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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11524 이상익 [sangik0330] 2021-01-31

     

 

축일: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St. John Bosco, Priest Founder (RM)

St. Joannes Don Bosco, C

(Don Bosco; Giovanni Bosco; Giovanni Melchior Bosco; John Melchoir Bosco)

San Giovanni Bosco Sacerdote

1815 at Becchi, Castelnuovo d’Asti, Piedmont, Italy

- 1888 at Turin, Italy

Canonized :1934 by Pope Pius XI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 John)

Founder:The Society of St. Francis De Sales(Societa’di san Francisco Salesio)

 

 

1815년 8월 15일, 베키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일찌기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위고

가난한 홀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두 형제들과 함께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요한 보스코가 아홉살 때 한 꿈을 꾸게되는데 그 꿈은 그의 일생을 계시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꿈을 계기로 요한 보스코는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남의 집 머슴살이나 상점의 점원 또는 직공 등을 하면서 신부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을 길을 찾는다.

 

자연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천부적인 명석함을 지닌 그는

신학교를 다 마치고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사제가 된 요한 보스코 신부(일반적으로 ‘돈보스코’라 부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로 인한 많은 혼란들이 있었다.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시골 출신의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의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보스코 신부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들을 돌보아주고 곁에 있어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면 정

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간파한다.

그리하여 보살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소년들을 위하여 ‘오라또리오’라 부르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마련해주고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주는 일을 시작한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소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일을 돕게 한다.

특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년들 가운데서 보다 성숙한 젊은이들이

보스코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보스코 신부는 마음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사랑했다.

 

초창기 오라또리오의 600명이 넘는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보스코 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스코 신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느껴지는 각별한 사랑의 친밀감으로 인하여 소년들은

보스코 신부를 ‘돈보스코’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삶을 의지하였다.

 

그래서, 처음 수도회 설립의 뜻을 젊은이들에게 밝혔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수도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파악하지도 않고 단지 돈보스코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칠 수 있다고 하면서 참여하였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1854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탄생되어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는다.

보스코 신부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이어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남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야간학교 등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동시에 2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이고,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안에 심은 대영성가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는 확신처럼

돈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보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에 선종한다.

그리고 1934년 부활절,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살레시오수도회홈에서)

 

 

Don Bosco의 예방교육
돈보스코는 청소년들을 참으로 사랑하였고 청소년들도 돈보스코를 사랑하였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나의 마지막 숨까지 다 바치겠다"는 열망으로 평범함 속에서 비범하게 이루어진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교육자에게 주어진 커다란 선물이다.

"예방교육"이란 청소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질과 역량을 모든 차원에서 일깨워 적극 장려함으로써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장시켜 진실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예방교육"은 온전하게 성숙한 인간,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이 '삶의 주역'이 되어 '삶을 축제'로 살아가는 행복한 인간을 양성해내는 교육여정이다.
이것은 선량함과 친근감, 기쁨과 신뢰, 사랑과 합리성이 깃든 교육 스타일이다.
그러므로 예방교육은 어떤 형태로든 강요와 억압,겉꾸밈,권위적 태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예방교육"은 돈보스코의 교육사상 전체와 연관되며, 전인교육의 근본 요청이다.
돈보스코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요청을 흡족하게 채워주고 존중해 주는 그의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청소년들을 내부로부터 재생시키는 길을 찾아 내었다.

그는 예리한 직관력과 독창적인 재능으로 청소년들의 깊은 염원을 복음적 가치 및 올바른 삶의 원칙들과 결부시킬 줄 알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교육의 천재, 교육학 방법론의 성인이라 부른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라고 자주 말한 돈보스코 예방교육법의 최고 원리이자 기본 패러다임은 '감응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방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내적인 에너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교육적 분위기 조성과 성숙한 '교육자의 현존'이라 할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홈에서)

 

 

요한 보스코의 교육 이론은 오늘날에도 학교에서 잘 활용될 수 있다.

그것은 신체적 처벌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잘못될 수 있는 상황을 배제함으로써

학생들의 행동을 선도하는 예방 조치이다.

그는 고해 성사를 자주 받고 영성체를 자주 하도록 권한다.

그는 학생들의 일과 공부 그리고 놀이에 영적 생활을 연결시키려 애쓰면서

교리 교육과 어버이의 훈육을 결합시켰다.

 

젊은 시절에 청소년과 어울려 일할 수 있는 사제가 되라는 권고를 받은 요한은

1841년에 토리노에서 서품을 받았다.

젊은이들에 대한 그의 봉사활동은 그가 가난한 고아 소년을 만나 첫영성체 준비를 시킬 때 시작되었다.

그때 그는 젊은 견습공들을 모아서 교리를 가르쳤다.

