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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동본당 여명기(고 김재환 바오로)

3 김재근 [rootkim44] 2002-07-21

                    대방동 성당의 여명기

                                  

            - 고 김재환 바오로 회장의 생전증언 녹취록 -

                                               녹취자 김재근

 

(아래 기록은 고인이 작고하시기 전 일 주일 쯤 녹취자에게 넘겨준 카세트 녹음테이프 한 장을 녹취한 것입니다. 고인의 음성 그대로 재생하였기 때문에 표준말이 아니거나 어휘가 중복되는 경우가 더러 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가 완성되면 직접 음성으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간에 붙여진 소제목은 독자를 위하여 녹취자가 임의로 삽입한 것입니다.)

 

 

전사: 배경과 동기

 

  대방동 성당 얘기를 하려니까 그 동기부터 얘기를 해야만 그게 나오거든? 그래서 그 동기를 얘기하자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이제 도림동 성당에서 청년회를 하고 성가대니 뭐니 뭐 아무것도 모르긴 모르지만 뭐 하느라고 쫓아다니며 했거든. 그런데 청년회를 하는데 그때는 어떻게 됐냐면

영등포 성당에 성당이 하나 있고 김포니, 시흥이니 뭐 다 그 영등포 성당 관할이야. 하여간 서울 성당은 혜화동, 중림동, 명동, 그리고 용산은 신학교 성당, 그거 밖에 없었거든? 그래 영등포는 중림동 성당 공소였었어. 그런데 도림동 성당에서 인제 내가 열심히 뛰고 그랬는데, 청년회를 그때는 - 지금은 구역회장이 있고 반장이 있고 사목위원이 있고 그랬지만, - 그때는 뭐 회장이라는 게 그 구역 구역에 경향잡지 갖다 돌려주고, 돈 받고 교무금 받고, 뭐 심부름 성당의 심부름 하고 성당에 좀 열심히 나오고 한 사람은 다 회장이야. 그냥. 그 구역 회장이라 그랬어. 지금은 구역장이지만 그 때는 그냥 구역회장이었거든?

그런데 청년회를 하는데, 그 때는 공심재가 지금은 식사한 뒤 한 시간 있다 성체 영하면 되지만 그 때는 밤 열두시서부터 그 이튿날 성체 영할 때가지 물도 못 먹었어요. 물도 못 먹고, 이렇게 공심재를 지키거든? 그러니까 10시  미사니까는 그 때 10시 미사 공심재 지키고 성체 영하려고 나왔다가 배도 고프고 또 웬 공장에 댕기는 사람들은 그 때는 뭐 다 수준이 얕았지. 지금 같으면 다 대학 졸업하고 뭐 지금 그렇지만 그 때는 시골서 전부 와서 공장 취직하고 나같이 수준이 얕은 사람들만 있었는데, 근데 청년회를 할랴니까 참 뿔뿔이 전부 달아나. 문이 저쪽에 있고 이쪽에 있고 두 군데 있었는데, 이거 안 되겠어. 그래서 나하고 몇 몇 사람이 문간에 가서 지키고  있다가선 막 붙들어 들이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억지로 모이는거지. 한껏 모여야 겨우 열댓 명. 그저 이십 명도 못 모여. 그렇게 청년회를 하다 보니깐 배가 고파서 그러나 보다하고 그때는 내가 생활이 좀 딴 사람들보다 식량이 부족해서 그냥 쩔쩔 맬 땐데 나는 그래도 그렇지 않았거든?

 

청년회 구역분회 조직-분회장 역임- 활성화

 

해서 내가 김밥을 해서 가지고 가서 점심 준비가 됐으니까 점심하고 회의하고 가라고.   

그래도 조금 낫긴 나아. 그래도 일주일 동안 일하고 일주일 동안 하루 노는데, 자기 다 스케쥴 있잖아?

다 뿔뿔이 헤어지는데 영 그때 청년 해당자가 한 200명이야. 200명이고 교우가 영등포 전체 교우가 4천명 밖에 안 될 때여. 근데 이렇게 청년회를 그렇게 하다보니 가만히 내가 생각을 해서 뭘 생각한고 하니, “자 청년회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니까 구역별로 구역분회를 만들자. 구역분회를 맹글어 가지고 구역에서 고 동네니까, 저녁 먹고 모이면 다 모일 수 있지 않냐?” 그래가지고 그 분회를 결성해 가지고 이 본당에서는 원 본회를 어떻게 하냐면 각 분회의 분회장도 있을 거고 서기도 있을 거구, 부분회장 간부가 있을 거 아냐? 그럼 간부가 교대로 그렇게 하면 본당회도 인원이 좀 많이 참석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 한 사람씩만 교대로 나와서 참석해서 본부에서 결의사항 같은 것 이런 것을 구역으로 분회에 가서 전달하고 그렇게 하면 몇 백 명 모이는 회가 되는 거 아니냐. 하니까 “아 참 전부 그거 좋다구” 다 찬성을 했어. 그래서 내가 제안한 거니까 내가 솔선수범해서 내가 대방동 네 거리에서 있었는데 구멍가게를 했었거든. 근데 자전거도 있고 했으니까, 그 때 청년이 다 해야 한 20명 될까 말까 했어. 한데 대방동 그 때 강당식 성당 지을 무렵도 130명인가 밖에 안됐어. 대방동 교우가. 전체 교우가 나중에 성당 짓고선 신길동인가 다 떼어 주었어. 교우가 늘어났지. 그래서 청년회 분회를 내가 결성해가지고 내가 했으니까 내가 소위 자진 분회장이 됐지. 분회장이 돼 가지고선 회를 한 달에 한번도 하고 일주일에 한번도 하고 가끔 한달에 몇 번씩 회의를 하는데, 우리 집에서. 우리 집에서 회의를 했거든? 회의를 하는데 안 오면 내가 자전거를 타고 쫓아가서 나오라고 그러니까 성적이 열댓 명 이십 명 어쩔 땐 다 모인적도 있어. 그러면 이 구역에서 열다섯 명만 모여도 그 얼마야. 그럼 각 구역에 그만큼씩만 모이면 참 큰 회합이 된단 말이야. 그런데 다른 데는 다 좋다고 그래 놓고서는 한두 달 하다말고 다 흐지부지하고 말았어.

 

회관확보의 필요성 절실

 

근데 나는 계속해서 내가 주동을 했으니까 안나오면 자전거를 타고 쫓아가서 모이고 해가지고 하는데, 그 때만 해도 자 무슨 토담집이라도 하나 해서 어떤 모임 장소를 하나 맹그러야지. 이거 안 되겠다. 인자 그런 생각을 했었어. 우리 집에서 모이다 보니까. 그런데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하니까, 지금 구 성당 앞에 그 마당이 있는데 그전에 성모 유치원이 처음에 있었거든? 근데 보면서 아이 요런 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늘 그랬거든? 내가

[기자: 유치원이요?]

