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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6년 6월 21일 (일)연중 제12주일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가톨릭 성인/축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Aloysius Gonzaga)
    같은이름 공사가 , 루도비꼬 , 루도비코 , 루도비쿠스 , 루이 , 루이스 , 루이지 , 알로이시우스
    축일 6월 21일
    신분 수사 , 신학생
    활동연도 1568-1591년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또는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Brescia)와 만토바(Mantova) 사이에 있는 카스틸리오네 델레 스티비에레(Castiglione delle Stiviere)의 후작인 페란테 곤자가(Ferrante Gonzaga)와 마르타 타나 디 산테나(Marta Tana di Sant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다소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사랑으로 성 알로이시오를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성 알로이시오도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심을 보였는데, 말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는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리고 무릎 꿇고 성모 마리아 기도문과 시편을 암송하기를 즐겨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맏아들인 성 알로이시오가 자기 뒤를 이어 군인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교사였던 피에르프란체스코(Pierfrancesco del Turco)는 성 알로이시오의 영혼과 정신을 길러 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577년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년 재위)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는 성 알로이시오를 피렌체(Firenze)의 대공 프란치스코 데 메디치(Francesco de Medici) 궁정의 시동(侍童)으로 보냈다. 그리고 2년 후인 1579년에 성 알로이시오와 그의 동생 로돌포(Rodolfo)를 만토바(Mantova)의 공작에게 보냈다. 여기서 사제직의 꿈을 키우던 성 알로이시오는 1580년에 고향 카스틸리오네로 돌아와 지내던 중 서재에서 성 베드로 가니시오(Petrus Canisius, 12월 21일)가 쓴 “소 교리문답집”(Catechismus minimus) 이탈리아어판을 보았다. 거기에는 매일 묵상글도 실려 있어 그것을 보고 기도하면서 예수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해 7월에는 여행 도중 카스틸리오네를 방문한 성 가롤로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 추기경을 만나 그에게 직접 첫영성체를 받았다. 1581년 오스트리아의 황후 마리아가 마드리드(Madrid)로 돌아갈 때 곤자가 가문도 함께 갔고, 성 알로이시오는 펠리페 2세 궁정에서 왕자 돈 디에고(Don Diego)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 후 왕자가 사망하자 1583년 8월 15일 성 알로이시오는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며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아들을 설득했다. 1584년 7월에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아버지와 가문의 친척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의 마음을 돌린 성 알로이시오는 1585년 11월 초에 동생 로돌포에게 가문의 계승권을 양보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11월 25일 로마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밀라노(Milano)의 예수회 분원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만토바에서 수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하여 잠시 집에 들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나폴리(Napoli)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예수회 로마 학원에서 철학을 배웠다. 1587년 11월 25일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를 가르치던 교수 중에는 당시 유명한 신학자인 가브리엘 바스케스(Gabriel Vazquez, 1549~1604년)가 있었고, 훗날 성인이 된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9월 17일)도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의 영성 지도신부였다. 성 알로이시오는 선교 활동과 순교를 꿈꾸며 사제직을 위한 준비를 이어갔다.

       신학을 공부하던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589년에 동생 로돌포와 만토바 공작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잠시 만토바에 갔다가 1590년 5월 로마로 돌아왔다. 그해 말에 그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환시를 보고 1년 안에 자신이 죽을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591년에 로마 전역에 페스트가 발생하자 예수회는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열었다. 성 알로이시오는 자원해서 그곳으로 가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간호하던 성 알로이시오는 이듬해 3월 초 자신도 페스트에 전염되어 투병하다가 병자 성사를 받고 8일 뒤인 6월 21일 23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Sant’Ignazio di Loyola) 예수회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탁월했던 그는 철학과 신학의 전 과목에서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반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정결에 대한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실천했다. 수련장 신부가 그의 지나친 금욕과 장시간의 기도를 저지해야 할 정도로 극기 생활을 철저히 했다. 이런 내적 수련 외에도 병원이나 감옥을 자주 방문하고 다른 사람과의 논쟁을 피하며 뛰어난 동료애를 보여주었다. 페스트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착실히 준비하였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의 시성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는 1605년 10월 1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31일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예수회의 수련자였던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Stanislaus Kostka, 8월 15일)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729년에 성 알로이시오는 같은 교황에 의해 젊은이와 신학생들, 특별히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926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그를 모든 그리스도인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을 잡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주위에 백합화나 해골 등과 함께 그려지곤 한다. 백합은 정결을 상징하는 꽃으로 특별히 성 알로이시오가 받은 정결의 은사를 상징하고, 해골은 회개와 보속의 삶을 의미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21일 목록에서 귀족으로서의 위엄이나 품격에 연연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한 예수회 소속의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로마에서 잠들었다고 전해 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귀족 혈통에서 태어나 순수함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인인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를 기념하는 날로, 그는 조상의 영지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로마에서 예수회에 입회했으나 페스트(역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몸이 쇠약해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이탈리아에서 성 루이지 곤자가(Luigi Gonzaga)로 불리는데, 이는 이탈리아 이름인 루이지의 라틴어 형식이 알로이시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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