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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몸짓과 언어 - 윤경재

111 윤경재 [whatayun] 2010-12-27

 
 

사랑의 몸짓과 언어 - 윤경재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2-8)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을 가장 가깝게 다가갈 때가 사랑을 실천할 때라고 합니다. 사랑은 인간의 감성과 영혼을 동시에 풍성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감성과 영혼을 함께 고양시키지 못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위대한 힘을 아는 악마는 인간이 수월하게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게 하려고 한 가지 덫을 놓았습니다. 인간이 모두 하느님께 돌아서는 모습을 도저히 두 눈뜨고 바라볼 수 없는 악마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자칫 이기심으로 흘러가도록 걸림돌을 숨겨 놓았습니다. 불순물을 한 방울 섞어 놓았습니다.

사랑은 본래 에너지요,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합니다. 게다가 처음보다 더 나은 열매를 맺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 방향성은 이웃을 위한 자기 공여의 행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올바른 방향은 자기를 향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합니다. 그럴 때 사랑은 자기를 넘어서는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악마는 이 사랑의 방향을 살짝 바꾸어 자기를 향한 행위도 사랑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였습니다. 에너지와 힘을 갖춘 사랑의 속성은 그대로 나둔 채 방향만 살짝 바꾸어 타인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흔히 사랑이 지나치면 미움이나 증오가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과 증오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이 바로 악마의 장난입니다. 사랑은 본래 변하지 않는 것인데 오염된 행위도 사랑이라고 여기게끔 악마가 꾸며 놓았습니다. 진실을 왜곡해 놓았습니다. 사랑이 자기를 향할 때 타인을 해치는 엉뚱한 힘을 발휘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아주 무서운 결과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가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그 상대 사람을 원망하는 경우를 봅니다. 더 지나치면 증오하는 때도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온갖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나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질투하는 때도 있습니다. TV 드라마나 신문, 소설 속에서 이런 행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독자를 유혹합니다. 이런 행동이 전혀 사랑이 아닌데도 사랑이라고 착각하게 오도한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숫한 유행어가 난무합니다. ‘사랑은 바뀐다.’ ‘사랑은 흐르는 법이다.’ ‘사랑에 대해 고뇌해 본 사람은 잘못된 사랑을 비난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등등 수없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창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행어들 속에 부족한 한 가지는 사랑의 정방향성입니다. ‘타인을 위한 자기 공여’가 빠진 사랑은 더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 부를 자격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이런 유행가와 같은 사랑의 속삭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세 가지로 나누어 불렀습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는 필리아와 아가페라는 단어만 나옵니다. 에로스란 단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에로스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에로스가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로스는 자칫 그 방향이 자신에게 향할 수 있습니다. 에로스에 탐닉하다 보면 자신의 쾌락과 유익을 쫓아 타인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큽니다.

신약성경에서 요한계 문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을 우리는 사랑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요한 사도가 주님의 사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사랑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구약에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예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셨는지 자주 간과하고 넘어갑니다. 그것은 사랑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기에 새 계명이며, 무엇보다 예수께서 보여준 사랑을 그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에 새 계명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이며, 본질적으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께 받은 사랑 덕분에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선언을 분명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금세 알아보았습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라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던 요한은 남다른 행동을 취합니다. 좀 더 빨리 예수님께 달려가고픈 마음에서 빈 무덤에 먼저 도착하였지만, 이웃을 위해 양보하는 사랑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베르로보다 앞서 “보고 믿었다.”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요한1서 4,12)

이제 우리는 사랑의 완성을 위해 사랑이라는 말을 가려 써야 하겠습니다. 아무 데나 사랑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사도 요한이 증언한 사랑만이 우리가 찾고 따라야 할 올바른 길임을 고백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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