 

여직공들의 기숙사에서 지도 신부로 일하면서 그는 소년들을 위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기도원을 개설했다.

몇몇 부유하고 권세 있는 후원자들이 물질적 도움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소년들을 위한 두 개의 작업장을 마련하여 구두 만드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었다.

1856년 이르러 이 단체는 인원이 15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고,

종교 관계 팜플렛과 교리 교육 팜플렛을 찍어 내는 인쇄소까지 차렸다.

 

직업 교육과 출판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가 젊은 견습공들의 수호 성인이며,

가톨릭 출판업자들의 수호자로서 잘 맞는 것이다.

요한의 가르침에 대한 명성은 널리 퍼졌고

1850년에는 젊은 신부들을 보조자로 두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협력자들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1854년에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우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이름하에 서로 결속했다.

교황 비오9세의 격려를 받고 요한은 1859년에 17명으로 살레시오회를 창설했다.

 

 

그들의 활동은 교육과 선교 활동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나중에는 소녀들을 도와 주기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도 조직했다.

그는 1888년 1월 31일에 세상을 떠났고 1934년 비오11세께서 시성하였다.

 

요한 보스코는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인간성 그 전체를 교육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즉, 일, 공부, 놀이 등 모든 것에 가득히 스며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정도로서가 아니라 전적인 노력을 경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온전히 밑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요한 보스코는 재능과 능력을 살리는 직업 훈련과 자신감 그리고 긍지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따라서 그는 장사하는 기술에 관해서도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모든 교육은 하나의 철학을 가르친다.

그것이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제안이나 암시 또는 분위기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의 각 분야는 다른 모든 분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어떤 인생관을 갖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교육이 아니다.

(G,K 체스터턴)

-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861

 

1841년 사제로 서품된 뒤 가난한 젊은이들의 직업 교육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전문적인 능력과 기술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그들의 인생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신앙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 가난한 젊은이들의 모임이 전 세계적으로 퍼진 [살레시오회] 의 모체가 되었으며

1874년에는 마리아 동정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요한 보스코는 자신의 구제 사업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수도원을 창설하여 [살레시오 성 프란치 스꼬의 신심회] 라 이름지었습니다.

따라서 돈 보스코를 근대 사제의 이상형으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 손꼽습니다.

 

그는 정치적 문제에 까지 탁월한 조언을 했으며

교육 부문에 100여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오라토리오의 소년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돈보스코 (1861년)

 

1815년 토리노 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사제가 되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고

젊은 이들에게 기술 교육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가르치는 살레시오회를 창립했다.

 

신앙을 옹호하는 몇 개의 소품들을 남겼다. 1888년 세상을 떠났다.

 

 

오라토리오의 소년들과 어울려 있는

돈보스코 (1861)

 

성 요한 보스꼬 사제의 편지에서

(Epistolario, Torino, 1959, 4,201-203)

 

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생도들의 참된 행복을 찾고 그들이 생활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인도해 주고 싶다면,

우리는 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부모를 대리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비단 나만이 아니고 살레시오회의 회원 전체가 그렇게 했습니다.

 

자녀들이여, 나는 나의 긴 생활을 통해서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얼마나 자주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은 더 쉽고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겠습니다.

즉, 참아 내지 못하고 오만한 성격을 지닌 우리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생도들을 참아 주면서

엄중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는 것보다 벌을 주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성 바울로가 초심자들에 대해 지녔던 그 사랑을 나는 여러분에게 천거합니다.

바올로 사도는 그들이 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랑은 바울로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에게 권고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체 못하는 분노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를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벌을 줄때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거나 또는 분노를 폭발시키려고 행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필요하게 되는 그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한 힘든 일입니다.

 

우리 권하에 있는 이들을 우리 자녀로써 바라보도록 합시다.

명령하러 오시지 않고 순종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지배한다는 그런 인상 마저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대하신 방법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은 무지하고 예의를 모르고 불충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도 자비와 애정 어린 지극한 친밀성으로 대하셨습니다.

 

그것을 본어떤 이들에겐 놀라움이 되었고 또 어떤 이들에겐 걸림돌이 되었지만

한편 다른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생도들이 진정 우리의 자녀라면 그들의 잘못을 고쳐 줄때,

우리는 온갖 분노를 재거해 버리거나 분노를 완전히 제어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로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여 주거나

또는 마음 상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잘못을 고쳐 주고 다 잘되게 해주는 참된 부무들처럼 지금은 자비를 베풀고

미래에는 희망을 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문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리는 것보다는 겸손과 항구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릴 때 그말을 듣는 사람에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

(가톨릭홈에서)

 

1865-68.

