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5주일 복음과 함께>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태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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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김종업 [rlawhddjq] 20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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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7. 12. 연중 제15주일 복음과 함께>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태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밭이 스스로 돌이나 가시덤불을 제거할 힘이 있습니까 이 중에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날 농부가 씨를 뿌리러 밭에 나가보니 밭에 돌과 가시덤불이 너무 많아서 씨를 뿌려봐야 도저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고 해 보자고요. 그 때 농부가 돌아서면서 ‘너 이 상태로는 절대 열매를 못 맺으니까 내일까지 돌들과 가시덤불들을 다 치워 놓아라, 그러면 내가 내일 와서 다시 씨를 뿌려줄게’ 그렇게 말했다면 배꼽을 잡고 웃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강론대에서 신부님이 그런 말을 하면 ‘아멘’으로 받습니다. 밭들에게 스스로 밭을 갈아엎어 옥토가 되라고 하는 데도 그저 아멘 합니다.
성경은 아담 이후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로마3:10~18)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3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로는 사람을 속이고 입술 밑에는 살무사의 독을 품는다.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15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길가 밭, 돌 짝 밭, 가시떨기의 모습인 것입니다.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상태. 그런데 그 불가능과 무력함의 밭에 생명의 씨가 떨어져 돌과 가시떨기를 부수고 찢어 그 밭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아직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로마5:10) 영원 전에 준비된 하늘의 씨가 그 원수의 밭에 심겨져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구원의 현실을 설명해 주는 비유가 바로 씨뿌리는자의 비유 속에 담긴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씨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3장 15절부터 씨, 자손, 후손 등의 이름으로 질리도록 반복되어 성경에 등장하지요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16절이 그 씨가 바로 예수라고 확실하게 확인도장을 찍습니다.
그러니까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불가능의 밭에 예수라는 씨가 떨어져 새로운 창조가 풍성하게 열매 맺어 완성이 되는 구속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좋은 밭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씨뿌리는자의 비유는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씨뿌리는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르4:13)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보세요. 씨뿌리는자의 비유를 옳게 이해를 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모든 비유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인데, 지금 이 쉬운 씨뿌리는자의 비유가 담고 있는 그 예수와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분명 다른 비유들도 엉뚱한 도덕적 윤리적 교훈으로 오해를 하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씨뿌리는자의 비유를 올바로 잘 이해를 하시게 되면 나머지 모든 비유들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올바로 이해를 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너무 서둘러 결론으로 왔는데요, 지금부터 어떻게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으로 연결이 되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게 된 문맥상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서에 공히 등장하고 있는데,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냐’는 질문 다음에 이 비유가 나오고, 우리가 본문으로 채택을 한 마태복음에서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냐’는 질문 다음에 이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누가 예수님의 진짜 가족이냐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가 된 비유라는 것을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배경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등장하는 장면에 세 복음서 공히 수많은 큰 무리가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루가8: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마르4:1)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마태13: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기적을 본 큰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교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의 내용을 제자들에게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왜 비유로 말씀을 하시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을 해 주십니다.