[김회장:] 아니야 있다 다 얘기가 나와. 유치원 얘기도. 있으면 좋겠다 좋겠다 그랬는데, 그러다가 청년회를 하고 청년회에서 친목회를 해서 야유회도 가고 인제 늘 그랬었어요. 그랬는데 인제 6.25가 터졌어.

[기자: 처음에 모였던 해는?]

[김회장] 연조가 해방 되가지고 와가지고서는 내가 거기 있어 가면서 차차차차 사람이 연조가 해방 후서부터  내가 거기 가서 일을 해서 사람들이 해방 직전 그전까지도 1.2년 아니 6.25 전 1.2년 전 더 왕성하게 그 때 했었지. 근데 내가 그 영단 집을 (있다 얘기가 또 나오겠지만) 어떻게 어떻게 얻어 가지고 거기 있으면서 그 전에 일본 사람 그 영단이 전부 일본 사람이 살았거든? 그리고서는 구부락 이라고 고 넘어 동네는 맨 초가집이고 기와집 최영주 회장이라고 최 회장이 살 때 그이가 기와집 있었고 기와집이 몇 집 안 됐어. 그리고서는 초가집 그 앞에 대방동 앞에 벌판이 전부 논이었었거든. 전부 농사를 지었던 데야. 그렇게 살 제 그 때 일본 사람들 해방 직후에는 고 구부락이 다섯 집 밖에 없어. 내가 다 알아. 누구누군가를 다 알아. 다섯 집 있었어요. 그래 그게 공소였었어. 그래 공소에 중림동 성당에 오기선 신부님이 보좌로 있을 적에 거기 공소에도 나오시고 그러든 데야. 근데 대방동 영단에 일본 사람이 다 나가고 보니까 그저 웬만한 사람이 너도 나도 하고 와서 전부 집을 그냥 막 빈 집을 갔다가 문패를 써 붙이고 그냥 그래 가지고 막 점령하고 그랬었거든.

 

공소에서 주일학교, 성가대, 부인회까지 조직강화

 

그래 나는 영등포에서 또 생활이 그렇지 않고 하니까 조금 늦었지. 한 1년이나 됐나?

거기 내 외사촌들이 가서 점령해 가지고 집을 점령해 가지고 있고 그래서 또 그 사람들을 통하고 그럴 때도 그 땐 벌써 집들이 다 그냥 문패만 써 붙이고 걸어 잠그고 그냥 점령만 해 놓은 거여. 모두 그런 집이 많아. 그래 나는 또 없단 말이야 집이. 그래선 저기 관리소장 하는 영단 관리하는 소장이 강섭이야. 강섭이 그전엔 외인이었었어. 외인인데 내가 집을 얻으려고 그 사람을 좀 교섭을 한거지. 술을 좋아하니까 술도 좀 사주고 형님 형님하고서. 그래서 그이 덕분에 집을 하나 영단 집을 하나 얻었어. 얻었는데 청년회를 하는데 그이를 전교라고 할까 잘 해가지고 영세 입교시켰어요. 영세 입교시켜가지고 그 영세하기 전에 우리 청년회 할 때 예비 청년회원이라 해 가지고 참석을 하다가 영세 받고 첫 적에는 나하고 이렇게 활동을 했는데 그래서- 6.25가 터져 가지고서는 나갔다 들어오니까 그 성모 유치원

하던 자리 그 아래 그게 500평이야. 거기 집이 영단 집인데 그 사람이 살던 사람이 인제 피난을 나가서 어디로 갔냐면 부산으로 가서 부산 가서 고무공장인가 취직을 해가지고 있고 살림집은 다 가버렸는데 미군들이 그걸 접수해 가지고서는 거기다 뭐 그냥 모터도 놓고 별짓을 다해서 지붕이 폭격에 지붕이 무너지고 마루도 그냥 모터 같은 거 놓고 해 와 다 저기하고 그랬거든?

그런데 내 생각에 그걸 사자. 이걸 사가지고 그랬더니 회의를 했어. 우리 청년들 모아 가지고 이 거를 사가지고 수리를 해서 우리 강당이라도 만들자. 얘기했더니 딴 사람들이 전부 반대를 해. 왜 반대하냐면 또 그럴 싸 한 게 뭐냐면 “또 피난 나갈란지도 모르는데 응. 그 지금 사놨다가”  “완전히 수복해 가지고 들어오면 그 땐 우리 사지 못해. 이런 때 사야지. 그러니까 정 반대하면 내가 내 돈으로 내가 계약해 가지고 정 반대하면 내 사유재산 맹글겠다. 그러니까 그런 줄 알아라.” 그래 내가 계약을 해 버렸어.

계약을 해 놓고서는 다시 청년회를 소집했어. 청년회를 소집해 가지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 때서야 승낙을 한거지. 해가지고선 그 값을 치러야 할 텐데 돈이 있어? 돈이 없으니깐 돈 누가 얼마 내고 내기로 하고 그러는데 그 때 부인회장을 - 내가 그 때 그렇게 청년회가 잘 되고 하니까 성가대도 맹글어 놓고 또 주일학교도 내가 맹글어 놓고 그래가지고 주일학교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부인회를 조직해 부인회도 하고- 인제 한 본당같이 해 놨어. 인제 그 때

[기자: 미사는 도림동에서 했나요?]

[김회장: 그 때 미사는 도림동 가서 했지.]

 

처음엔 유치원 아래 오백평 부지 확보

 

