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가 찼다' , '기쁜소식', '십자가의 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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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 지성득 [jaugustino] 20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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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는 복음사가는‘때가 찼다’(마르1,15)는 표현으로 예수님이 사명을 시작하신 것을 알린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인간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모든 역사를 품어 안으신다. ‘복음’은 과거 사건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사건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그 시간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이다.
모세오경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겠다.
☆ 예수님한테서 도래한 시간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특징으로 하며 구체적 행위로 표현된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걷고 질병을 고치고 죄인들과 같이 먹고 제자들을 불러 함없이 인내하며 성장으로 이끄신다.
☆ 하느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두 가지, 곧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이는 온 몸으로 하느님께 돌아서라는 초대다. 성조들처럼 하느님께 등을 돌리지 말고(예레7,24)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對話)하라는 요청(要請)이다.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새로움과 기쁨으로 가득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을 신뢰하라는 뜻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약(新約)성경(聖經)이 펼쳐진다.
기쁜 소식
마르코 복음, 제자가 되는 길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복음의 핵심(核心)은 예수님을 알고(4,41:6,3;6,14-16; 8,27-30;11,28)죽음과 부활(復活)을
체험(體驗)하며 십자가(十字架)에 죽기까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神秘)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침묵(沈黙) 속으로 우리를 초대(招待) 하신다.(1,25.34.44:3,12:5,43:7,36:8,30:9,9).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성급(性急)하게 선포(宣布)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인내(忍耐)와 고통(苦痛)과 수고(愁苦)로움이 따른다.
열두 사도의 공동체(共同體)가 그 본보(本報)기다. 사명(使命)을 앞에 둔 제자들 가운데 어려움을 제대로 견디어 낸 사람은 없다.
한 사람은 배반(背反)했었고(14,10-11) 다른 하나는 부인(否認)했으며(14,66-72) 사랑받던 제자(弟子)들은
잠이 들었고 (14.37.40) 마지막에 가서는 모두 도망쳐 버렸다.
십자가(十字架) 죽음만이 지혜(知慧)롭고 평온(平穩)한 제자(弟子)의 길을 제시(提示)한다.
인간(人間)의 열정(熱情)보다는 성령(聖靈)의 이끄심에 제자(弟子) 됨의 길이 달려 있겠다.
죽음과 부활(復活)
복음사가들은 다양(多樣)한 방법(方法)으로 예수님의 수난(受難)에 접근한다.
마르코 (14-15장) : 새 아담의 헐벗음. 예수님은 홀로 수난(受難)을 겪으신다.(14,50)
저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며,
하느님과의 관계(關係)또한 일시적(一時的)이지만 끊겼다.(15,34-37) 인간적(人間的)으로 볼 때 예수님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죽음은 곧 은총의 장소다. 죽음 안에서 하느님뿐 아니라(15,39) 자신을 되찾기(16,5-6) 때문이다.
은총의 시간
예수님 수난(受難)의 가장 극적(劇的)인 순간이 세 단계로 기술된다. 그 순간은 은총(恩寵)의 시간(時間)으로
인류(人類)가 구원(救援)되며 인간과 하느님이 관계(關係)를 회복(回復)하는 때다.
3시(아침 9시)는 벗김의 시간이다.(마르 15,24-32). 예수님은 옷이 벗겨진 채 세상 앞에 서 계신다.
인간적(人間的)으로 볼 때 모욕(侮辱)과 조롱(操弄)은 완전한 실패(失敗)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저주의 표지인 십자가를 지며 아담 이래 모든 사람의 짐을 당신 위에 짊어지신다.
6시(정오)는 암흑의 시간이다(마태 27,45) ; 마르 15,33 ; (루카 23,44). 상징적으로 암흑은 태초의 혼돈(Caos),
태어나기 전 상태(狀態), 새 창조(創造)의 전(前) 단계(段階)를 뜻한다.
9시(오후 3시)는 죽음의 시간(時間)이다(마태27,46-54 ; 마르15,34-39 ; 루카 23,45-49).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은 새 세상(世上)의 탄생(誕生)을 뜻하며 세 가지 특징(特徵)으로 표현된다.
어떤 주석(註釋)가들은 ‘강한 외침’을 악의 힘을 이긴 승리(勝利)의 외침(畏鍼)으로 해석(解釋)한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진 것과 성령(聖靈)의 선물(膳物)을
연상(聯想) 시킨다.
이것은 첫 번째 신앙고백(信仰告白)이다.
십자가의 길
부활의 신비에 동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수많은 순례자가 걷는 십자가의 길은 14c 프란치스코
수도회 사제들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에는 14처 중 몇 처만 있었고 출발 지점은 예수님의 시신이 묻힌 거룩한 무덤이었다.
현재 십자가의 길은 18c에 완성되었고, 제 1,4,5,8처는 19c에 첨가되었다.
