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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강론
연중 25주일 ― 성 김대건과 성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

196 양권식 [ysimeon] 2008-09-20

연중 25주일 ― 성 김대건과 성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25주일이며 동시에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9 20일을 대축일로 정하여 우리 교회의 103위 성인의 성덕을 기립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정착하기까지는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예수회의 세스페데스 신부는 경상남도 진해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선교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합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중국 선양에서 볼모로 있던 소현 세자 역시 천주교를 접하고 호감을 가졌지만, 그의 죽음으로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18세기 말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학자들 몇 몇이 학문적 차원에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마태오 릿지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로 이해하고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조상에 대한 예를 중시하던 유교사회에서 박해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신해박해(1791)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 때까지 1만여 명이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순교하게 됩니다. 그분들 가운데 103위가 1984년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되었습니다. 103위 성인의 순교의 얼을 본받고, 그들의 정신을 일상생활의 구체적 삶 속에서 실천에 옮기려는 뜻에서 9 26일에 지내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은 9 20일로 옮겨져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순교란 어원적으로 ‘증거’를 뜻합니다. 즉 진리를 위해 피로써 증거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200여 년 전 이 땅에서 숨져 간수만 명의 순교자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원칙적인 삶을 살다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분들이며, 그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거한 사람들입니다. 13세 소년에서부터 80 노령이 이르기까지 목숨을 걸고 진리를 증거한 분들입니다. 나이도 어리고 무지몽매하기 짝 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위와 신분, 재산과 안녕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더 나아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삶의 원칙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증거한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를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죽음 이후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었을까 아니면 광신적 종말론에 현혹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불합리한 현세에 대한 반발 심리였을까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도대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신앙의 순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생사를 초월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삶의 또 다른 면을 보는 눈입니다. 감각적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자기를 버린 사람만이 느낄 수 있고, 목숨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앙의 눈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신앙은 결국 이치를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해야만 이 얻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의 깨달음입니다. 동양에서 ‘도’를 깨닫기 위해 ‘출가’의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는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희생을 해 본 사람만이,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 역시 현세의 편안함과 안락을 스스로 버릴 각오와 경험을 지닌 사람만이 죽음을 뛰어넘는 순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진리란 깨달음의 대상이지 파악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거나, 현세에 대한 미련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덕을 가르쳐 준다 할지라도 신앙을 알 수 없습니다. 자식을 낳아 보아야 어버이의 사랑을 알고, 당해 보아야 아픔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제가 아는 교우 중에 35일간을 단식한 형제님이 한 분 계십니다. 단식이란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고 오로지 물과 소금만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단식은 굶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끊으면서 욕심을 끊어내는 작업이 함께 하기 때문에 단식은 곧 단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30일 넘게 단식을 하는 일은 죽기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생명의 동력인 음식을 섭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으려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몸 스스로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며, 이 몸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긴 시간 동안의 단식을 시행한 그 형제님은 말했습니다. 몸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몸의 주인이며, 몸을 지닌 인간은 주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임을 깨닫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기쁨을 느껴 본 사람은 참된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며, 참된 기쁨이 아닌 헛된 기쁨의 허망함을 알기에 그것에 맛 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음식의 참 맛을 아는 사람은 조미료나 양념에 현혹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신앙 때문에 생명을 버릴 수 있을까 의심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만이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순교자의 축일에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공동체와 국가를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더 깊게 생각해 보게 합니다. 시류에 떠밀려 부표처럼 목적의식 없이 살거나, 생각 없이 편한 대로 살거나, 하고 싶은 대로 자기 기준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결코 신앙인일 수 없습니다. 설사 고통이 있고, 비난을 듣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못살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너무 쉽게 핑계를 대면서 원칙을 포기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이 뒤죽박죽 되는 것입니다. 똑똑하다는 사람일수록 핑계를 잘 대고, 합리화도 잘해서 원칙을 뒤집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고픈 일을 다 하며 살아가지만 왜 사는지 모르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현세적 이익이나 출세에 골몰한 사람이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또 순교자들의 공덕을 노래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노력 없이 출세한 후손이 부모들의 묘를 장식하고 기념비를 세운다 한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뽐내거나 보신에 불과한 것이듯이 이웃에 대한 희생 없이, 정의를 실천하려는 각오 없이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위선이며 공염불일 뿐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순교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원칙을 지키는 것, 편법을 쓰지 않는 것,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하는 자세와 각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또 아픔을 맞보게 된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순교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안에서 원칙을 지키며 살 것을 명령하시고, 원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증거하는 일이며, 동시에 순교의 삶인 것입니다.

말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한 이때에 말없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살아있는 순교자들을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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