여긴 따로 공소에서 그렇게 조직처럼 만들어 놓고 부인회는 부인회대로 활동하고 그래서 부인회 회장으로 이 마리아라는 이가 있어. 그이가 개신교의 집사였었어. 집사였었는데 여기 들어와 가지고.- 그러니까 그이하고 그 강섭이하고 나하고 일선에서 뛴 거야. 딴 사람들은 그냥 청년회원이지. 인제 그이가 부인회를 동원시켜가지고 우리가 뭘 판고니 돈이 모자라니까 다이아찡, 다이아찡이라는 게 그때만 해도 다이아찡이면 만병통치였어.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다이아찡 약. 그걸 봉투에다가 넣어가지고 거기다 성경구절같은 걸 써 가지고 이렇게 해서 그거를 댕기면서 파는 거야. 그걸 교우집, 영등포 교우집을 전부 댕기며 팔고, 또 저 부인회에 신부님 친척이 계셨는데 신부님한테 얘기를 해 가지고 양말 같은 거 이런 것을 가지고 가서 신부님 주일 미사 끝에 강론 좀 해서 좀 팔아 주라고 얘기하라고 해서 그런 것도 팔고 이렇게 해가지고서 그걸 산거야. 왜 얼마에 산고니 그걸 어떻게 산고니 이제 처음에 이걸 내가 사고 싶어서 했는데 이걸 주인을 알아야지. 주인을 모르고 있는데 저 영단 소장하던 아까 영세시켰다던 강섭씨 그이가 잘 알거든? 그 영단 관리를 했으니까. 그이가 그 주인이 부산 가 있고 저 언제쯤 또 한번 여기 올거라 그거야. 그럼 오거든 내가 얘기한대로 하란 말이야. “지금 이 집도 다 이렇게 파괴되고 그게 그전에 사람이 죽어 나가고 그랬어. 이 뭐 흉가 집 같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라고. 괜히 수복해 가지고 들어와서 수리하고 뭐하고 한데도 돈이 많이 들고 또 어떻게 될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해서 값을 좀 싸게 띄어라.” 내가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마침 그 사람이 만나 가지고 타합을 하는데 그 때 돈에 150만원을 달라고 그래. 그 땅이 500평인데 그건 권리금 적산 땅이었거든? 달라고 그러는 것을 갔다 내가 딱 85만에 내정가로 짤라라. 이거 뭐 누구 쓸 사람 없고 내가 얻다 얘기하면 교회 같은데 얘기하면 그런데다 해 줄 테니까 저 외인 입장으로서 그 사람 위해서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팔아야지 이거  나중에 수리하고 어쩌구 이거 한데야.” 그래 흥정을 띄웠어. 85만원에.  85만원에 띄워가지고서는 그걸 사 놨는데 이걸 저 고쳐야 할 거 아니야?

 

부서진 건물 수리: 우신초등학교 교장과 협상

 

집을 수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수리를 해야 할 텐데 또 돈을- 그걸 사는데 85만원 맹글기도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걸 돈을 걷기도 어렵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 동네가 학교라고는 우신학교 밖에 없었어. 대방국민학교도 없었고. 그런데 거기 살던 사람들이 전부 피난을 나가 가지고선 빈집들이 있었잖아? 근데 우신학교 얘들이 선발대로 복구해가지고 들어오는 얘들이 있었어. 선생님들도 먼저 선발대로 복구한 사람들이 그 얘들을 가르쳐야지 그냥 놔 둘 수 없으니까 그 대방동 그 빈 집이 빈 집들을 그 때 그냥 웬만한 집은 전부 양갈보들이 있어 가지고 양갈보 모두 점령해 가지고 했거든? 그리고 왜 그랬냐면 공업학교가 그 전에는 공업학교도 다 나가고 원투원(121) 미군부대가 있었어.-원투원 부대는 병원부대지- 그러니까 미군들이 거기 있고 하니까 양갈보들이 모두 있어 가지고 그런데 집들이 - 집주인들이 자꾸 들어오고 그러니까 얘들도 들어오고 그러니까 얘들을 우선 가르쳐야겠다는 거야. 그래서 빈집을 점령하고 성당 들어가는데 큰 요리집 생겼잖아? 고 바로 내 아우네 집 한 100여평 있었어. 거기다가 가게 집에다가 학교 사무실을 맹글어 놓고 산발적으로 얘들을 가르치는데 학생들 살던 주민들이 자꾸 들어오니까 얘들도 늘고 어디 가르칠 데도 없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꾀를 부린 거지. 그저 그때 우신학교 교장이 한용택. 한용택 이라는 이가 우신학교 교장이었었어. 교장을 찾아가서 인제 거 아까 강섭 이라는 분하고 찾아가서 “교실이 모자라 걱정되겠다구. 우리가 이 건물을 빌려 줄 테니 당신네들이 수리해서 쓸 수 있느냐?” “아 고맙다.” 고 좋다구 말이야. 그런데 그게 20평이라지만 20평이 더 됐을 걸? 유치원하고 하면 저 쪽으로 방이 하나 이만한 방이 있고 마루가 마루만 해도 20평이 넘었지. 유치원 할 제는 그래서 그걸 한용택씨한테 얘기를 하니까 자기가 수리해 쓰겠다. “그 대신 1년 있다가 우리가 신부님을 모실른지도 모르니까 1년 있다가 내주어야 할 거 아니냐.” “1년 있으면 내 주어야지.” 이거 가지고 학교가 되냐 그거야. 그렇게 계약을 해가지고 그걸 빌려 줬더니 우리 돈 한 푼도 안들이고 80만원 이상 그 때 돈에 이상 들여서 유리창하고 마루 깔고 지붕하고 전부 고쳐서 얘들 가르쳤어.

 

초등학교 교실 겸 공소회관으로 활용

 

 그렇게 되다 자꾸 주민들이 수복해가지고 들어오니까 인제 그것도 모자라고 빈집도 다 내놔야 하니까 그 건너 예배당 있는 그 앞에다가 함석집으로 길게 임시 교사를 지었어.  교사를 지어가지고 거기서 가르치다가 우리는 1년 후에 신부가 오신 거 아니고 신부님보곤 그랬거든. 우리 강당이 있으니 공소로다가 1년에 한번씩이나 두 번 와서 미사 공소 치르고 우리가 사용하는데 그렇게 해 놓고서는 거기서 학생들이 얘를 가르쳐야 주일날은 안 가르치잖아? 그러니까 주일날은 거기 우리는 모인단 말이야. 거기 공소 모여가지고 주일하교 얘들 가르치고. 또 성가대도 해 가지고 또 저 거기서 아침저녁이 아니라 저녁에 모여서 저녁기도 바치는데 그 때 종을 우리 누님이 어디 가서 학교 종 같은 조그만 거, 그걸 사가지고 사줘가지고 거기다 달아가지고 뭐야 종을 치고 그랬단 말이야.

