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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11월 21일 (목)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연중 제17주일(나해-03)

156 전창문 [cmjun] 2003-07-27

연중 제17주일(나해-03)

                                                     2003. 07. 27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하느님의 무한하고 풍요로운 사랑을 드러내는 기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 기적을 장차 최후만찬 때 세우신 성체성사의 예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기적을 본 군중은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자 또 다른 기적을 보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저녁때가 되어 허기진 군중을 측은하게 보신 주님은 필립보의 속을 떠보기 위해 음식을 사오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필립버가 걱정하자 그 때 안드레아가 마침 어린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달라한 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함으로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빵을 먹은 군중의 수는 남자만도 오 천명이 넘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내용이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요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이나 제자들은 이 기적의 의미가 장차 세우실 성체성사에 대한 징표로 생각하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이들은 자기 중심적인 이해 관계에 결부시켜 기적의 의미를 해석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란 분은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분으로 자기 민족을 배불리 먹여주고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일등 국민이 되는 부강한 나라를 세워 줄 위대한 분, 즉 세속적인 구세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예수님이 실로 누구이신 지, 또 어떠한 의도를 가지셨는지 알아볼 것도 없이 무조건 왕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빵의 기적의 참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하려고 하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산으로 피해 가십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의 참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눌수록 늘어나고 풍족히 먹고도 남게 된 빵의 기적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지이며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는 성체성사를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특별히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사랑은 엄청난 큰 기적을 낳는다는 사랑의 나눔을 강조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 되지 못했고 한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이가 기쁘게 내놓고 나누려고 한 그 마음이 오 천명이 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큰 기적을 이루는 바탕이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아무 것도 없는, 즉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기적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만약에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내 놓지 않았다면, 즉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먹기 위해 준비한 빵과 물고기였습니다. 그것을 달라고 했을 때 선뜻 내놓기 쉽지 않았지만 순진한 어린아이는 자기 것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순진하고 조건 없는 나눔이 예수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게 된 밑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나누어주게 함으로써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을 통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얼마나 큰사랑이며 큰 힘과 기적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나눔은 큰 기적을 낳게 합니다. 그리고 나눔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더불어 함께 살아가게 함으로 이 사회를 아름답게 합니다.

 

   아들이 감을 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감을 광주리에 담으면서 "까치 밥으로 감 서너 개쯤은 남겨 두어야 한다." 하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이 이상하다는 듯 "우리 먹기에도 부족한데 왜 까치 밥을 남겨야 하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새들과도 나누어야지. 우리만 독식해서는 안 된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해가 안된 듯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농부가 콩을 심을 때 세 알씩 심는다. 왜 그런 줄 아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아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아버지가 "한 알은 공중의 새들 몫이다." "또 한  알은요?"  "땅 속의 벌레들 몫이지."  아들은 다시 "그럼 한 알만이 주인의 몫이군요."하고 말하자 아버지는 "나누는 마음 없이 한 알만 심어 수확을 기대하다가는 빈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하고 아들에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옛날 우리 선조들은 하찮은 음식이라도 이웃과 나누려고 했을 뿐 아니라 자연과도 또 생물과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콩 한 알이 생겨도 형제와 나누어 먹었습니다. 제 어렸을 적 기억으로 어떤 기쁜 일이 있을 때 집에서 떡이나 음식을 만들면 부모님께서 접시에 담아 먼저 동네 이웃집에 나누어주는 심부름을 곧잘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음식을 받은 이웃은 그 접시에 무엇인가를 담아 되돌려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준 것보다도 되받는 것이 더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그런가 하면 농촌에서 농번기에 일손이 딸리면 바쁘지 않은 사람들이 도와주므로 농사일을 해결하기도 했습니다.(품앗이) 이처럼 우리는 나눔을 생활화했던 아름다운 민족입니다. 나눔을 통해 자연과 함께,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은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자원이 부족해서 못사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가진 자가 더 가지려 하고 못 가진 자의 작은 몫까지 빼앗으려는 욕심이 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나 혼자만이 살겠다는 이기주의가 심화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육 현실도 이런 징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학교나 가정에서 선생님이나 부모는 학생이나 자녀에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교육이 아니라 "너는 꼭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한다." 하는 식의 자기 위주나 자기 제일주의를 꿈꾸는 사람으로 교육시키려고 합니다. 언젠가 모 회사 광고에서 "2등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를 보고 씁쓸한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1등만 사는 세상, 아마도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싸움과 미움 속에서 자신도 자멸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멸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1등은 한 사람 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또 나눔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나눔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나눌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질만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나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의 마음, 친절, 미소, 아름다운 말, 격려, 칭찬, 봉사와 희생 등 물질이 아니라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나눌 것이 없다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죽은 사람만이 나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쁨이 따르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주는 기쁨은 받는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알아주시고 갚아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을 통해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큰사랑이며 큰 기적을 낳는가를 깨달으면서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려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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