(마태13:10~15)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이사야서 6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사야서 6장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이 예수님의 말씀 또한 올바로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인용문이 발췌가 된 이사야서 6장으로 가서 이 이야기의 진의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이사6:8~13)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9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10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11 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성읍들이 주민 없이 황폐하게 되고 집집마다 사람이 없으며 경작지도 황무지로 황폐해질 때까지다. 12 주님이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 이 땅에는 황량함이 그득하리라. 13 아직 그곳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여도 그들마저 다시 뜯어 먹히리라.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잘릴 때 거기에 남는 그루터기와 같으리라.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그 우찌야 왕의 사촌이었던 이사야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사야에게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네가 나를 위해 백성들에게로 가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래놓고는 백성들에게 가서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하느님의 비밀을 못 알아듣게 하라는 엉뚱한 지시를 하십니다. 바로 그 임무를 예수님이 맡아가지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의 삶을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막혔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뜨이게 되는 날이 오고 황폐해졌던 성읍이 회복이 되는 날이 온다는 희망의 약속도 함께 주어집니다. 13절을 보면 거룩한 씨가 오실 때에 성읍이 회복이 되고 막혔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뚫린다고 합니다. 그 거룩한 씨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그 수많은 군중들 속에 거룩한 씨가 오셨는데 왜 그 거룩한 씨의 말씀을 아무도 못 알아들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란 하느님의 은혜로 효과적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과 귀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열두 사도가 그 교회의 모형으로 그 비밀을 알아듣는 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당에 아무리 큰 무리가 모여 있다 할지라도 그게 다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대교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대에 예수를 쫒겠다고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큰 손해를 감수하고 예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해서 이곳에 모인 대부분은 다 가짜라고 선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좀 다른가요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성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 중에 정말 하느님나라의 비밀을 올바로 깨닫고 진정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그저 자기의 소원이나 이루고 문제나 해결받기 위해 앉아있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오직 당신이 뚫고 들어가 눈과 귀를 열어 놓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만이 당신의 가족이요, 참 성도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부터 약속된 그 거룩한 씨가 은혜로 침공해 들어오기 전에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모두 돌 짝 밭이요, 길가 밭이요, 가시 떨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시떨기와 돌 짝 밭은 항상 하느님의 저주의 상태를 가리키던 것들이었고 광야의 상태를 가리키던 소품들이었습니다.
(창세3:17~18)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아담이 타락을 하자 하느님의 저주가 내리는데 그 저주의 산물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저주받은 이후로 이 세상이 내어놓는 모든 산물, 과학, 문명, 번영, 재화 등은 모두 가시덤불이며 엉겅퀴에 불과한 것들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힘은 하느님의 저주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 밖에 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세상은 마치 거지 동냥에 불과한 이 세상 금과 은이 인생 최고의 목표인 줄 알고 하염 없이 동냥 그릇만 바라보고 있던 사도행전의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처럼,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불과한 이 세상의 힘을 더 달라고 극성들입니다. 그러한 힘에 대한 갈망은 뽑아버려야 할 가시덤불이지 우리의 밭에 채워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이사7:23~25) 23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값이 은전 천 닢이나 되는 포도나무 천 그루가 있는 곳이 모두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덮이리라. 24 온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여 살과 활을 가지고서야 그리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25 괭이로 일구어 오던 모든 산에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서워 너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다만 소나 먹이고 양이나 밟고 다니는 곳이 되고 말리라.
가시떨기와 황량한 돌로 가득 찬 바로 이 상태가 저주받은 인간의 땅의 모습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예레4:3~4) 3 참으로 주님께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가시덤불에는 씨를 뿌리지 마라. 4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할례를 하여 자신을 주님께 바쳐라. 너희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어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꽃처럼 터져 나와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리라.”