 

교회의 상징, 종도 확보

 

그 때만 해도 전화가 없었어. 그래 종을 치고 하면 저녁에 모여서 기도 저녁기도 바치고 주일날이면 주일학교 하고 성가대하고 뭐 부인회도 모여서 하고 우리 쓸 거 다 썼거든. 학교서 썼어도. 그렇잖아. 저녁에 끼고 주일날 끼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다가 우신학교가 복구가 되가지고 - 우신학교가 그 전에 이태리 병원이 됐었어. 학교가 다 없어지고. -그런데 어떻게 되가지고 다 학교 우리한테 내 주게 됐지. 내 주게 됐는데, 우리가 거기서 공소를 치르다 보니까는 신부님이 와서 미사 드려주고 그랬는데 종을 여기 후암동 동회에 신관호라고 하는- 지금은 다 늙어서 엊그저께 죽었지만 그 때 다 청년이었지. 나도 다 청년이었고.- 그 사람이 후암동에서 어떤 동회를 가보니까 종을 이렇게 놓고서 청년 같은 것을 소집할 때만 뭐 망치 같은 것을 가지고 두드리고 그러드래. 그래 종이 좋드라고 좀 한번 가보자고 나보고. 그래 가보니까 이 직경이 두 자나 되고 복음사가라고 아마 개신교에서 일제시대는 일본사람들이 모든 물자가 귀하고 그러니깐 쇠가 쇠붙이가 모자라 가지고 각 가정에 숟가락, 놋그릇 전부 다 모두 해 드려 갔거든. 그래 웬만한 교회 종까지 다 떼어갔어요. 명동 종은 원체 못 이기니까 띠지 못하고 웬만한 데는 예배당 같은 데는 종 다 빼앗아갔어. 하다못해 한강다리 있잖아? 한강 다리에 철망 철이 셋 있으면 가운데 하나씩 뽑고, 뽑아가고 되가 모자라서. 그런 지경인데. 그 종이 내가 가 보니까 괜찮아. 크고 그래서 그것을 얼마에 샀나 8천원에 샀나 기억을 못해. 그걸 사왔어. 우리가. 샀는데 이제 그걸 갖다가 그 전에는 공소 유치원 자리 집이니까 약하지 않아? 그래 조그만 종만 달고 땡땡 쳤는데, 그걸 무거워서 거기다 달으면 또 저기할거 같아. 그래서 종각을 또 맹글었어. 그 유치원 앞에다가 앙구르로단가 그 때 돈으로 5만원 들여 가지고 우리 청년들이 모두 협조해가지고 노력 동원하고 모두 해가지고 종각을 세워 놓고서는 위에다가 십자가를 붙이고 (아주 사진이 어디 있을 텐데) 거기다 그 종을 달고선 종을 치니까 이 종이 귀가 먹었어. 종소리가 망치로 때리고 그래서 그런지 종소리가 썩 좋지 않고 그랬어. 좋지 않았어. 그런데도 나중에 성당 지었는데도 성당에서 그것을 썼었어. 인제 그렇게까지 하다가 우리가 청년회니 뭐 성가대를 해 가지고서는 그 저 미군부대 그 원투원(121) 부대에 미군들이 교우들이 미사 드리잖아? 교우들이 있어 가지고 거기가 우리 성가대가 성가까지 해주고 그랬어.

 

 ’미군 원조로 개신교 예배당 짓는다’는 소문 듣고, 우리도

 

그렇게 또 우리 청년회에서 어디 초상이 나면 돌봐주고 이렇게. 친목 처리를 하고 그랬는데 그러다 보니까는 그 앞에 예배당이 무슨 원조를 받아가지고 예배당을 짓는다고 그래.

우리도 미군 원조를 받아가지고 성당을. 성당을 못 짓더라도 강당이라도 하나 지어볼까? 하고서는 발라바 김 신부님 김 발라바 신부님이 도림동 본당 신부였거든. 그래 그 양반한테 우리가 쫓아가서 여기 앞에 예배당이 미군 원조를 받아가지고 예배당을 짓는 모양인데 우리도 어떻게 원조 좀 받을 수 없겠느냐고 신부님한테 얘기를 했다. “아 거기 대방동에 무슨 성당이 필요해?” 교우가 조그마니까. 그러고 흑석동은 본당은 먼저 됐는데 성당은 우리보다 나중에 지었어. 거기 본당을 해 놓고서는 학교 강당에서 미사 드리기도 하고 또 신태민씨네 집이라고 지금 성당 자리 그 밑에 2층에서도 미사 지내고 그랬거든. 거긴 본당이 먼저 안 지었어. 성당은 못 짓고. 그래 신부님이 뭐라고 그랬냐면 아니 저 흑석동도 성당이 있고 본당 안 되고, 새말은 교우가 500명이나 되는데도 여긴 교우 백 몇 십 명밖에 안 되는데 무슨 여기가 성당이 필요하냐고 그래. 그래 우리가 뭐라고 했냐면 “아니 거긴 500명이 있어도 우리는 이렇게 조직체를 해 가지고 열심히 활동을 하니까 이런 기회에 성당은 못 짓더라도 강당 하나라도 마련하게 원조를 좀 얻어 달라고. 그 때 이 밀가루니 강냉이 가루 배급이 그 때만 나왔어도. 좀 성당 짓기가 힘이 덜 들었을 텐데. 그 때 그건 없었어. 그 후에 나왔지.

 

꿈만은 아닌 소망

 

근데 신부님한테 자꾸 몇 번 가서 졸르니까 가만있어 보라고 그래. 가만있어 보라고 그러더니 아마 얘기를 한 모양이야. 신부님이 어떤 미군부대 FAK 라고 거기다가 얘기를 해가지고서 얘기를 해 놨다고 그래. 그러더니 언젠가 또 우리를 부르더니 그 성당 (나중 얘긴가?) 설계도를 그려오라고 그래. 그 때는 그 위에 지금 성당 지은 자리는 생각도 못 한거야. 고 아래 오백 평만 우리가 권리금 주고 산거야. 샀는데 거기다가 성당을 짓드래도 거기다가 짓고 강당을 짓드래도 거기다 지을 예산을 한거야. 그런데 “내일 모래까지 이 설계도를 안 가져오면 못 얻는다. 한 이틀 안에 이걸 다 해오너라.” 지금 이런 성당 짓는 것은 그 큰 설계회사 같은데 돈을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씩 설계를 하지만 이건 그냥 가건물이니까 그리고 그런 큰 성당 지어본 사람이 없고 영등포 역전에 김영희라고 설계 사무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딸을 내가 가르쳐서 영세시키고 또 그 김영희라는 이가 그 동네 사람을 잘 알아. 그래 그 사람보고 가서 그랬지. 이 성당 설계도를 내일 모래까지 그려오라고 그러는데 좀 어떻게 그려 줄 수 없느냐 하니까 ”내가 성당을 뭐 지어 봤냐 말이야. 그리고 또 그런 것 못 지으니까 못하겠다고 그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아르켜줄테니 고대로만 그냥 그 무슨 일반 설계도가 뭐냐면 일반 주택이니 그런 거만 지었지. 큰 건물은 안 해 본 설계사였거든. 우리가 내가 초안을 한거여. 그전 헐은 성당을  이 종각하고 문은 그 성당 내부는 도림동 성당 본을 따서 100평을 했어. - 참 이거 얘기하기 전에 이거 빠졌어. 먼저

(녹음 테잎의 끝자락으로 몇 마디 빠졌음)

(도림동) 신부님이 노발대발 “아 이 사람들이 미쳤어? 무슨 100평이 필요해!”

