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강론
- 연중 14 주일(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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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양권식 [ysimeon] 2008-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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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4 주일(가해)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 본래는 7월 5일 어제였지만 모든 본당신자들이 함께 이 축일을 봉축할 수 있도록, 하루를 늦추어 주일인 오늘 지내고 있습니다.김대건 신부님께서는 1821년에 충청도에서 태어나셨고, 15세인 1836년에 중국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45년 8월 17일에 사제서품을 받으셨으며, 1846년 9월 16일에 순교하시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주여, 이 가련한 조선을 버리지 마시고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른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올리시고 ‘이제 나도 준비가 다 되었으니 치라’는 말씀과 함께 순교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오르셨으며, 1984년 5월 6일에 시성 되셨습니다. 비록 그분의 생애는 짧았었지만, 그분이 한국천주교회에 끼친 신앙적 유산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성인으로 받들어 모실 만큼 위대하였습니다.김대건 신부님은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시며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셨습니다.“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잘 생각하여 주십시오.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사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을 참아 받으셨습니다. 그 고난으로써 성교회는 세워지고, 이 성교회도 십자가와 많은 고난 속에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에 의하면 천주는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일일이 헤아리고 계시어서, 그 한가락이라도 하락하심이 없이는 빠져 떨어져 버리는 일이 없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의 뜻에 따라 우리들의 머리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편이 되어 세속의 마귀에 대해서 항상 싸워 나갑시다. 이러한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이오니, 용감한 군사와도 같이 씩씩하게 무장하고 전장에 뛰어나가 분투하여 승리를 거둡시다. 특히 서로와의 사이에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돕고 서로 베풀어서 천주께서 당신들에게 자비를 내리시고 당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를 기다립시다. 재앙을 겁내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천주를 섬기는 데서 물러나지 말고 오로지 성인들의 자취를 밟아서 성교회의 영광을 높이고 주의 충실한 병사이며 참된 시민임을 증명하여 주시오. 사랑을 잊지 마시오. 서로 참고 도와서 천주께서 당신들을 불쌍히 여기실 때를 기다리시오. 쓰고 싶은 것은 많으나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생각대로 되지 않으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나도 천국에서 그대들과 같이 만나 영원한 복을 즐기게 될 것을 바라고 있소. 그대들을 정답게 껴안아 주겠소. 다시 한마디 하고자 하오. 이 세상의 일은 모두 천주의 명령에 말미암은 것이오니, 어떻게 보면 상이냐 벌이냐 하는 것뿐이오. 박해라는 것도 천주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일어나는 게 아니오. 마땅히 천주를 위하여 힘차게 참아 주시오. 오직 성교회에 평화를 주십사 고 눈물로써 탄원하시오, 나의 죽음은 당신들에게 확실히 뼈아픈 일일 것이오. 당신들의 영혼은 슬픔에 잠길 것이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주께서 나보다도 훨씬 훌륭한 목자를 주실 것이 틀림없으니, 그리 몹시 슬퍼 마시고 큰사랑을 가지고 천주를 섬기도록 힘쓰시오. 없음으로써 한 몸 한 마음이 됩시다. 그렇게 하면 죽은 후 영원히 주 앞에서 서로 만나 끝없는 즐거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요. 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를 바랍니다. 김 안드레아 신부.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신자들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성인으로 모시고 있음을 정말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성인의 강직하고 고결한 순교 정신을 본받아 세속적인 유혹과 온갖 시련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김대건 신부님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교훈은 바로 이러한 순교의 정신입니다. 순교란 바로 하느님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영광입니다. 또한 순교는 하느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벗어버릴 때, 내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때에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은 우리에게 순교를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순교가 있겠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박해보다 더 무서운 박해가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엔 ‘경제 살리기’가 마치 우상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우리는 경제만 나아진다면 사회정의나 복지 그리고 도덕과 진실 등은 유보하고 살아가려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경제가 나아진다면 뭐든지 먹을 수 있고, 먹고 사는데 장애가 된다면 낙태도 서슴지 않을 것이며, 보수가 좋은 직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 애들을 어디든 보낼 각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없이 살아온 지난날의 아픈 경험들이 우리로 하여금 해선 안 될 결정을 하게 하였습니다. 물질은 우리의 영혼을 나약하게 만들고, 나태하게 합니다. 물질이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려 하고, 편리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교만과 쾌락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 수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들로부터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하느님께 내 모든 것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또 다른 의미의 순교입니다.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욕심은 경쟁을 불러오고, 규칙 없는 경쟁은 마치 전쟁과 같이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경쟁에서 낙오되면 이제는 가족과 이웃마저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없이 치열하고 피곤한 경쟁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부지불식간에 선택한 경쟁의 현실에서 낙오되거나 빠져 나오기란 힘들고 두려운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경쟁에서 빠져 나온 다는 것은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순교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바로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나 아무도 죽기를 각오하는 순교를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강론을 하고 있는 저도, 순교하신 순교선열들도, 나아가 하느님마저도 우리에게 당장 가족도 버리고 장렬하게 죽으라는 것을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한 순교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희생들일 것입니다. 욕심을 조금씩 줄이는 것과 같은 작은 순교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웃을 배려하여 절제하고, 타인을 위해 조신하게 살아가는 작은 희생들을 통하여 순교자적 삶을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희생들이 우리를 하느님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초등학교 3학년과 6학년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는데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었답니다. 피를 너무 흘려 살기가 어렵다는 의사의 말에 아버지는 자신의 피를 주겠다고 했지만, 아들의 피가 ‘RH-’라는 흔하지 않은 피여서 아버지나 어머니와는 맞지 않았으며 병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답니다. 그런데 마침 동생의 피가 형과 같아서 초등하교 3학년생인 동생의 몸에서 피를 뽑아야 할 상황이 되었답니다. 아버지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준식아, 네 형이 죽어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단다. 내 피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어 안타깝구나. 네가 형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그러면 형이 살아날 수 있단다.” 한참을 생각하고 아버지와 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준식이는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서 간호사는 피를 뽑았답니다. 그런데 피를 뽑은 동생은 이제 되었으니 일어나도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도 가만히 누워만 있더랍니다. 그래서 “일어나라니까!”라고 말하자, 아이는“아빠, 나 언제 죽어?”하고 반문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빠는 아들에게 물었답니다. “뭐야? 네 피를 형에게 주면 너는 죽고 형은 살아나는 줄 알았어?”하고 묻자 아이는 “응.”하고 대답하더랍니다. 그 대답에 기가 막힌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살면서 이러한 순교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절제 없는 우리의 닫힌 마음 때문에 보지 못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들의 부모님, 형제들, 그리고 이웃과 동료들 안에서 우리는 이런 순교를 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 상태에 따라 우리 신자들 안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같은 순교자들을 매일 볼 수 있다고 믿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