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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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그레고리오 7세 (Gregory VII)
같은이름 그레고리 , 그레고리우스 축일 5월 25일 신분 교황 활동연도 +1085년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1020년경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소바나(Sovana)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힐데브란트(Hildebrand)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 로마(Roma)로 가서 삼촌이 아빠스로 있던 아벤티노(Aventino)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오늘날의 산타 마리아 델 프리오라토[Santa Maria del Priorato] 성당)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라테라노(Laterano) 학교에서 요한 그라시아노(Johannes Gratianus)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는데, 스승이 후일 그레고리오 6세 교황(1045~1046년 재임)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교황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1046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폐위되었을 때 교황을 수행해 쾰른(Koln)으로 갔다. 그리고 교황이 선종한 후 성 오딜로(Odilo, 1월 1일)가 지도하던 클뤼니(Cluny) 수도원에 머물렀다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1049년 툴(Toul)의 주교인 브루노(Bruno)가 성 레오 9세(Leo IX, 4월 19일) 교황으로 등극하자 그는 교황의 불림을 받고 다시 로마로 가서 차부제품을 받고 교회의 재정과 성 바오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수도회 개혁을 담당하게 되었다. 1054년에 그는 상스(Sens) 교회 회의를 주재하여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를 단죄하였고, 니콜라오 2세(Nicolaus II) 교황 때에는 교황 칙서 발간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1073년 4월 21일 교황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가 선종하자 대중의 환호 속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즉위한 그는 전임 교황들을 도와 자신이 추진해왔던 교회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성직매매의 죄를 들어 밀라노(Milano)의 대주교를 면직하면서부터 교회 규율을 바로잡고 성직자의 생활을 쇄신하고자 했다. 1075년에는 전년도에 열린 로마 교회 회의에서 반포한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에 대한 금령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임명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는 또한 1075년 3월에 공포한 교황령에서 교회와 교황이 국가와 국왕보다 우위에 있다고 천명하며 교황만이 온전히 주교 서임권을 갖고 있고, 황제를 폐위할 권한까지 있다고 했다. 이는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의 대립을 가져왔다. 평신도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은 실제로 주교를 임명하던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인리히 4세 황제(1056~1105년 재위)는 이에 저항해 공석인 밀라노(Milano)의 주교를 임명하는 등 제국 내에서 주교와 수도원장 서임권을 행사하며 교황과 충돌했다. 교황의 강력한 경고와 봉신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이탈리아의 카노사(Canossa)로 내려와 참회복을 입고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 해제를 간청했다. 이 사건을 통해 교황은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 승리하며 황제의 권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서구 세계의 주도권이 황제에서 교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의 재임 기간에 복잡한 사건들도 많았으나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흔히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불리는 교회의 개혁 운동을 통해 교회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교황권을 크게 확립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 간의 일치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하인리히 4세 황제와의 대립으로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Salerno)까지 피신했다가 1085년 5월 25일 그곳에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살레르노의 성 마태오(San Matteo)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이 성당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의 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건립해 몇 주 전에 그가 축성한 곳이었다. 그의 무덤에는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유배지에서 죽는다.”(Dilexi justitiam et odivi iniquitatem propterea morior in exilio)는 문구가 새겨졌는데, 이는 그가 임종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는 1584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25일 목록에서 교회의 자유를 가장 열렬히 수호하고 옹호했던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가 살레르노에서 선종했다고 전해 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성 그레고리오 7세가 초기에는 힐데브란트라는 이름의 수도자로서 수도 생활에 정진했고, 이후 외교적 활동으로 당시 교황들의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베드로의 사도좌에 오른 후에는 확고한 권위와 용기로 교회가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주장했고 사제직의 신성함을 강력하게 옹호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로 인해 로마를 떠나야 했던 그는 살레르노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사상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으나 후임 교황들이 세속 권력과의 투쟁을 통해 교회의 자율성과 교황권을 확립해 나가면서 그 당시 교회 내에서 이루어진 대개혁은 그의 이름을 붙여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불리게 되었다.♣
- 성 그레고리오 7세 (Gregory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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