 

이탈리아의 피에드몬트, 베치에서 가난한 부모 사이에 태어난 요한은 2살 때 부친을 잃고,

16세 때 치에티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또리노에서 학업을 계속한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요셉 카파쏘 신부의 격려로 토리노에서 고아들과 함께 일을 시작하다가,

1844년 그곳에 세워진 소녀들을 위한 성녀 필로메나 고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자,

그 부지 내에 소년들을 위한 집도 마련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이 너무나 규율을 어기고 불량배들처럼 되어가자, 한 때 그는 원장직으로부터 사임을 권고받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는 그 직책을 사임하고, 어머니와 함게 버림받은 소년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는 그 소년들을 위한 집과 학교를 세웠고, 교육을 실시하다가,

1856년에는 150명으로 불어나자,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500명이 넘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다른 보금자리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발전을 주도 면밀하게 관찰하여 대응하였고, 그들의 개성과 신앙을 격려하여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길러내었다.

 

1865-68

 

이 사업이 날로 확대되자, 그는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사랑을 설교하러 다녔으며, 유명한 저서를 저술하였다.

수많은 도움을 베풀기 위하여 그는 살레시오회를 세워야 하였다.

이 회는 1859년, 비오 9세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나, 1884년까지는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고 활동하였다.

 

그의 임종시에는 64개의 살레시오 수도회가 있었고, 유럽과 아메리카로 확대되었으며,

약 800명의 살레시안 사제들이 활동하였다.

1872년, 그는 크리스챤의 도움이신 성모 수녀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삶들과 버림받은 소녀들을 돌보게 하였고,

살레시안 협력자들이라 부르는 3회가 뒤따랐다.

 

그는 1888년 1월 31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편집과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부산교구홈에서)

 

 

 

1867

 

이탈리아의 토리노에는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기록된 한 무덤이 있다.

비명(碑銘)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그 밑에 묻혀 계시는 분이야말로 무수한 고아의 아버지로 공경을 받는 성 요한 보스코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는 이는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교회의 내외에 어떤 위험한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어느 성인을 보내셔서 그 위험을 선처하시고

아무리 반대자가 주님의 계획을 파괴하려고 해도 결국 실현케 하시는 것이 상례이다.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북 이탈리아의 토리노 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의 작은 마을 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란치스코 루이지라는 분으로 근면하고 조심성 있는 독실한 신자였고,

어머니는 마르가리타로서 역시 모든 선덕을 구비한 신심 깊은 부인이었다.

 

그런데 이 가정은 물질적 면으로는 겨우 그날의 생활을 이어나갈 정도였지만,

정신적 면으로는 극히 혜택을 받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뜻밖에 감기로 급성폐렴에 걸려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임종시에 유언한

’자녀들을 부탁하오. 특히 어린 요한을..."이라는 말을 언제든지 잊지 않고

요한을 훌륭한 인물로 양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했다.

 

1870

 

그녀의 교육에 대한 열성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마르가리타만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어머니들의 모범이다."하며 늘 칭찬하는 정도였다.

몇 해 후에 요한 보스코가 아동 교육에 성공을 한 것도

본래는 훌륭한 어머니의 감화가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를 잘 선도한 힘은 물로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그는 후에 하느님께 특별한 사명을 위탁받으리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기이한 일로 예측되어 있었다.

 

예컨데 9세 때 그는 처음으로 주 예수의 발현을 보고

성모 마리아를 지도자로 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을 들었는데,

실제로 후일 예상한 것 이상으로 대성공을 하고,

또 그가 창립한 살레시오회의 경탄할 만한 신속한 발전을 생각할때에

성모의 도움이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고 요한 보스코 자신이 고백하고 있다.

 

요한 보스코는 성모께 무한한 신뢰를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은총의 인도로 몸을 수련하고 덕행의 길로 매진했다.

그는 극기 금욕의 생활을 즐겁게 하면서도 항상 쾌활하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끔 아이들을 위하여

스스로 줄넘기나 장난을 해 주는 때도 있으나 사람들의 영혼을 점점 더 귀중히 생각하며

소년 시대부터 사제가 되려고 굳게 결심한 바가 있었다.

 

 

오라토리오의 악대. 돈보스코는

"음악없는 오라토리오는 영혼 없는 육신이다." 라고 말했다(1870)

 

 

가정이 구차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할 수가 없어서

어느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우게 되었으나 이것조차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종종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12세부터 14세까지의 2년간을 숙부의 집안에서 일을 도우며 지낸 것도 그 한 예이다.

숙부는 요한의 경건한 마음과 그의 뜻을 깨닫고

돈 가로소라는 성인같은 한 사제에게 위탁하고 그를 공부시키게 했다.