응 인제 강당이나 지을 줄 알았던 모양이야. 100평을 지으라 했는데 나는 또 생각이 그게 성당 지을 생각은 안하고 나도 인제 강당을 지으려고 그랬는데 100평을 그려간 것은 뭐냐하면 내 맘을 우리가 100평의 원조를 받아가지고 물자를 좀 팔아서 돈을 맹글어서 강당을 뭐 돈이 있어? 맨날 어렵고 뭐 수복때가 돼 어렵고 해서 그 물자를 좀 팔아 가지고 이용해 가지고 한 50평 그냥 강당을 지을랴고 그 욕심을 채리고 100평을 그려 갔더니 “하 무슨 100평이나 필요하냐”고 걱정. 신부님이 거 신부님은 크게 짓고 오려면 신부님이 본당에 또 당신의 당신 저 아뭏게도 당신 돈 좀 내야잖아. 당신 아마 그런 것을 걱정해서 “너희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 것을 짓느냐?” 해서 그런 정도지. 덮어놓고 “신부님 우리가 신부님한테 그 무슨 물질적으로 신부님한테 폐를 안 끼치지 우리 힘으로 할테니까 무조건 100평을 해 주시오” 해 달라 그러니까 “너희가 무슨 돈이 있냐?” 그거야. “글쎄 걱정 말고 해 내노라”고. “신부님한테 절대 폐 안 끼치고 우리가 하겠다”고. 그래 나는 100평 그저 실어가지고 물자 팔아 가지고 할라고 그랬는데. 인제 그렇게 한 뒤에 얼마 있다가 아까 얘기 한 것 “내일 모래까정 설계를 안 그려오면 못한다” 그거야. 그럼서 김영일이란 사람한테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이걸 “지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해?” 하여간 “우리가 지으란 어떻게 그리라는데 하라는 대로만 그려 보라고” 고게 도림동 성당 같이 그걸 뭐 복잡할 게 없잖아? 살림집 같으면 내부가 복잡하지만 뭐 창고같이

창고같이 짓는 것이니까 무슨 크게 저기할 것 없단 말이야. 그게 내부를 100평으로 하고 문만 도림동 성당 그 전에 아치 가다가 아니었었어. 근데 문만 우리가 아치 가다로 맹글고 그리고 이 종각을 내가 초안을 해서 종각을 하고 하니까 종각 있는 데까지 5평이 더 들어가 105평이 돼 그래서 저 신부님한테 가져갔지. 가져갔는데 영 소식이 없어. 그래서 한번 신부님한테 발라바 신부님한테 가서 “신부님 정 바쁘시면 우리가 어떻게 통역 데리고 쫓아 댕겨 볼까요?” 그랬더니 “하 이까지껏 하면 내가 한마디 하면 이난 하냐고 네가 백 마디 해야 내가 한 마디 한 것만 하냐구 인제 또 그래. 그래 꼼짝도 못하고 이제 돌아왔어. 돌아왔는데 영 소식이 없어.

 

예수성심성월의 기적: 미군 부르도자의 엉뚱한 부지 조성

 

그 후로 그래서 그때 어떻게 됐냐면, 애 6월 달 6월 달이 예수성심성월이거든? 예수 성심성월인데, 우리 아버님이 피난 때 그 때 피난을 못가고 우리 사람만 가고 우리 누님이 우리 아버님을 모시고 있는데 우리 아버님이 항상 예수성심 때 기도를 많이 바쳐, 그래서 인제 많이 바쳐가지고 그 강당도 우리가 예수성심주보를 예수성심이라 했었어. 그 강당을, 그랬는데 이제 뭐 인제 그렇게 해가지고 인제 신부님이 인제 그림을 그리는데 가서 얘기를 하니까는 못 그린다고 해서 우리가 그렸는데 이틀 만에 그렸으니 인제 뭐 간단하게 뭐 창고같이 하는 거지. 해서 갔다 드렸어. 그랬는데 아무 소식이 없고 그래서 애 아까 얘기하듯이 신부님한테 가 그랬더니 신부님이 야단을 치시고 내가 하면 했지 니가 뭐 하냐고 그래 가만히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 성심성월이 인제 닥쳤어.

6월 달 예수성심성월이 (기침소리) 됐는데 거기가 우리 강당이 예수성심의 주보고 응 단 그래서 저녁이면 종을 쳐서 교우들 또 청년들 다 오게 해 가지고 9일기도를 드렸어. 빨리 성당을 좀 어떻게 이룩해 주십사 하고 9일기도를 드렸는데 묵주신공 바치고 인제 성모께 바라는 영하고 뭐 만과 바치고 인자 또 예수성심성월이니까 성월을 바치고 인자 9일기도를 또 9일을 했는데 9일기도가 끝나는 날이 예수성심축일이야.

예수성심축일인데 별안간 미군 부르도자가 떡 왔어. 응? 아니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거든? 청하지도 않았는데 미군 부르도자가 아주 여기 성당 터 닦으러 왔다고 그래. 아니 터 닦을 데도 없이 아래 500평 밖에 없는데, 그 강섭이가 이원태가 왔으니 그 산이 적산 땅이니까 사유진가 적산 땅인가 뭐 그래. 그 사람이 영단 관리소장이니까 잘 알거든? “그것 밀라구” “덮어 놓고 우리가 승낙도 안받고 밀어?” “밀어 놓고 나중에 불하 맡으면 된다구.” 밀자구 그러니까 뭐 호랭이 담배 먹든 시절이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지. 그걸 저 미군 부르도자가 왔으니까 그걸 하루 밀고서는 그만 둔다구 그래. “안된다구. 하루 더 밀어 달라고” 그래 하루 더 밀고 그 후에 인제 교우들을 다 불러가지고 많이 동원해서 그걸 평평하게 할라는데 잘했는데 그런데 신부님이 “그 물자가 왔다고 응 도림동 성당에다 놔 둘테니 너희가 일일이 쓰는 대로 갖다 써라.” 우리 청년들 어디 동원하려도 어디 나가고 뭐 동원시킬 사람도 없구 그런데 어떻게 하냐니까 “거기 갖다 놓면 다 잃어 버린다” 고. “아니 염려 마시라”고. “우리가 갖다 놓고 강당 뒤에 쌓아 놓고 우리가 밤새 지킬 테니까 염려 말고 대방동으로 보내달라고. 근데 보내왔는데 세면이 1,200포가 왔어요. 세면을 얻다 쌓을 것이냐 하니까 할 수 없이 우리가 강당에 쌓는데 무거워서 마루가 다 내려앉았어. 거기다 쌓고 목재는 그때 뭐라든가 저 이름도 다 잊어버렸어. 루핑, 목재 등을 가져 왔는데 강당 뒤에다 쌓아 놓고 막을 만들어 놓고 우리가 교대로 지키고 그랬는데, 그런데 나중에 이것 성당을 지으려면 청부를 줘야 잖아?

