 이야기'와 '노래 이야기' 등 2장이 발매되는 등,
그를 아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요절 가수 김광석은,
1990년대에 이르러 힘없이 주저앉은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 문화에
소생의 기름진 자양분을 공급했던 아티스트였다.
"더 이상 나의 음악을 포크로 보지 말라"던
생전의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댄스와 발라드 음악에 밀려 고사상태에 빠졌던
모던 포크를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의 음악활동은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외롭게 벌였던 그의 음악 독립전쟁은
요절로 인해 완성을 보지못한 아쉬움을 남는다.
쇠로 만든 '도브로' 라는 기타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요절 포크 가수 김광석.
헤어질 때면 누구에게나 '행복하세요' 라는
인사말을 남겨주었던 아름다운 심성만큼이나
그의 노래들은 팬들의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01 거리에서
02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03 기다려줘
04 사랑했지만
05 사랑이라는 이유로06 슬픈노래
07 그날들
08 나무
09 나의 노래
10 잊어야한다는마음으로
11 서른즈음에
12 일어나
13 바람이 불어오는 곳
14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15 그녀가 처음 울던 날16 이등병의 편지
17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18 새장속의 친구
19 내사람이여
20 변해가네21 불행아
22 바람과 나
23 너에게
24 잊혀지는 것
25 먼지가 되어26 그대의 웃음소리
27 광야에서
28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29 말하지 못한 내사랑
30 그루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