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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일]종말을 기다리며(루카 21,5-19)

187 김종업 [rlawhddjq] 2019-11-17

 [연중 제33주일]종말을 기다리며(루카 21,5-19)

 

말라키 예언자는,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와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불살라 버리리라고 한다. (말라3,19-20ㄴ)
19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20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화답송 시편 98(97),5-6.7-8.9(◎ 9 참조)
◎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 소리쳐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강들은 손뼉 치고, 산들도 함께 환호하여라. ◎
○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 ◎

 

바오로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며,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으라고 한다. (2테살 3,7-12)
형제 여러분,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11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12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온다고 하시며,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다. (루카 21,5-19)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연중 제33주일 제1독서(말라3,19~20ㄴ)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20)

 

말라기 3장 19절에서는 주님의 심판이 최종적으로 실현될 그 날에 악인이 처할 궁극적 운명이 무엇인지를 다루었다.

그것은 완전한 파멸이었다.

이제 말라기 3장 20절에서는 심판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그 날에 의인이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제시된다.

이처럼 악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날은 반대로  의인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을 도래케 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제시되는 주요한 예언의 패턴인데,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악인의 패망과 의인의 궁극적 승리를 병렬시켜 쌍으로 제시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여기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조되는 존재를 '의인' 또는 '겸손한 자'로 표현하지 않고,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로 표현하신다.

이것은 말라기 3장 16절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이러한 표현은 말라기서 전반에 제시된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악인들이 죄를 고집하고 악을 자행하는 이유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심판의 대상인 악인들과 대조되어 하느님의 축복의 대상으로 나오는 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로 표현되는 것은 적절하다.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종말론적 심판의 날에 악인은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지만,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와 반대로 복을 받게 된다.

 

여기서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르리라'에 해당하는 '웨자레하 ~셰메쉬 체다카' (wezareha ~shemesh tsedakqah; but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두 가지 대표적인 견해가 공존하는데, 하나는 의로움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공의로운 날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어떤 번역본은 여기의 '태양'(해)을 의미하는 '셰메쉬'(shemesh)대문자 'S'를 사용해 'Sun'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이 태양을 그리스도로 본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런데 문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의로움의 태양'으로 표현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와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빛'으로 묘사하는 실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요한1,4.8.9; 8,12; 12,46).

이 사실을 감안하면, 본문은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강생(육화)과 재림의 양자의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둘 수 있지만, 후자인 재림에 보다 무게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치유'는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치유, 영육간의 온전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재림하심으로 모든 의인들은 그 동안의 아픔과 괴로움을 모두 치유받고, 영육간에 온전히 회복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전통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견해는, '의로움의 태양'이라는 표현에서 '태양'이 아닌 '의로움'에 초점을 맞춘 표현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의로움의 태양이 ~ 떠오르리라'는 표현은  모든 어두움과 슬픔, 부조리와 불법을 물러가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날이 밝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과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어두움의 날, 고통의 날, 슬피울면서 이를 가는 날, 화덕(용광로) 속의 지푸라기처럼 완전히 타버리는 날이 될 것이지만,

 

의로운 사람들과 주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정당성을 인정받는 날, 억울함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날, 모든 눈물이 씻겨지는 회복의 날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의로움'이라는 표현을 '승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지금 현재 보고 있는 패배와 굴욕의 날이 끝이 나고, 승리와 영광의 날이 온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 '날개에 치유를 싣고'에 해당하는 '우마르페 삐케나페하'(umarpe bikenapeha; with healing in its wings)'그 날개들 안에 있는 치유'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날개에'에 해당하는 '삐케나페하'(bikenapeha)는 직역하면, '그 날개들 안에'라는 뜻인데, 이것은 태양에 날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태양에서 퍼져 나오는 광선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태양을 묘사할 때, 광선을 상징하는 여러 날개달린 원반 물체로 묘사했다.

특히 구약에서 '날개'를 뜻하는 '카나프'(kanap)끝이나 가장자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는 데(시편104,2; 호세4,19),  여기서도 태양의 가장자리에 있는 광선이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중 제33주일 복음 (루카 21,5-19)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들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곳이다." (5~6)

루카 복음 21장 5~19절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의 여러 징조들,

그리고 대박해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이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을 하신 후, 그 일이 언제 일어나는지 그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시고, 대신에 전쟁, 반란, 민족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천체의 큰 표징 등의 종말론적인 징조들 (Eschatological Signs)을 언급하신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대박해를 겪어야 할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신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예언 성취의 시기를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예언이 성취될 때에 가져야 할 바른 자세에로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키신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더불어 종말의 징조들이 복합적으로 예언됨으로써, 대박해를 겪어야 할 자세에 대한 교훈은 당시 제자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종말의 시기를 살아갈 성도들에게도 확대되고 있다.

 

루카 복음 21장 5절~19절까지는 성주간의 올리브산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태오 복음 24장과 25장 및 마르코 복음 13장과 병행을 이루며,예루살렘 성전 파괴 및 종말과 그리스도 재림에 관계된 예언들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소묵시록'(Little Apocalypse)이라는 별명이 불려지기도 한다.

그중에 21장 5절과 6절은 올리브산 설교가 주어진 동기가 되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은 일차적으로 A.D.70년에 발생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예언을 성전 안에 계시다가 성전 밖으로 나오실 때 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마태 24,1; 마르 13,1), 루카 복음사가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계속적으로 머무르시면서 주신 것처럼 묘사한다.

