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펌] 낙태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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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 이승헌 [leoloups] 200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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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살인 백서 - 한 산부인과 간호사의 고백★
머리를 으깨 끄집어내는 경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끄집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별다른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막상 끄집어낸 태아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이물질이 들어오면 살기 위해
자궁 안을 필사적으로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여기 저기 충격이 가해져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특히 다리 부분은 시커멓게 죽어있다.
그런 태아들을 보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측은함이나 생명의 존엄성 따위보다는 몹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병원 분만실에는 미혼에다
나이 어린 간호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사(死)태아 처리를 모든 꺼려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애들을 다그치기 보다
차라리 내가 처리 하는게 낫지 하는 생각으로
끝까지 일 처리를 담당했다.
그렇게 꺼낸 태아들은 바로 한지에 싸서 냉동창고에 넣어두면
死태아 처리를 하는 인부들이 와서 거두어 간다.
골프백과 함께 딸려 나온 태아는 대부분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쉽지만 손가락으로 끄집어내면
태아가 가끔 살아 있는 경우도 있다.
곧 죽을 것이 뻔한 그 태아들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잠시 숨을 쉰다.
그러나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 채 곧 숨이 끊어지고
死태아 처리반으로 직행하게 된다.
골프 백으로도 처리가 안되고 손으로
끄집어낼 수도 없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발이 아니라 머리 쪽이 자궁을 향하고 있으면
잡아당기기가 힘들기 때문에
링펄셉을 이용해 끄집어 내야한다.
하지만 그것도 안되면 자궁 안에서 분쇄를 해야 한다.
특히 머리를 분쇄하여 흡입기로 빨아 당긴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아이를 끄집어 내놓고 보면
그 참혹함에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나는 그런 수술이 있는 날 밤이면 꼭 기분 나쁜 꿈을 꾸곤 했다.
크고 검은 드럼통 옆에 서서 끝없이 아이들을
그 속으로 던지는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 한 밤중에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분만실에 근무하는 조산사인 이상
그런 일을 피해 갈 수는 없는지라 나는 대부분
무감각하게 그 일을 하려고 애썼다.
좀 더 신속히, 좀 더 깨끗이 일 처리를 하는 것으로 나를 달랬다.
그리고 남을 대신해 내가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6개월 이상 되어 유도 분만을 하는 경우 분만 때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제왕절개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20대 후반인 임신 8개월의 이혼녀는 이제 아이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낙태를 해달라고 망설임 없이 얘기했다.
그러면서 고통을 느끼기 싫으니 아예 제왕절개로 해달라는 것이다.
8개월인 경우 제왕절개를 하면 아이가 살아 있을 확률이
대부분이므로 마취를 심하게 하여 아이를 죽게 한 후 수술한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살해되는 아이들..
개인병원에 있을 때는 보통 이틀에 한 번은 이런 수술을 했다.
내가 5년 5개월 동안 산부인과에 근무하면서
평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유도분만을 통한
낙태아 처리를 했으니 얼마나 많은 아이가 무참하게
죽어 가는 일에 힘을 보탰는지 모르겠다.
보통 3개월 이전에 낙태를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性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임신을 한 것을 속히 알아차리고 깨끗이 처리하기를 원한다.
6개월이 넘어서 유도 분만을 통해 낙태를 하려는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미 딸을 둔 부부가 다시 딸을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낙태를 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청소년들이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되어 뒤늦게 병원을 찾는 경우이다.
어느 날 딸들을 가진 부부가 만삭의 몸으로 병원을 찾아와
낙태수술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생활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고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딸은 둘이면 충분하니 낙태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 부인은 9개월이 가까워 오는 시점이어서 배가 남산만했다.
유도분만을 한 후 산모는 회복실로 옮겨갔다.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기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충격에 의해서
죽게 마련이나 그 아기는 살아 있었다.
죽어야 할 아기이므로 태어나면 누구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간호사들이 약이나 주사기를 담는 스테인레스 통을
바트라고 부르는데 거기다 담아서 한쪽에다 밀어 놓는다.
그날 유도 분만으로 태어난 아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 놓았다. 우유도 안주고 목욕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방치하면 대부분의 아기들은 곧 죽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른 병실을 둘러보고 돌아와 보니
어린 간호사들이 난리가 났다.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기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였다.
나는 곧바로 아기에게 달려가 보았다.
쌕쌕 숨소리를 내는 그 아기는 분명 살아 있었다.
순간 이 아기를 살려 입양기관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기를 더운물에 씻기고 배꼽처리를 한 다음
인큐베이터에다 넣었다.
세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지라 아기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따듯한 물주머니를 만들어 발치와 몸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기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 10시쯤 전화가 왔다. 아기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 아기를 처리하기가 무서운 간호사들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아기는 가련하게도 죽어 있었다.
나는 그 아기를 정상적으로 태어났다가 죽은 아기와 마찬가지로
솜으로 여기저기 막고 잘 싸서 냉동창고에 넣어 주었다.
