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림 제 3주간 토요일 루카 1,57-66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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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 이성훈 [totoro] 200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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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에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던 즈카르야는
세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되는 벌을 받습니다.
그것은 지난 강론에서 말씀 드렸던것 같이,
우리들이 하느님께 드릴 말씀보다, 들어야 할 말씀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즈카르야는 말을 못했지만, 친척들이 엘리사벳의 말을 거슬러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라고 말할때
석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 이라고 써줍니다.
그때 비로소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는데, 그 첫 말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부모의 고유한 권한 입니다. 또한 그것은 좋은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자 요한은 부모님에게서 났으나,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사람이었기에,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을 거부합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을 수용합니다.
세속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을 추구함에서 정화될때,
우리는 온전히 '하느님의 것' 이 됩니다.
이제 즈카르야는 말못함의 고통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것만을 추구하고,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며,
그의 모든 말씀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변모합니다.
즈카르야의 고통은 즈카르야가 완전히 하느님께 나아가는데에 공헌을 합니다.
나의 고통은 지긐 어떤 결과를 주고 있습니까?
고통에 짓눌려서
그럼에도 아직도 세속적인것과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로서 하느님의 것이 되지 못하고,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 되려 하느님께 대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언제 변모하겠습니까?
...
...
...
바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고통... 그 안에서 나는 변모합니다.
외적인 동시에 내적인 침묵속에서,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것이 고통이니 그 고통의 침묵 안에서
아기 그리스도와 함께 변모하시길 바랍니다.
즈카르야의 침묵의 고통속에서
성탄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곧 눈으로 뵈올 그리스도의 탄생...
그것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 성탄의 확증일 따름입니다.
새로 변모, 아니 통째로 새로 태어나십시오.
그러기에 먼저 눈앞의 고통을 십자가의 상처로 껴안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실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