 

미군 물자 지원으로 성당건축 계약, 착공

 

 우리 청년회 가운데 목수일 하는 사람이 둘이여. 장만성씨 하고 이종운씨라고 이종운씨가 아마 죽었을 거야. 늘 앓고 있다고 해서. 광명시 사는데 이종운씨가 목수거든? 그래 둘이 경쟁입찰을 시켰어. 입찰을 시켜가지고 그래 이종운이가 맡게 되었는데 105만원에다가 그때 돈에, 105만인데 물자 다 대주고 그걸 지을랴고 하니까 그 목수가 뭐라고 햐냐면 이거 안 되겠다. 우리가 설계를 목재로다가 설계를 했거던? 근대 이 100평을 목재로 지어 놓면 바람불면 쓰러져. 응 쓰러지니까 이건 목재가 안 되니까. 이왕 세면이 1,200포가 왔으니 세면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벽돌집을 짓자. 그래. 구부락에 그 벽돌 맹그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래 인제 벽돌을 맹글어서 벽돌집으로 지을랴고 하니까 미군 책임자가 응. 그럼 이건 안 된다. 설계도를 다시 그려와야지 안된다고. 그래서 설계도를 다시 또 벽돌로 다시 그려 갔어.

 

시청: 시유지 땅 건축, 원상회복 요구

 

다시 그려 가지고 인제 거기다 짓는데 기초하고 얼마 상량하고 얼마 낙성하고 다 짓고 얼마 이렇게 주기로 계약을 하고 그 사람을 시켰는데 이렇게 짓다 보니까 구청에서 시청에서 나와 가지고 여기 어떻게 여기 저기 땅에다가 성당을 짓느냐고 당장 원상 복구하라고 말이야. 그래서 인자 이 사람을 갔다가 우리가 지금 불하 맡기로 수속을 밟고 있으니까 이제 나중에 불하 맡을 테니깐 어떻게 저기 하리라. 점심 사맥이고 또 차 삯 주어서 보내고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냐면 불하 맡을라고 김태종이라고 그져 대방동 들어가는데 모자원이라고 있었어. 데레사 모자원이라고 옛날에. 그이가 교운데 6.25때 나와 가지고 영세 받고 인제 그래 가지고 그래 천주교회에 혜택 좀 받을려고 영세 받고 모자원 해 가지고 이제 구호물자도 얻고 그랬는데 그 김태종이가 그전에 강원도 도지사로 있었고 또 서울 와서도 어디 출마도 하고 했었어. 그랬어. 이제 그 사람이 돈 2만원만 가져오면 자기가 서류를 일본말로 모치마루해서라도 자기가 해 올 테니까 돈 2만원만 내라고. 그 때 2만원은 컸지. 근데 돈 2만원을 줬는데 영 소식이 없어. 자꾸 시청에서는 와서 지랄들 하고 그러는데 거 소식이 없구. 아이 우리 지금 작업하는 중이니까 기다리라고 그랬는데 그런데 어느 정도 상량을 하고 돈을 달라는데 돈이 있어야지. 아 그래서 인제 벽돌로 하기로 했으니까 나무가 남잖아? 나무가 남으니까 우리 누님이 신림동다 논이 좀 있었어요. 그거 이때 나 두었으면 재벌이지. 그래 우리 누님보고 뭐라 그런고니 ”그것 팔아서 지금 여기 돈 10만원만 달라고 하니까. 누님도 팔아서 돈을 대면 그 값어치 나무를 드릴 테니까 나무로다가 집을 지어서 세놓는 게 낫지 그까짓 농사 거기 옆에 농사지어 가지고 1년이면 뭐 큰 수확도 안 되고 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그랬더니 아니 수확 이해관계를 떠나서 성당 지은 거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내가 뭐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 성당에서 그래 인제 팔아가지고 그때 10만원이면 컸어. 좌우간 105만원에다가 청부를 주었으니까. 그것이 쉬워? 그래 논을 팔아가지고 그걸 냈어. 그래서 인자 나무를 남지 않아  남는 것을 우리 아우네 집 모퉁인데 그 마당이 넓어. 근데 미군 이름도 잊어버렸어. 미군 책임자가 양갈보 루시아 교운데 갈보노릇을 해. 근데 암만해도 이 목재가 없어진 것 같으니 니가 잘 감독을 해서 그 목재가 나중에 성당을 짓고 남으면 널 줄 터이니 감독을 하라고. 아 그러니까 이 계집애가 자꾸 가끔 오고 그래. 목재를 남으면 거기도 갖다 놓고  그때 이제 이 종훈이가 대방동 동회사무소를 또 맡았어. 이 성당 지으면서. 맡았는데 지금 동회 사무실 아니고 저 성남 중학교 꼭대기 사는데 거기 동에다 지었어. 그거를 이종훈이가 맡아 가지고 짓는데 돈은 우리가 묶이니까. 그러면 그 목재를 달라고. 그때 사이 당 50 몇 원씩인가 그때 60원인데 좀 싸게 해서 50원씩 쳐 가지고서는 목재로 얼마씩 주고 또 우리는 벽돌을 찍어야 하니까 물이 필요하고 모래가 필요하잖아? 모래를 실어다 주는데 그 미군들이 실어다 주고 물 실어다 주고 해서 성당 짓는 자리에다 큰 굽 웅덩이를 파고 거기 물 붓고 그리고선 저 벽들을 찍은 거여. 벽돌 찍고 짓고 그러는데 돈 달라고 해서 돈이 모자라니까 그래서 10만원 그렇게 해서 주고 그러고도 또 돈이 모자라 가지고 다이야찡 팔고 뭐 말고 부인들 통해서 부채도 팔고 뭐 이렇게 해 가지고 이제 그걸 또 시키고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고 충당을 했는데 자꾸 시청에서 와서 인제 야단을 치니 할 수 없이 내가 이제 노 주교님한테 올라갔어.