너무나 쉽게 아기를 죽이는 부모
간혹 살아서 나오는 아기들을 보면 주로 여자 아기들이다.
여자들의 생명력이 질기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간혹 미숙아들이 태어나면 인큐베이터에다 넣는데
그럴 경우에도 여자아기들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살아서 나온 아기들 때문에 일을 치르고 나면
가슴은 아프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단지 그런 아기들을 처리하면서 다시 세상에 온다면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라고 마음속으로 빌어준다.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몇 개 있는데
난쟁이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기가 죽었다고 말한 후
우리에게 아기를 없애달라고 하였다.
당시만 해도 나는 입양기관이 어디 있는지 잘 몰랐고
내가 주도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입장이 아닌지라
의사의 지시에 그대로 따르는 편이었다.
갓 태어난 난쟁이 아기는 한 모금의 우유도
먹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이므로 병원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트에 넣어 그냥 두면 그 아기는 그대로 죽어버리고 만다.
입양기관에서도 기형아들은 데려 가지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아기들을 입양시키기도 사실은 힘든 일이었다.
또 한번은 항문이 없는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는 몇 번에 걸쳐 수술을 해야만
정상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다고 했다.
수술비만 해도 3천만 원이 든다는 얘기였다.
그 아기의 부모는 그 정도 돈을 들일 수 없다면서
아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 아기에게는 아주 조금씩 우유를 주었다.
많이 먹을수록 일찍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아기는 더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그 아기는 사흘만에 얼굴이 노랗게 되어서 죽고 말았다.
그 후에도 단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분만 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낙태를 시켜 달라는 부인들을 수없이 만났다.
8개월이 지나 명백히 딸이라고 판정이 되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낙태를 하는 것이다.
보통 3개월 이전에는 간단히 흡입기로 수술이 되기 때문에
살인이라는 생각을 별로 가지지 않지만 6개월 이상 되는 태아를
유도 분만하는 행위는 명백한 살인 행위임을 부인할 수 가 없다.
나는 눈 코 입이 선명한데다 손발이 버젓이 있는 그 아기들을
끄집어낼 때마다 아기를 살인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 작을 뿐인 그 아기들은 갓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가 별로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들 선호사상과 인명 경시 풍조로 인해
불과 두 서너 달 후면 태어날 아기들이 무참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방을 들고 병원 찾는 여고생도 고등학생들도
유도 분만을 통해 낙태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이 임신을 하는 때는 주로 크리스마스와 바캉스 철이다.
임신중절 수술을 하러오는 아이들의 달수를 따져보면
대부분 그때 임신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아이들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다급해지면 달려와서
울면서 낙태를 시켜 달라고 말한다.
그때는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와 함께 와서
낙태를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간단한 낙태수술은 6만원 선이었고
유도분만은 50만원 선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1학년인 두 아이가 일을 벌려
여자아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주변에 알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복부를 동여매는 데만 급급했다.
원래 아이가 좀 뚱뚱해 어머니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했다.
더 이상 숨길 처지가 되지 못한 아이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일을 털어놓았고
급기야 남자쪽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꽁꽁 매놨던지 태어난 아기가 2.45 kg밖에 되지 않았다.
아기는 입양기관에 넘기기로 하였다.
문제는 남자 쪽 어머니 태도에 있었다.
두 집 다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는데
남자 쪽은 행여 수술비를 내야 할까봐 지레
발을 빼려고 안간힘이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러냐는 식이었다.
딸 간수를 잘해야지 도대체 이게 뭐냐고 오히려 큰 소리였다.
여자 쪽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수술비만 좀 보태달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보다 못한 내가 남자 쪽 어머니를 병원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당신 아들은 아무 고통도 당하지 않는데 저 집 딸은 어떠냐,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분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그리고 10개월 간의 악몽이 지워지겠느냐.
돈 몇 푼이 아까워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해서 되겠느냐.”
내가 마구 다그치자 그제야 아주머니는 잠잠해졌다.
나는 악착같이 남자 쪽 어머니에게 수술비를 받아냈다.
단 한번의 실수라던 말대로 처녀막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여학생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병원에 있으면 별별 일이 다 많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 얼굴이 두꺼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떼지어 병원으로 들어오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아이들은 수술하러 들어가는 아이를 무슨 환송식 하듯
뒤에서 재잘거린다. “잘하고 와, 별거아냐”
뭐 그런 말을 한다.
그리고는 수술이 끝나고 나면 간단한 주사라도
한방 맞고 나온 것처럼 대단찮게 여기며
“아팠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쩌구 하면서 수선을 떤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병원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해진다.
. . . . . . . . . . . . . . . . . . . . . .
무지에 의한 범죄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다 생각됩니다.
돈버는 광고나
무턱대고 도와달라는 것보다
이런 글을 많이 뿌리는 것이 네티즌의 힘을 옳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이라 생각되기도 하구요..
많이 뿌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