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20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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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양권식 [ysimeon] 200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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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0 주일 (가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20 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주는 교훈은 구원의 보편성과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과의 대화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게 자기 딸을 고쳐 달라며 자비를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다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예수님에게 다가와 엎드려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대단히 모욕적인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또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인의 딸은 나았다고 오늘의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활동하셨지만 종종 이방지역으로 가셔서 이방인을 상대로 전도하시기도 했습니다. 티로와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 공화국에 속해 있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시리아에 속했던 전형적인 이방도시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팔레스티나로 옮겨와 정착하기 전, 그 땅의 원주민입니다. 기원전 1200 년경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무력으로 그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오늘 중동에서 일어나는 팔레스티나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쟁은 그때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티나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들을 멸시하고 강아지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선입견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의 것입니다. 이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교도 여인의 딸을 고치신 이야기를 마르코복음서(7,24-30)에서 옮겨 적으면서, 유대교적 해석이 더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유대교가 가진 자폐적 선민(選民)의식, 곧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우월감을 가미한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위해 오신 분이고,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자비의 혜택을 얻기 내기 위해서 그 정도의 수모는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에게 전혀 자비롭지 않습니다. 자비를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비를 거절하실 뿐 아니라, 다가와 엎드려 간청하자, 강아지라는 모욕적인 단어까지 사용하여 거절하셨습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간청합니다. 자존심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마태오 공동체의 유대교적 사고방식이 반영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그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과감한 행동에 찬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청을 들어주어 딸을 고치고, 그 여인을 칭찬하시지 않았다면,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복음서에 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타민족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자세에 동조하지는 않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라 생각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은 민족의 차이를 넘어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복음 선포에 나섰을 때, 그들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타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한 것은 타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개방적 자세를 그들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기억을 되살려서 유대인과 이교도를 차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며 신앙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프랑스 제정시대에, 두 번이나 어긴 한 병사가 군법을 어겨, 사형을 선고 받고 죽게 되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병사의 어머니는 급히 나폴레옹을 찾아가,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네 아들은 두 번이나 큰 잘못을 범했으므로 자비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 했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폐하, 제 아들이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닐 것입니다. 자비란 용서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저는 바로 그런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자비는 무슨 조건을 달고 행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 주는 것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비로운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보다도 훨씬 더 큰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인종과 신분의 차별 없이, 선인과 악인의 구분 없이 모두에게 자비로우신 것입니다.
오늘 가나안의 한 여인은 예수님에게 간절히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딸이 몹쓸 병에 시달리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정말로 딸을 낳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지극한 모성애와 오직 예수님만이 낫게 해 줄 수 있다는 간곡한 믿음이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감동을 받으셨고 그 딸은 병이 나았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간절히 청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가나안 여인의 기도와 우리공동체의 성전건립을 위한 기도를 함께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3월부터 우리 공동체의 오래된 소망인 성전건립을 위한 기도를 받치고 있었으며, 성전건립을 위한 지향을 가지고 묵주기도 100만단 기도를 받쳤습니다. 의도하자 않았지만 엊그제 성모승천 대축일을 전후해서 100만단을 이룩했습니다. 놀랍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칭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 공동체의 믿음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딸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가 예수님께 받아들여지고, 어머니의 믿음이 딸을 낳게 하듯이 우리의 기도와 믿음이 우리를 낳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거쳐 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어 우리 모두를 당신의 성전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공동체를 이룰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전, 또한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성전건립을 위한 땅도 구하지 못하고, 돈도 없지만, 기도를 통하여 그 이전에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