하느님 백성의 모형으로 등장한 이스라엘,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가시덤불이라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그 어떤 씨를 파종해도 절대 열매가 맺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8:14~15) 14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 성소가 되시고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가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덫과 올가미가 되시리라. 15 많은 이들이 거기에 걸려 비틀거리고 넘어져서 깨어지며 걸려들어 사로잡히리라.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돌이 예수님이라고 하지요 재미있습니다. 죄인들이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할 곳, 도피성이신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며, 함정과 올무가 된다고 합니다. 이게 가시덤불이요 돌 짝 밭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설명을 하자면 가시덤불과 돌들로 인해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죄인들의 마음 밭은 생명나무 열매를 지키는 불칼과 거룹들로 인해 생명나무로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저주받은 인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 열매를 숨기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느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나무 열매,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누구라 했지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가시떨기와 돌 짝은 엄밀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덤불과 돌 짝으로 죄인들에게 오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절대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없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 나라와 영생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도달과 획득이 불가능한 위대한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 말은 하느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은 절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씨가 은혜로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죽습니다. 그 말은 절대로 죄를 용납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공의, 즉 가시덤불과 돌 짝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죽어 버리고, 그 밭이 옥토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12:23~24)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밭이 옥토가 되어서 열매를 맺는게 아니라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느님의 공의가 예수의 죽음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인간 측의 그 어떤 공로나 노력이나 자격이나 열심도 거기에 단 1%도 기여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의 씨에 의해, 열매 맺는 하느님 백성들이 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시덤불과 돌 짝들을 제거해서 하느님 나라 백성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 가족이며 형제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무리가 모여 있다 해도 ‘난 절대 너희에게 내 몸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적 어머니, 육적 형제들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앞에서 부정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조건과 자격을 단호하게 규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혈통이나, 업적이나, 열심이나 ,노력이나, 재산이나, 지위나, 학식이나, 깨달음, 그 어떤 것도 하느님 나라 백성 됨에 손톱만큼도 기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작은 예화를 통해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사도 바오로가 호세아서와 이사야서를 동시에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로마9:25~29) 25 이는 바로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 26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27 그리고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28 주님께서는 말씀을 온전히 또 조속히 세상에 실현시키실 것이다.” 29 이는 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같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 본문과 너무나 흡사하지요 예수를 쫓겠다고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남은 자들에게만 복음의 비밀이 전해집니다. 나머지는요 전부 길가 밭, 돌 짝 밭이요, 가시덤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열심, 자격, 조건을 근거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남겨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원래 죽은 땅에 불과한 자들이었는데, 하느님이 남기시니 거룩한 ‘씨’에 의해 옥토가 되어 ‘내 백성, 내가 사랑하는 자’로 남겨진 것입니다. 정리가 되시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씨가 심겨지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예수라는 가시덤불과 돌 짝에 의해 멸망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느님처럼 되어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이 세상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에녹성과 바벨탑 건설에 열심들인 이 세상의 건축자들은 진짜 모퉁이 돌이신 예수를 자꾸 내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들어오셔야 예수가 막아놓은 불칼과 그룹, 즉 가시덤불과 돌 짝이 제거가 됩니다. 휘장이 제거가 되고 얼굴을 가린 수건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그 예수를 내다 버리고, 올무와 거치는 돌에 여전히 눌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흙들은 도무지 은혜라는 것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혜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하느님처럼 우주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들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선악과 따 먹고 하느님처럼 되었는데 왜 우리가 바보같이 은혜만 의지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로마9:30~33) 30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던 다른 민족들이 의로움을, 믿음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얻은 것입니다.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33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을, 부딪쳐 쓰러지게 하는 바위를 놓는다. 그를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예수의 십자가 피 ,공로,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반석이신 예수에 의해 오히려 부딪힘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거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심판입니다. 은혜로 모든 걸 해결해 주겠다고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세상이, 예수에 의해 죄인으로 단죄되고 심판에 이른 것처럼, 예수만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존재들은 다 열매 하나 없는 저주의 무화과나무가 되어 결국에는 말라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하느님께 맡기고 그 분의 은혜에 맡기는 것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정말 미련하고 유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하느님의 진정한 능력을 경험하는 진짜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을 하느님은 당신의 교회에게 알려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마태13:18~23)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예수님께서 길가 밭, 가시덤불, 돌 짝 밭의 상태를 설명해 주시는데 ①먼저 길가 밭은 천국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말씀을 얼른 빼앗아 가는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떤 이는 길가 밭을 설명하시면서 강론시간에 조는 사람을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말씀이 떨어지는데 마귀가 졸음을 주어 말씀이 하나도 귀에 못 들어가도록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졸지 말라는 것이지요. 피곤하면 졸 수도 있는 겁니다. 고작 예수님이 강론시간에 졸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드셨겠어요
길가 밭의 상태는 그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잘 표현해 주는 예가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19:12~14) 12 그러고 나서 그 사람들은 롯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가족들이 여기에 또 있소 사위들과 그대의 아들딸들, 그리고 성읍에 있는 그대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시오. 13 우리는 지금 이곳을 파멸시키려 하오. 저들에 대한 원성이 주님 앞에 너무나 크기 때문이오. 주님께서 소돔을 파멸시키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소.” 14 롯은 밖으로 나가 장차 자기 딸들을 데려갈 사위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곳을 빠져나가게. 주님께서 곧 이 성읍을 파멸시키실 것이네.” 그러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였다.