 

교구: 대지불하 때까지 묵인요구

 

노 주교님한테 가서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러냐” 고. 그러면서 경향신문이 그 때 천주교회에서 했잖아? 경향신문 4층에 가면 총무원이라고 있는데 총무원에 장면 박사가 있었어. 그래 장면 박사한테 찾아가 보라고 노 주교님이 그래. 그래 장면 박사한테 찾아 갔더니 신태민이라고 하는 이가 있어 기자가 시청출입기자가 있어 그이를 대 줘. 그이를 대 줘서 나하고 시청을 그이하고 가 가지고 산림과 있는 사람들을 인자 맥주도 사맥이고 어떻게 다 일본말로 사바사바지 인자. 그렇게 해가지고서는 우리가 저거 불하를 맡아서 있게 할 테니까 기다려 달라고 해가지고 묵인정도로 해서 성당을 지은거야. 성당을 지었는데 이제 도중에 인제 어떻게 됐냐면 성당을 지어 놓고 그 때 신부님이 양력에 보니까 10월 달이라 돼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9월 달일 거야. 성당을 짓는데 본당 발라바 신부님이 거기 신 신부님의 조카 신부임이 한 분 있었어. 보좌로. 그분을 파견을 시킨 거야. 우리 성당 짓는데. 그래서 와본댔자 그 앞에 저 교우 집, 거기 들어앉아서 놀고 그냥 있다가고 뭐 알어? 그래서 성당을 다 지어놓고 (이거 뭐 내가 적은 게 없고 생각나는 대로 하자니까 자두 이제)  인제 다 지었는데 낙성식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우울한 낙성식: 숨은 공로자인 김철규 신부님에게는 꽃다발도 없어

 

응 낙성식을 하는데 11월 22일 54년. 근데 임신부님이 9월 달인가 10월 달인가 하여간 오셔. 본당 신부로 보냈어. 음 임응승 신부님. 신부님이 사제관도 보내다 보니까 사제관이 있어?

그래서 우리가 별안간 흙벽돌 엉터리로 가건물로 또 해서 신부님 사택을 만들어 놨어. 그래서 거기 신부님이 계시고 그러는데 낙성식을 하는데 어떻게 되냐면 미군 원조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물을 뭘로  헌고 하니 저런 자개 합이 있어 담배합을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 성당 문양을 넣고 그 원조한 사람의 이름을 거기다 넣고 갔다. 낙성식 할 때 주기로 하고, 꽃다발을 다섯하고 주고 나는 낙성식 같은 것 안 해 봤으니까 잘 모르잖아. 임 신부님 시키는 대로 그저 꽃다발을 갖다 주라고 그러는데 그 때 인제 누가 왔냐하면 장면 박사도 오고 영등포 각 본당에서들 많이 오고 그랬는데 미군 책임자들 주었는데 원칙적으로 내가 나중에 생각하니까 애를 썼으니까 본당 신부님한테도 꽃을 바치고 본당 신부님이 그렇게 애를 썼으니까  치하를 해야 하는데 임 신부님도 생각을 잠깐 못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왜 저 장면 박사는 아무 그 돈 낸 것도 없고 그저 옵서버로만 잠깐 참석했을 그뿐인데 장면 박사를 꽃다발을 달아 주라고 그래. 그래 시키는 대로 꽃다발을 줬지. 그러니까 그 김철규 신부님이지 발라바 신부님 그 양반이 인간이니까 마음이 좀 섭섭했던 모양이야. 자기한테 꽃다발도 좀 하고 원칙은 치사 한마디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근데 그것도 안하고 그러니까 신부님이 끝나자 그냥 가 버렸어.

가버리고 또 내가 그거 다 지어 놓고 가회동 성당 낙성식하는데 가보니까 그 집 지은 사람한테도 뭐 저 공로장 주든 데 우리는 그것도 안줬어. 그 사람이 거기에 노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성당에도 안나오고 그랬어. 어떻게 한 가지 얘기하다가 말이지만 그 성당을 그 사람이 지었는데 물이 새. 물이 새니깐 105만원 줄 것을 102만원인가 주고 3만원을 떨어뜨렸어. 그래 내가 주관, 재정도 보고 내가 지정 회장 겸 모두 처리를 하니깐 나를 욕하고 이젠 그래 완전히 고쳐 놔라. 또 고쳤는데 또 새. 그래서 할 수 없이 고 성산 마루턱에 일하던 사람 그 사람을 불러가지고 결국은 거기 또 돈을 주었으니까 105만에서 102만을 주고 3만원을 덜 줬어. 그랬더니 나를 욕하는 거지. 그러나 저러나 자기가 다 완성 못하고 그랬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깐 그래서 성당에 안나온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바람기가 있었던지 그래. 잘 안나오고 그랬는데 나중에 또 열심히 성당에 댕기고 그런 사람인데 그래서 낙성식을 그렇게 해서 끝냈는데,

고 봄에 임신부님이 나를 빨리 오라고 그래.

 

엉뚱한 진짜 지주 등장: 원상회복 요구

 

그래서 올라가 보니까 서울서 손님이 왔으니까 빨리 올라오라고 그래. 가니까는 서울서 어떤 누가 왔다 그래서 내가 가니깐 다짜고짜로 나보고 “당신이 이 성당 지었느냐” 그거야. “내가 지었다기 보다는 신부님이 지었다”고. 명암을 내놓은데 “엄연히 이것이 해동회사 땅인데, 당신네가 어떻게 이게 남의 땅에다 성당을 짓느냐?” 말이야 “당장 이거 원상복귀 해 노라.”고. 하여튼 야 뭐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뭐 알아? “아니 이건 시장이 묵인하여서 앞으로 불하하기로 하고 이렇게 지었다”고 했더니 아니 시장 모가지를 빼돌리니 어쩌니 그러면서 “어떤 시장이 남의 땅에다가 성당을 지으랬냐 고. 상당히 화를 내고 그래. 하여간 어떻든 우리도 웃어른이 있고, 또 내가 잘못했다면 시장이 잘못한거지 내가 잘못한거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시장한테 우리가 이야기 해가지고 알려드릴 테니까 올라가라고 해서 달래서 올려 보냈어. 올려 보내놓고    

노 주교님한테 내가 쫓아갔지.

 

노기남 대주교가 부지 2천 평 매입

 

노 주교님한테 가서 그런 사실을 얘기를 하니까 “아 그러냐”고. “그러면 내려가 있어” 라고 그래. 근데 그 타합하는 장면은 내가 못 봤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 회사에 교우가 있는지...