최근의 역사 . 고고학 연구는 현재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이 지나가신 길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실 예루살렘에 있던 빌라도 관저는 안토니오 요새가 아니라 도시 서쪽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요한 19,13)에 따르면 가빠타) 헤로데 궁전이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재판은 야외에 있는(루카23,1 :요한 18,28)연단 위에서(마태 27,19) 이루어졌다.
여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은 헤로데 궁전에 이와 같은 장소가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자 이 사람이오’라는 아치(이 아치 바닥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한 장소라고 전해진다.)
옆에 있는 리토스트로토스는 1c것으로 볼 수 없겠다.
역사 · 고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원래 십자가의 길은 현재 성채에서 시작하여 시장터 세 곳을 지나 골고타에
이르렀을 것이다.
엠마오
엠마오의 제자(弟子) 이야기는 마르 16,12과 루카 24,13-35에 나온다.
마르코 복음은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었다고 하고,
루카 복음(福音)은 예루살렘에서 60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고 한다.
아주 오래된 다른 전승(傳承)은 160스타디온 이라고 전한다.
엠마오로 추정되는 장소(場所)는 네 곳이다.
첫 번째는 모차 또는 코로니아라는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30스타디온 정도 떨어진 고대
로마의 식민(植民) 도시(都市)다.
이곳은 라삐 전승(傳承)에 언급되는데, 후대에 와서 복음서(福音書)의 엠마오라고
추정(推定)한다.
두 번째는 쿠베이베인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속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신자들이
경배(敬拜)하던 ‘클레오파스의 집’이라 추정(推定)되는 집이 발견(發見)되었다.
그러나 이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75스타디온 되는 거리에 있고,
이곳을 엠마오라고 여기게 된 것은 중세(中世) 때(1500)부터다. 클레오파스의 집이 세워진
시기(時期)는 정확(正確)히 알 수 없다.
세 번째는 아부 고쉬로 현재(現在) 베네딕토 수도회(修道會)가 관리(管理)한다.
이 기념(記念) 성당(聖堂)은 고대(古代) Rome 양식(洋式)의 수조(水槽) 위에 세워지긴 했지만
십자군(十字軍) 시대의 것이다.
네 번째는 암와스 또는 니코폴리스로 예루살렘에서 160스타디온 떨어져 있다.
에우세비우스는 이곳을 복음(福音)에서 나오는 엠마오로 제시(提示)했지만 두 가지
이유(理由)에서 그 가능성(可能性)이 희박(稀薄)하다.
하루 만에 가기에는 예루살렘에서 너무 멀고, 이곳이 마을이 아니라 도시(都市)라는
이유(理由)다.
고고학적(考古學的) 관점(觀點)에서 보면 엠마오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마르코와 루카의 의도(意圖)는 장소(場所)보다는 신학적(神學的) 메시지를 전(傳)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인간(人間)이 길을 가는 동안 항상(恒常) 당신을 계시(啓示)하신다는 메시지다.
이것은 탈출(脫出)한 백성(百姓)과 예언자 엘리야, 바오로를 비롯한 모든 믿는 사람들의
체험(體驗)이다.
사실(事實) 엠마오는 우리들 일상(日常) 가운데 있겠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은 나자렛 예수님한테서 인간(人間)이 되심으로써 단순히 인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느님께 버림받은 상황(狀況)에까지 들어오신다.
그분은 자신(自身)을 낮추시고 하느님한테서 멀어져 버림받은 사람들이 직면(直面)하는 죽음을 대신 짊어지신다.
그렇게 하여 모든 불경(不敬)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분과 하나 되었다.
인간(人間)이 되신 하느님은 순간(瞬間)순간 우리 가운데 현존(現存)하신다.
우리 인간성(人間性) 안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육체(肉體)를 가진 인간(人間)을 향해 다가오신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과 일치(一致)하기 위해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가장하여 자신과 다르게 보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십자가(十字架)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거두어들이지 않는 사람은 없겠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妨害)하지 못한다.
하느님께 버림받고 거부된 상태(狀態)는 이미 그 안에 살아 계시고 받아들이신,
십자가(十字架)에서 돌아가신 하느님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瞬間) 수용(收容)될 수 있겠다.
하느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면 전면적(全面的)이고 구체적인 그 죽음과 함께 모든 생명 또한
받아들이신 것이다.
인간은 한계와 조건(條件) 없이 하느님의 삶과 고통, 죽음과 부활 안에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신앙(信仰)안에서 충만(充滿)한 하느님의 현존에 참여할 수 있겠다.
하느님의 현존(現存),
곧 성부의 고통과 성자의 사랑과 성령의 활동(活動)에서 제외(除外)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Jurgen Mon\ltmann, Ⅱ Dio crocifisso: La croce di Cristo fondamento e critila della
teolegia cristiana. Brescia 1990,324-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