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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7월 15일 (화)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보나벤투라 (Bonaventure)
    같은이름 보나벤뚜라 , 보나벤처
    축일 7월 15일
    신분 추기경 , 신학자 , 교회학자
    활동연도 +1274년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1217년경 또는 1221년경에 이탈리아 중부 라치오(Lazio) 지방의 비테르보(Viterbo) 근처 치비타 디 바뇨레지오(Civita di Bagnoregio)에서 의사인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라(Maria di Ritella)의 아들로 태어나 조반니 디 피단차라는 이름을 얻었다.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그는 수도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이름을 ‘보나벤투라’로 바꿨는데,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게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비슷한 전설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병든 아들을 데리고 성 프란치스코에게 가서 축복을 받고 치유 받은 후 성 프란치스코가 임종을 맞이하던 1226년에 건강해진 아이를 데리고 갔을 때, 성 프란치스코가 “오, 부오노 벤투라”(O buono ventura, 오, 행운이여/오, 좋은 미래여)라고 외쳤고, 거기서 따서 그의 수도명을 지었다고 한다.

       성 보나벤투라는 1236년경에 파리(Paris)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1238년경 파리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일반 과목에 이어 신학을 공부했는데, 대표적인 그의 스승으로는 영국의 작은 형제회 소속으로 ‘반박할 수 없는 선생님’(Doctor Irrefragibilis)으로 불리던 헤일스(Hales)의 알렉산데르(Alexander)를 들 수 있다. 그는 성 보나벤투라에게 ‘스승이요 아버지’였을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학부 과정을 마치고 1248년 사제품을 받은 후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경에 대해 가르쳤다. 1253년부터 그는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월 28일)와 함께 파리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한 연구소에서 교수로 활동했는데, 이 연구소는 나중에 파리의 소르본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로운 탁발 수도회(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소속 교수들이 파리 대학교의 교수직을 잠식한다는 일반 교수들의 반대로 인해 그들은 정식 교수로 인정받지 못하고 강의도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대표적인 반대자로 생타무르의 기욤(Guillaume de Saint-Amour)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새로운 탁발 수도회를 반대하는 소책자 “세상 종말의 위험에 관한 간략한 논고”(Tractatus brevis de periculis novissimorum temporum)를 썼다. 성 보나벤투라는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해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복음적 가난에 관한 논문인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하여”(De paupertate Christi)를 저술해 수도회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결국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해 1256년에 생타무르의 기욤을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멈추도록 했다. 1257년 8월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뒤늦게 파리 대학교로부터 인정을 받아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식으로 교수 직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성 보나벤투라는 그해 2월에 이미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교수직을 계속 할 수는 없었다.

       성 보나벤투라는 학자로서, 또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서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학자로서는 신생 수도회를 비판하는 외부 세력으로부터 수도회를 옹호해야 했고, 수도회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고 화해와 일치를 도모하였다. 또한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극단적인 주장도 물리쳤다. 그는 1260년 나르본(Narbonne)에서 열린 수도회 총회에서 오랫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미칠 회칙을 개정했고, 창설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새로 작성하여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를 발표하였다. 그는 탁월한 능력으로 수도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두 번째 창설자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는 교회 안팎의 이단적 사상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학술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는 1265년에 그를 영국 잉글랜드 요크(York)의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수도회 사정상 수락할 수 없어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1271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선종 후 3년째 공석이었던 교황좌에 복자 그레고리오 10세(Gregorius X, 1월 10일)가 선출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는 1273년 5월에 그를 로마(Roma) 근교 알바노(Albano)의 교구장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성 보나벤투라는 다음 해인 1274년에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제2차 리옹(Lyon) 공의회를 준비하라는 부탁을 받고 동방 정교회와 서방 교회의 화해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공의회 넷째 회기 중인 1274년 7월 15일 리옹에서 선종하여 그곳에 있는 작은 형제회 성당에 묻혔다. 1434년에 그의 유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리기 위해 리옹에 새로 지어진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리옹 사람들은 성 보나벤투라를 특별한 수호성인으로 추대했고 그의 시성 절차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교황 식스토 4세(Sixtus IV)는 1482년 4월 14일에 성 보나벤투라를 성인품에 올렸고, 1588년 3월 14일에 교황 식스토 5세(Sixtus V)는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면서 ‘천사와 같은/세라핌적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칭호로 불렀다. 성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베드로 롬바르드의 명제집에 대한 주석”(Magistri Petri Lombardi),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Legenda maior Sancti Francisci),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 “세 갈래의 길”(De triplici via) 등 철학과 신학 · 영성 서적을 비롯해 성경 주석서와 수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하다. 교회 미술에 그의 상징은 추기경 모자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1482년 시성식 이후 로마 보편 전례력에 포함되었고, 그가 선종한 날인 7월 15일에 성 헨리코 2세(Henricus II, 현재는 7월 13일)의 축일을 함께 기념하게 되면서 7월 14일로 옮겨 오랫동안 기념해왔다.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은 선종한 날인 7월 15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14일 목록에서 알바노의 추기경이자 주교이며 작은 형제회의 박사였던 성 보나벤투라가 리옹에서 선종했는데, 그는 학문과 거룩한 삶으로 유명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5일 목록에서 알바노의 주교이자 교회 학자였던 성 보나벤투라의 선종 기념일을 소개하며 학식과 거룩한 삶 그리고 교회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탁월한 업적을 보였다고 했다. 또한 그는 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작은 형제회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현명하게 이끌었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뛰어난 학식과 열렬한 신심을 증명했으며 제2차 리옹 공의회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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