주교님이 찾아 가지는 않았으니까 누구를 불렀는지 찾았는지 타합을 하기로 “자 이왕 지어놓은 것, 뭐 헐을 수는 없고 그러니까. 아 땅값을 받아라” 응 거 2천 평이며 그 아래는 500평이고, 인제 그런데 그 2000평에 대해서, 그러면 그 때만 해도 거의 무용지물이었거든. 거기 뭐 해군본부도 짓기 전이야. 짓기 전이고 수복해 가지고 들어가니까 뭐 별거 아니니깐 회사에서도 별거 아니니까 아마 승낙을 한 모양이야. 근데 나는 그때 1000원씩 준줄 알았더니 발라바 신부님한테 얘기했더니 발라바 신부님이 거기에 타합한 게 있었데. 갔었데. 그래서 저 그러니까 1500원씩 흥정을 해서 2000평을 산거야. 저기 노 주교님이 돈을 주고 그래서 2000평을 샀고, 고 다음에 처음에 임신부님이 오셔 가지고 그 양반이 1, 2년 얼마 안 있다가 좀 있다가 또 나가서 또 임신부라고 있었어. 임종국 신부님이 그 다음에 또 오셔가지고 그 양반도 6개월인가 밖에 안 있다가 후암동으로 배치가 되서 오고 고 다음에

신 신부님이 오신 거여.

 

사제관 개축: 신인식 신부

 

신인식 신부님이 오셔가지고 사택 사제관을. 신인식 신부님이 다시 지었어. 다시 지었는데 지금 지은 것은 장대익 신부님이 다시 지었지만. 그때 신인식 신부님이 또 좀 낫게 지었지. 처음 치고는 원체 잘 지었지만. 지어서 신인식 신부님은 사제관을 짓고. 인제 그렇게 해가지고 결국은 땅을 어떻게 산고니 고 유치원 자리 뒤에 강씨라고 동장 보던 이가 있었어. 그 동장 보던 이가 그 집을 그 집을 또 샀어. 우리가. 사가지고 우리가 유치원 그 수녀원 맹근거야. 강 동장 집을 사가지고 수녀원을 맹글고 그래서 그 땅 사고도 고위에 지금 사택 신부 사택 그 뒤에 터가 있었고 뭐 이것저것 주워 모아서 이게 3천 2, 3백 평 될 거여. 전부해서 그것 모아 가지고 인제 500평은 우리가 권리금 샀거던? 불하. 나중에 신 신부님 오셔 가지고

기자:  처음에 그 500평 사제관 자리 아니었어요?

 

강당주보-예수성심, 성당주보-성요셉

 

김회장: 아니지. 들어가는 앞에. 앞에 지금 주차장하고 그 터 위에 유치원 자리 아니야. 지금 헐었지만. 그것까지 다 합해서 500평이지. 그래서 지금 터가 그래가지고 3000평이 된 거지. 그러니깐 나는 뭐 그저 젊은 마음에 그냥 저리 뛰고 이리 뛰고 했는데 보람이 그걸 지어놓고 나니까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지나갈 적마다 쳐다보고 그냥 저기 가서도 그게 저 그전에는 저기 영등포 나가자면 다리 있는 데서도 지붕 꼭대기가 뵈요. 그래 거기 가서도 자꾸 쳐다보고 자고 성당을 쳐다보게 되고 저쪽에 가서도 성당을 쳐다보게 되고 참 신기하고 근데 인제 강당도 그렇게 해서 종각을 해놓고 보니까 그 때도 얼마나. 그래서 그 때 강당은 예수성심으로 주보를 하고 우리 아버님이 그렇게 기도를 해서 (일은 내가 했지만) 발라바 김신부님이 우리 아버님이 그 기도덕택에 그렇게 됐다고 해서 그 성당을 요셉성당이라 한거여. 우리 아버님이 요셉이거든? 그래서 요셉본당이라 했어.

그리고 인제 성당 그래서 다 잊어버렸어 요전에 30년 기념 .

 

유치원 건립

 

유치원 유치원을 어떻게 됐냐면 그 앞에 범택이라고 하는 -딸 이름이 범택이야- 그 범택이 엄마가 말하자면 소실이지. 남편이 구청에 댕기고 그랬는데, 그 시어머니가 불교를 믿는데 그 때 돈 50만원을 뭐 불전에 바쳐서 뭘 하겠다 그런 소리를 내가 들었어. 그래 내가 쫓아가서 또 한참 구워삶았지. 구워삶아 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고 이 성당에 그만큼 저기 해 놓으면 그 교리에 이쪽으로 그만하면 하느님의 은혜 입는다. 그런 얘기해서 그이가 20만원 -그때 돈 20만원이면 컸어요.- 20만원을 들여서 유치원 자리. 거기다 유치원을 그이가 세운거야. 그 걸상, 풍금 또 이렇게 놀이게, 그네, 미끄럼 타는 거. 그걸 다 그이가 해 논거야. 그 때 돈으로 권태경이가 돈을 내서.

 

예수성심상

 

그렇게 하고 또 한 가지는 빠진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예수성심 동상(?) 있잖아? 그 예수 성심 동고상(?)은 누가 한고 하니. 그 때 총회장이라고 서 - 이름은 잊었어. 서씨라고 공군본부에 대령인가 있는 이 총회장을 했었어.- 그이가  예전과인가. 그 공군본부에 예전관가 뭐 있어 가지고 그 공군본부에 무슨 화재보험 같은 거 이렇게 되는데 그이가 아마 힘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인자 그거 보험회사에서 이 사람한테 와이료를 줄려고 하니까 와이료를 받지 않고, “알만하다 그러니까 내가 뭐 하나 청할 테니까 해 주겠느냐?”

“그럼 뭐냐?” 그랬더니 성심 동고상을 하나 해 달라고 그때 돈에 3만원인가 얼마를 들여서

[기자: 성심상이요?]  응 그건 이따 얘기할 께

이건 이제 성심상을 거기다 -그때 돈 3만원이면 컸지.- 3만원을 들였는데 한 4만원 돈 들였어. 나중에 교우들이 돈 이루고 뭐 어떻게 해 가지고선 성심 동고상을 세웠단 말이야. 그리고 강 뭣이라고 있어. 편안 강(康 )자 강씨여. 그게 보험회사 사장인가 그래.

 

성모상

 

그러고 그 위에 동굴 동고상은 누가 한고 하니 강 시몬이라고- 하도 오래 되서... 시몬일거야 - 문방구 하던 이가 있었어. 교운데, 그이가 서둘러 가지고 그이가 돈을 많이 냈지. 일단 돈을 내 가지고 그 동굴 동고상(?)을 세운거야. 세웠는데 얘기하는 중에 빠진 건 뭐냐면 그 때 돈이 모자라 가지고 성당 지은 데 모자라가지고 애를 쓰는데 도림동 보좌신부님이 (테이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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