롯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이제 곧 불타 없어질 소돔에서 나가야 한다고 사위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위들이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왜요 소돔이 좋았거든요. 소돔이 주는 쾌락과 소돔이 주는 편안함과 소돔이 주는 세상적 행복이 복음의 필요성을 잡아먹어 버린 것입니다. 내게 지금 부족한게 없는데 왜 또 다른 복음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여기가 좋은데 왜 자꾸 여기서 나가라고 하냐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길가 밭들이 처한 상태인 것입니다. 아울러 바리사이인들처럼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해서도 자족하며 사는 자들 또한 길가 밭의 상태입니다. 바리사이인들은 세리나 창녀들을 보면서 ‘하느님 저는 저들과 같은 죄인으로 살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릴 정도로 자신들의 삶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씨인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그러자 그들은 그 거룩한 씨를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들은 이미 제사도 잘 지내고 있고, 율법도 잘 지키고 있고, 착한 일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또 회개를 해야 하고, 왜 예수라는 이름을 믿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떨어지는데 마귀가 얼른 집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길가 밭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하느님보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 자신의 건강, 재산, 명예, 인기 등에만 관심을 갖고 사는 모든 인간들이 전부 길가 밭입니다. 거기에는 성도라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②두 번째로 돌 짝 밭입니다. 돌 짝 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기는 하는데 환난과 핍박이 닥치면 곧 넘어지는 자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 그림은 탈출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탈출14:10~12) 10 파라오가 다가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이집트인들이 그들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11 그들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12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들이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이집트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기뻐 찬양하며 이집트를 나섰지요. 그런데 이집트 군대라는 환난과 핍박이 뒤를 쫓아오자 금방 원망과 불평을 해 대며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역시 하느님보다는 세상의 현실이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③세 번째로 가시 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유혹을 못 이기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죄인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을 믿기는 믿는데, 하느님이 그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그런 이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바벨론 포로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제단은 두 개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얻어내지 못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풍요의 신 바알에게 드리는 제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맘몬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 즉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해서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님을 확고히 밝혀 주셨습니다. 역시 영원한 하느님 나라보다는 이 세상 것에 집착하고 있는 인간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위의 세 가지 밭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시떨기와 돌 짝은 구원을 받은 우리 안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환난과 핍박이 왔을 때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에 언제든지 흔들립니다. 심지어 재산이 조금 늘어나거나 삶이 조금 편안해 지면 하느님의 말씀의 필요성도 무용한 것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히려 성당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도라는 사람들 안에도 길가와 가시떨기와 돌짝이 가득 차 있는 지경이라면 이 세상에 좋은 밭이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누가 그러한 환난과 핍박과 유혹과 염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애써 좋은 밭이 되어도 그 좋은 밭에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간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그 것을 허락하십니다. ‘뽑을까요’ 하니까 놔둬라고 하시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이 좋은 밭일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라서 이 세상에 좋은 밭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완전한 좋은 밭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은 우리 성도를 좋은 밭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여전히 길가와 가시떨기와 돌 짝 밭의 모습을 그냥 놔두시고 지켜보시는 것입니까