그러나 가로소 신부는 오래지 않아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요한은 그때 돌연한 그의 죽음에 아무 유언을 들을 사이도 없이

다만 스승한테 받게 된 것은 한 개의 손금고(手金庫)와 그의 열쇠 뿐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주려는 의사였을 것인가? 적어도 가로소 신부의 조카되는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요한 보스코는 ’나에게는 현세의 보배는 필요없습니다.

천국만을 잃지 않으며 그것으로 만족합니다"하며 끝끝내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 후 부터 그는 공부를 계속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서야 그는 천부적 재주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뛰어난 좋은 성적을 올리고,

1835년에 신학교에 입학해 전부터 절실히 원하던 것을 실현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신학교에서 6년간 철학과 신학을 연마하는 동안 그는 얼마나 덕행의 길에 힘썼는지!

그러나 겸손한 그는 될수 있는대로 겉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힘썼다.

 

요한이 바야흐로 사제 서품을 받게 된 것은 1841년 4월 5일이었다.

세라핌적 사랑으로 첫 미사를 봉헌한 그는 점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높아질 뿐이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그의 미사에 참여하려고 먼길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첫 미사때,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즐거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훈계했다.

 

"너도 오늘부터 하느님의 것이 되었지만 사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라.

지금은 이 말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오늘 부터는 내 일은 염려하지 말고 너는 다만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일해라.

나는 네가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제는 만족이다..."

 

이와 같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이 후에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된 것도 생각하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그에게는 토리노에 성 요셉 카파소,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는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그의 사명을 재빨리 알아채고 박애 사업에 일생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요한은 그 충고에 순응해 즉시 가련한 고아들을 모아 아버지가 되어 교리를 가르쳐주고,

혹은 기술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아직 고아원도 없어서 그들은 요한과 그의 어머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토리노의 사람들에게 "요한 보스코의 왈패자식들"이라고 불렸지만

덕망이 많은 성인의 감화를 받고서 모두 온순한 아이들이 되었다.

요한 보스코는 또한 토리노에 있는 양로원이나 자혜병원,

형무소까지도 방문하고 거기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다.

 

1864년에 고아원이 건설된 후부터 수용한 아이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아이들에게 대하여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신기한 힘을 가진 것처럼

아무리 왈패인 아이라도 자유롭게 통솔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에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과 같이 사제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다.

정직한 그는 악인의 원한을 사게 되어 전후 일곱 번이나 살해될 뻔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어디선가 사나운 개가 나타나서 악인에게 달려드는 등

기이한 일이 일어나서 환난을 면할 수가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그 사업의 계속되는 발전을 위한 한 수도원을 창설해

’살레시오 성 프란치스코의 신심회’하고 이름지어

1859년 12월 18일 제자 몇명을 데리고 교황 비오 9세를 알현하고 그 인가를 청했다.

다시 1875년 8월 5일에는 살레시오 수녀원도 창설했다.

 

이 두 수도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베풀어

천국의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고 또 직업을 줌으로써 현세의 행복까지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수도원이 얼마나 사회에 유익이 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는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교황 레오 13세가 요한 보스코를 향해

’전 세계 교회는 당신을, 당신의 사업을,

당신의 수도원을 우러러보며 다만 탄복할 따름입니다"하고 말한 것도 결코 과분한 칭찬이 아니다.

 

성인은 1888년 1월 31일 아침 삼종소리가 날 때 교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많은 공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고, 오늘날도 그 위대한 사업은 그의 애제자인

살레시오 회원의 손으로 훌륭히 계속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수도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꿈]

 

예언적인 꿈은 우리가 보통 꾸는 꿈과는 달리 미래의 방향을 알려 주고

우리의 희망과 열정과 목표를 보여 준다.

요한 보스코는 예언적인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그는 9살 때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가난한 소년들을 도와 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꿈을 꾸었다.

꿈은 줄곧 그의 일생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는 꿈을 통해서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소년들의 영혼 상태를 식별하기도 하고

새로운 계획과 선교에 관한 전망을 얻기도 하였다.

요한 보스코에게는 언제나 자금이 충분치 않았지만

하느님이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을 시작하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재원이 마련되곤 했다.

 

하느님은 그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셨다.

요한 보스코의 꿈처럼 예언적이지는 않더라도 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준다.

 

관심을 갖고 꿈을 잘 살펴보면 잠재되어 있는 깊은 열망이나 포부를 알아낼 수도 있다.

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암시해 주기도 하며,

숨은 잠재력을 깨워 주기도 하고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별히 예언적인 꿈을 꾸어 본 적이 있는가?

꿈은 때로 잠재 의식을 반영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이) Societa’ di san Francisco Salesio

(영) The Society of St. Francis De Sales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성인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사도적 사명감과 고귀한 정신에 감명되어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로 하였다고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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