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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히뽈리투스에 대해서

2 장위동 [jangwi] 2007-01-15

교부들의 가르침: 로마의 히폴리투스

 

최초의 대립교황이었던 성 히폴리투스

초세기 교회생활 담은 '사도전승' 펴내

 

 

초세기부터 로마 교회는 다른 지역 교회들과 형제적인 친교를 이루면서 사랑과 일치의 구심점이 되어 왔다. 베드로와 바울로 사도가 직접 로마에서 선교하였고, 마침내 그곳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때문에, 로마 교회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모든 자매 교회들의 맏언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누리던 사랑과 친교의 으뜸 역할이란, 오늘날과 같은 법적이고 제도적인 수위권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로마 교회는 신학적으로도 교부 시대를 통틀어 매우 뒤떨어진 교회였다.

 

 

로마의 첫 신학자

 

오히려, 서방 신학의 중심지는 로마가 아니라 북아프리카였다.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지중해를 끼고 있던 북아프리카 교회는 정치, 종교, 군사, 문화에 있어서 로마에 버금가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바로 테르툴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위대한 교부들이 그리스도교 신학을 활짝 꽃피웠다. 그밖에도 캅파도키아(오늘날의 터어키), 알렉산드리아(오늘날의 이집트), 안티오키아(오늘날의 시리아) 등지에서 신학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4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교부학의 황금시대」를 열었지만, 그때까지도 로마 교회는 다른 교회들의 신학 수준을 따라잡기는커녕, 내세울만한 신학자 한 명 배출하지 못한 채, 이단논쟁에조차 제대로 끼어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로마 교회의 체면을 살려준 교부가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히폴리투스이다.

 

 

엄격주의와 관용주의의 대결

 

히폴리투스는 로마 교회의 신부로서,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너나할 것 없이 인정하는 강력한 차기 교황 후보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제피리누스 교황이 세상을 떠나자 칼리스투스 부제가 로마의 주교로 뽑혔다. 칼리스투스는 노예 출신의 부제로서 로마 성밖에 있는 지하 공동 묘지를 관리하던 사람이었다. 히폴리투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히폴리투스는 끊임없이 칼리스투스의 사목 노선을 비판하면서 날카롭게 대립하게 된다. 칼리스투스 교황(217~222년 재위)은 참회 예식과 죄의 용서에 있어서 너그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히폴리투스는 칼리스투스의 관용적인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교황이 교회의 규율을 흐트러뜨린다고 헐뜯으며, 스스로 엄격주의 노선을 취하였다. 히폴리투스는 엄격한 참회 조건을 채우지 못한 신자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노아의 방주에는 더러운 짐승들이 없었듯이, 교회 안에도 죄인들이 들어올 수 없으며, 교회란 모름지기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만의 공동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의 상반된 노선은 오늘날까지도 교회 안에서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엄격주의와 관용주의라는 두 물줄기의 원류(原流)가 되었다. 그러나, 2000년 교회사에서 '거룩하고 순결한 사람들만의 교회'를 주장한 엄격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이단이나 열교(裂敎)에 빠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죄인, 세리, 창녀, 병자들을 불러모아 당신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이다.

 

 

첫 대립 교황의 탄생

 

불행하게도 히폴리투스는 논쟁에서만 머물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지지자들을 끌어 모아 교회를 세우고, 자기야말로 로마의 진짜 주교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대립 교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칼리스투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로마 안에는 적어도 13년 이상 이른바 두 교황이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는 폰티아누스 교황(230~235년 재위)과 히폴리투스 대립 교황(217~235년 재위)을 둘 다 사르데냐 섬으로 귀양 보냈다. 그들은 유배지에서 죽기 전에야 비로소 화해했다. 이 두 분의 유해는 얼마 후 로마에 함께 옮겨져서 한날 한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 묻혔다.

 

 

사도 전승의 전수자

 

히폴리투스의 대표작은 "사도 전승"이다. 이 책은 초세기 교회 생활, 특히 전례와 성직 계급에 관한 규정들을 담고 있는 교회 규정집이다. 예컨대, 오늘날 미사 때 사제가 드리는 감사기도(거룩하신 아버지,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함이…)는 바로 이 문헌에 보존되어 있다. 그밖에도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주교, 사제, 부제 서품 예식 기도문과 규정은 거의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에서 따온 것들이다. 이처럼 초세기 교회의 관행과 규정들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보면, "사도 전승"은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생생한 복음과, 예수님께서 그토록 비난하셨던 율법주의를 뒤섞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축복 예식에 관한 규정에서 "소출들, 곧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배, 사과, 오디, 복숭아, 버찌, 편도 열매, 자두는 축복할 것이나, 수박, 멜론, 참외, 양파, 마늘, 그리고 다른 채소들은 축복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꽃들도 봉헌할 것이니, 장미와 백합은 봉헌하되 다른 것들은 봉헌하지 말 것이다"(32장) 라고 가르치고 있다. 유다교의 율법주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규정집이란 교회 공동체의 관행과 전승을 담아내는 그릇에 지나지 않을 뿐 세월 속에서 변화하게 마련이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계명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 진다.

 

가톨릭 교회의 첫 대립교황으로서, 완고한 엄격주의 노선의 선구자였던 히폴리투스! 이상하게도 우리 교회는 아직도 해마다 8월 13일이 되면 히폴리투스를 성인으로 기리고 있다.

 

※ 우리말 번역 : 히폴리투스,「사도 전승」, 이형우 역주, 분도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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