밭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심겨지는 씨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 옥토로 만드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 돌 짝 밭 같고, 길가 밭 같고, 가시떨기 같은 내 속에 새 생명의 씨가, 오직 은혜로 심겨졌다는 것을 깨달아, 여전히 길가 밭이요, 가시떨기 밭이요, 돌 짝 밭인 자신의 모습을 폭로 당함에도 거기에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그 새 생명의 씨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옥토입니다. 그들이 마지막 날에 반드시 옥토로 완성이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를 예수 안에 넣어서 이 세상의 풍랑 위를 걷는 자로 만들어 주셨으면서도 이 세상의 풍랑 속에 그대로 놔두시며, 믿음으로 ‘난 이 풍랑을 벌써 이긴 자야’라는 은혜의 인식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 것처럼 우리 안의 가시떨기와 길가의 상태와 돌 짝 밭의 모습은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절감하라고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가시떨기와 돌 짝으로 인해 멸망에 처하게 되지만 우리 성도는 우리 안에서 폭로되는 가시떨기와 돌 짝의 모습을 통하여 한 발짝 더 예수님의 은혜 뒤로 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남은 자이며, 바로 그 모습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구원받은 옥토들에게 길가 밭의 상태와 돌 짝 밭의 상태와 가시떨기의 상태를 계속 경험하게 해 주시는 이유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바로 밑에 붙어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 메시지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두 비유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13:29-30)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가만 두어라’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쉴레고’라는 단어는 ‘허락하다, 용납하다, 용서하다’라는 뜻이 포함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가라지는 나중에 뽑혀서 지옥 불에 들어갈 때까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용납하고 용서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길에, 필요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도의 거룩 훈련에 소품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가시떨기와 돌 짝 같은 가라지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무력함과 티끌 됨을 깨닫고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를 배우는 데에 필요한 자기부인의 도구로 우리 안에 ‘쉴레고’ 허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시로 길가 밭의 모습으로 폭로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게 되는 것이고, 수시로 돌 짝 밭의 모습으로 폭로되기도 하는 것이며, 수시로 가시떨기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는가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박힌 거룩한 씨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합력시켜 선으로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폭로되고 부인될 때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 내 안에 사시는 예수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가 맺는 진짜 열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옥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밭일뿐입니다. 밭은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생명을 가진 씨가 밭에 떨어지게 되면 그 밭이 어떠한 상태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생명이 열린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새 계약에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 밭을 완전히 새것으로 바꾸어 버리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우리가 이 인생 속에서 실재화하여 살게 되는데 거기에 쓰이는 것이 가라지입니다. 그 가라지는 바로 우리 안에서 문득문득 발견되는 길 가 밭의 모습이요, 돌 짝 밭의 모습이요, 가시떨기의 모습인 것이며, 우리에게 허락된 사람채찍, 인생 막대기들인 것이며, 이 세상 전체가 다 그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손해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가라지들이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그러한 가라지가 뽑혀지면 알곡이 함께 뽑히게 됩니다. 그 말은 가라지 같은 삶이 없이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이 성공적으로 완성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왜 나는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이 모양인가 때로는 그러한 미성숙함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우시지요 우리 안에 있는 길가 밭, 돌 짝 밭, 가시떨기가 가라지로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자신에 대해 죽어 버리세요. 자신에 대한 신뢰를 한 줌 또 놓아버리세요. 그리고 예수의 은혜로 한 발 더 가까이 가세요.
왜 예수를 믿는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가 그러한 고난이 우리를 죽고 싶게 만들지 않나요 네, 그 때 죽으세요. 그렇게 기대하고 바라던 세상에 대해 죽으세요. 지금 세상의 공격이라는 가라지가 우리의 성숙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중입니다.우리는 열심히 자신과 이 세상을 부인하면 됩니다. 그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산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느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를 좋은 밭으로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만 꼭 붙드세요.
(탈출14:14) 14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
가만히 계세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지는 삶의 과정 속에서 경험하세요. 그런 사람이 바로 옥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이야말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유일한 열매인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해가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