 

루카 복음사가 성전에서 나갔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또한 몇몇 사람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며 질문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성전 내부에서 자세하게 볼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렇게 다르게 기록한 것은, 지금까지 성전 안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들과 치열한 논쟁의 절정으로써 성전 멸망을 다룸으로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맞이할 최후의 심판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대교의 구심점이 되는 성전이 붕괴된다는 것동물의 희생을 통한 구약의 제사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단 한 번 흘리신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과 더불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잘못된 신앙에 대한 심판적인 의미도 가진다.

그리고 루카 복음 사가는 장소적 이동보다는 등장 인물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 시킴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성전의 화려한 외적인 아름다움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신앙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두 렙톤과 같은 경건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의 진실된 신앙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한편, 루카복음 21장 5절의 '아름다운 돌'로 변역된 '리토이스 칼로이스'(lithois kalois; beautiful stones)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된 희고 큰 대리석을 말한다.

이 돌은 주로 성전의 기초와 기둥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자원 예물'로 번역된 '아나테마신'(anathemasin; gifts dedicated to God)원형 '아나테마'(anathema)'아나티테미'(anatithemi)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성전에 바쳐진 물건', '봉헌된 제물'을 가리킨다.

이 자원 예물들은 임금이나 지도층에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성전에 바친 물건으로서 성전을 장식하고 전시하는 데 사용된 물건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이 아니라 영과 진리안에서 영이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었다(요한 4, 20~24).

루카 복음 21장 6절의 '때가 올 것이다'에 해당하는 '엘류손타이 헤메라이' (eleusontai hemerai; the days will come)에서 '때', '날' 번역된 '헤메라이' (hemerai; the days; the time)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예비된 날로서 바로 하느님의 진노가 현실 가운데 드러나는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A.D. 70년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토(Titus)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성전이 화염에 휩싸여 전소될 때를, 40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예지 능력으로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라는 표현은 철저한 파괴와 멸망에 대한 예언인데, 루가 복음 사가는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 사가에 비해서 성전 파괴가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오해를 막기위해서 성전 파괴를 마지막 날들에 일어날 많은 종말적인 사건들 중 하나로만 기록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후에,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바로 이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것을 기다렸다.

루카 복음 사가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상황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의 도래를 분명하게 구분함으로써, 재림의 자연이 예수님의 예언과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밝히며, 또한 인내심으로 기다리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루카21,20~28).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6~19)

 

루카 복음 21장 16절종말의 기간 동안 성도들이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당할 핍박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가르치셨고(루카12,52.53; 마태10,21.22), 예언자 미카의 예언에도 나오는(미카7,5.6), 종말에 나타날 징조로서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코과 마태오 복음 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가족 뿐만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의 핍박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실 인간적인 유대 관계가 없는 타인으로부터의 박해와 비교해 볼 때,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의 박해와 배신은 참으로 인내하기 어려운 핍박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기간에 인간 사회를 지탱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끈이요 세포 단위인 가족 관계까지 파괴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제 루카 복음 21장 17절에서 종말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박해할 주체가 가족과 친지로부터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여기서 '모든 사람'에 해당하는 '판톤'(panton; all men)그리스도인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 또는 민족(마태24,9)을 말한다.

그리고 '미움'으로 번역된 '미수메노이'(misumenoi)의 원형 '미세오' (miseo; hate)'증오하다', '무시하다'는 뜻인데, 무관심과 업신여김, 멸시, 경시 적극적으로 증오하는 미움을 가리킨다. 이것은 원수에 대한 감정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단어이다(마태5,43).

또한 이러한 박해의 원인이 바로 '내 이름 때문에'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루카 복음 21장 18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신앙인들에 대한 완전한 보호의 약속도 함께 나온다.

'머리카락'으로 번역된 '트릭스'(thriks; an hair)사람의 머리털,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성경에서 하느님의 보호하심의 완벽함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마태5,36; 사도27,34; 1사무14,35; 2사무14,11; 1열왕1,52).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이 앞에 나열된 핍박의 내용과 모순되는 듯이 보이지만, 이러한 하느님의 보호하심은 영적인 의미 알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땅에서 육적으로 아무리 심한 박해를 받고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인 '영혼'은 어떤 상함이나 변형이 없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고, 여기서 '너희'를 '교회'로 알아들어 종말에 어떤 박해가 있어도 '하느님의 교회'는 온전히 보호받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끝으로, 루카 복음 21장 19절종말 기간 동안 성도들이 받을 고난(루카21,12~19)대한 결론인 동시에, 루카 복음 21장 18절에 대한 보충 설명에 해당한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병행 구절에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한 반면에(마태24,13; 마르13,13), 루카 복음사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네'(hyphomone; patience)무거운 짐이나 힘든 시련과 박해의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는 을 나타낸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휘포메이나스'(hyphomeinas)라는 동사를 사용한 반면에, 루카 복음사가 이 단어의 명사형을 사용했다.

그리고 '얻어라'로 번역된 '크테사스테'(ktesasthe; passess; gain)의 원형 '크타오마이'(ktaomai)'소득을 가지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영혼의 참 생명을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루카 복음사가 종말에 모든 박해를 견디는 '인내'가 곧 '영혼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밝혀서, 박해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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