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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3일 (화)부활 제4주간 화요일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신부님강론
연중 22주일 (가해)

194 양권식 [ysimeon] 2008-08-30

연중 22주일 (가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무더운 여름을 뒤로하는 8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동시에 연중 2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메시아 고백을 전해 주던 지난 주 복음에 이어 나오는 메시아의 수난 예고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이와 같은 수난 예고는 마태오 복음에서 세 번 나오는데 오늘 복음의 구절이 그 첫 번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들으며 예수님의 아주 엄한 모습을, 단호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지난 주“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메시아 고백을 수용하신 예수님이 곧이어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적극적으로 말립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일갈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다 알고 계신 것 같이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대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더라면 예수님의 죽음은 참다운 인간의 죽음이 아닐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는 부활을 전제로 하는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분이 죽음을 피하다가 잡혀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당신 전체를 인간구원을 위하여 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가짜로 죽은 척 한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생각했던 메시아 관(觀)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는 메시아 관(觀)의 현격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영광과 권위의 메시아, 구세주를 생각하였던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십자가의 메시아로서 당신의 미래를 예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메시아란 말의 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는 자격과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메시아를 의미했기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거기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을 때, 그가 바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메시아란 칭호를 붙여 주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해방자로서의 메시아입니다. 이와 같은 메시아 觀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지 오래되었고 로마의 식민 제국주의적 억압과 로마 괴뢰정권인 헤로데의 독재의 짓밟음이 극에 이르렀기에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그만큼 더 절실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예수님에게 쏠렸던 것은 당시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베드로가 이러한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전제하고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고백에는 예수님에게 그리스도가 되어 달라는 정치적 해방자가 되어 달라는 민족적 여망과 바람이 담겨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군사력, 영도력, 경제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고 부흥시키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달라는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당시 집권층인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초를 겪게 될 것이며 그들의 손에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베드로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도무지 받아드릴 수도, 받아드려 서도 안 되는 말씀이었고 만류할 수밖에 없었던 간절함이 담겨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만류는 이러한 시대적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던 바로 그 극언을 서슴치 않으십니다. 이는 곧 돌이 빵이 될 수 없듯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과 부흥이 절대로 구원을 담보할 수 없음을 가르치는 단호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람의 뜻대로 잘살게 된다고 해서, 권좌에 있다고 해서, 학식과 학벌이 높고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통이 없어지고, 늙지 않고, 죽지 않음이 구원된 상황도 아닙니다. 무사 안일과 구원이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통일이 된다고 해도, 국민소득 이만 불이 넘어선다 해도 절대로 그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못함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게 되면 마치 이러한 것들이 생명을 바쳐 얻을 구원이라도 되는 양 일반적 착각이나 환상에 젖어 있는 듯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형제자매 여러분! 시인 김지하 씨의 한편의 희곡 “금관의 예수”가 생각납니다. 이 희곡의 주역은 경제와 정치로부터 소외당한 문둥이, 거지, 창녀가 등장합니다. 이들이 허기진 배와 상처받은 마음으로 추운 낮과 두려운 밤을 지내면서 3장이 시작됩니다. 술 취한 문둥이는 메마른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어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못 견디겠네. 차디찬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하며 자탄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다가 문둥이 옆에 세워진 금관을 쓴 예수님의 콘크리트 상을 발견하게 되고 이때 그의 자탄은 분노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 팔아 천년만년 잘 해 처먹어라. 나하곤 상관없다, 소용없다. 소용없어” 하고 침을 뱉습니다.

그러자 콘크리트 예수님 상(像)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니다, 너와 난 상관있다.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이 시멘트 속은 너무도 어둡고 적적하다. 나도 너처럼 가난한 이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너와 함께 고통을 겪고 싶었다. 나는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너의 고통 속에서 고통 받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니 날 이 금장식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겠느냐? 교회는 나를 가난한 이들로부터 격리시켰고, 금빛 찬란한 옷을 입혀 성전 안에 안치해 놓고, 우렁찬 설교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나를 좀 구해 다오.”

이 소리를 들은 문둥이는 예수님을 불쌍히 여겨 예수님을 콘크리트 감옥에서 해방시키고자 금관을 벗깁니다. 그 순간 교회의 권익을 대변하는 신부와 국가의 경제발전을 의미하는 사장,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순경이 무대로 뛰어오르며 외칩니다. 신부는 엇, 예수님의 관인데, 사장은 엇, 내 금관이, 순경은 엇, 절도로구나 외치며 셋이 문둥이를 덮쳐 순경이 금관을 문둥이에게서 가로채고, 사장이 이것을 또 가로채고, 신부가 또 이것을 가로채서 눈 깜짝할 사이에 예수의 머리 위에 다시 씌워 버립니다. 이에 찡그리는 예수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문둥이, 창녀, 거지의 “안 돼” 하는 외마디 소리가 들리며 조명이 꺼지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는 정치적 메시아를 찾고 있으며, 나타나기만 하면 언제든 그에게 권력과 권위를 넘겨주고 자신을 통치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고난 받을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바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정화될 수 없고, 교정될 수 없으며, 하느님께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고통을 통하여 인간을 돌보십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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