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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6년 1월 5일 (월)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에두아르도 (Edward the Confessor)
    같은이름 애드워드 , 에두아르 , 에두아르두스 , 에두아르트 , 에드워드
    축일 1월 5일
    신분 , 증거자
    활동지역 영국(UK)
    활동연도 +1066년

       성 에두아르두스(Eduardus, 또는 에두아르도)는 1004년경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옥스퍼드(Oxford) 근처 이슬립(Islip)에서 영국 국왕 에설레드 2세(Ethelred II, 978~1016년 재위)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노르망디(Normandie)의 에마(Emma, 노르망디의 공작 리처드 1세[Richard I]의 딸이자 리처드 2세 공작의 누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에설레드는 이복형제인 성 에두아르도(3월 18일) 왕이 978년에 순교한 뒤에 왕위에 올랐다. 1013년에 덴마크의 왕 스벤 트베스케그(Svend Tveskæg)와 그의 아들 크누트(Knud)가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침략했을 때 에설레드 2세와 그의 아내 에마와 10살 정도의 성 에두아르도는 어머니의 고향인 노르망디로 도망쳐 리처드 2세 공작의 보호를 받았다. 스벤 트베스케그 왕은 영국 침략 다음 해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에설레드 2세가 1016년 사망한 후 크누트가 영국의 왕이 되었고, 1018년부터 덴마크의 왕, 1028년부터 노르웨이의 왕이 되어 크누트 대왕(Knud den Store, 또는 크누트 2세)으로 불렸다. 크누트 왕은 1017년에 에설레드 2세의 미망인이자 성 에두아르도의 어머니인 에마와 정략적으로 결혼하였다.

       어린 성 에두아르도는 노르망디에서 교육을 받으며 거의 25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속적인 야망의 덧없음을 깨달아 순결한 삶을 살고자 했다. 미사 참례와 성사 생활에 충실하며 수도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았다. 1035년에 크누트 대왕이 갑자기 사망한 후 영국의 왕위 계승은 혼란에 빠졌다. 후계자로 적자가 아닌 하랄드 헤어풋(Harald Harefoot)이 왕권을 탈취하였다. 당시 크누트 3세는 덴마크에 있었기에 주위 사람들이 성 에두아르도와 그의 동생인 알프레드(Alfred)에게 왕권을 되찾으라고 설득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 알프레드는 죽임을 당하고 성 에두아르도는 다시 노르망디로 피신하였다. 1040년에 하랄드 헤어풋이 사망한 후 크누트 대왕과 성 에두아르도의 어머니인 에마 사이에서 태어난 하르데크누드(Hardeknud, 또는 크누트 3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미혼이라 자식도 없고 건강도 좋지 않아 1041년에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성 에두아르도를 영국으로 초대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1042년 크누트 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성 에두아르도가 영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얼 고드윈(Earl Godwin) 백작이 그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덴마크에서는 그의 인자하고 거룩한 성품을 존경하여 그의 즉위를 환영하였다. 성 에두아르도가 왕위에 오른 시기는 적대적 세력이 많고 민심은 분열되어 있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 경건하고 관대하며 야심도 없이 거의 수도자처럼 살았던 성 에두아르도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요청되는 과감한 왕의 면모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웨식스(Wessex) 출신 얼 고드윈 백작의 딸 에디트(Edith)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혼할 당시 자신은 정결을 서약했으므로 자신과 오누이처럼 동정을 지키며 살겠다는 동의하에서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덕이 출중한 성 에두아르도의 통치로 인해 국가는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오로지 백성들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했으며, 당시까지 지속되던 덴마크의 악명 높은 세금을 감면하고 왕실의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수도자들에게 아낌없이 후원금을 내놓았다. 그는 ‘어진 성 에두아르도의 법’(Good St. Edward’s Laws)에 근거하여 이러한 일들을 단행했는데, 후대 사람들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이 법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곤 했다고 한다.

       성 에두아르도는 영국 교회와 교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 1049년에 교황 성 레오 9세(Leo IX, 4월 19일)가 랭스(Reims)에서 개최한 교회 회의에 영국 교회의 주교들을 파견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자 출신이 주교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교구 사제들의 양성을 권장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수도 생활의 가치를 격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재임 시기는 대체로 평화스러웠는데, 1051년에 그와 장인인 고드윈 백작 간에 갈등이 생겼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성 에두아르도가 노르만인들을 좋아해 그가 노르망디에서 데리고 온 쥐미에주(Jumieges)의 로베르(Robert)를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로 임명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고드윈은 성 에두아르도가 기도 생활에 깊이 빠져 국정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 에두아르도에게는 자식이 없으므로, 고드윈의 두 아들도 왕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결국 성 에두아르도는 고드윈의 무력 봉기를 평정하고 그의 아들을 추방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에 장인인 고드윈이 함대를 이끌고 왔을 때 내전을 피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고드윈을 복권하며 로베르 주교를 영국에서 내보냈다. 그로 인해 성 에두아르도의 왕권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 이후 성 에두아르도는 신앙생활에 더 깊이 전념했고, 616년경에 파괴된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폐허 위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수도원을 재건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이 수도원을 재건하기 위해 한때 자기 재산의 10분의 1을 바치고 여러 지방의 토지를 하사하였다. 또한 그의 경건함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향한 관대함과 사랑으로 나타났다. 그와 왕비는 매우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오누이처럼 지냈다. 자식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신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1065년 12월 28일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 내에 웅장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봉헌되었는데, 이듬해인 1066년 1월 5일 성 에두아르도가 런던(London)에서 선종하여 이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성당은 그 이후 영국의 왕이나 여왕의 대관식 등 왕실 행사를 거행하고, 그들이 죽은 뒤에 묻히는 장소가 되었다. 성 에두아르도는 1161년 2월 7일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중세 시대 영국의 성인들 가운데 가장 공경받는 성인의 한 명으로 보통 성 에두아르도 ‘증거자’(Edward the Confessor/Eduardus Confessor)로 불린다. 이는 순교가 아닌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란 뜻으로, 그의 삼촌이자 순교자인 성 에두아르도(Edward the Martyr/Eduardus Martyr, 3월 18일) 왕과 구분하기 위해 붙은 칭호이기도 하다.

       1689년에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us XI)는 성 에두아르도의 축일을 보편 전례력 안에서 기념하도록 하면서 10월 13일을 지정했다. 이날은 1163년 10월 13일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 대주교가 성 에두아르도의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내의 새 무덤으로 장엄하게 이장한 날이었다. 증거자 성 에두아르도의 상징 가운데 하나는 반지인데, 이는 그와 관련한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성 에두아르도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근처를 걷다가 구걸하는 한 늙은 거지에게 자신의 값진 반지를 주었다. 몇 년 후에 영국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지에서 그 ‘늙은 거지’를 만났는데, 그가 자신을 사도 성 요한(Joannes) 복음사가라고 소개하며 영국으로 돌아가서 왕에게 그 반지를 돌려주고 6개월 후로 임박한 죽음을 미리 경고하라 했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5일 목록에서 영국에 순결의 덕과 기적의 은사로 빛나는 성 에두아르도 왕이 있었는데,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명령에 따라 그의 유해가 이장된 10월 1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고 전해 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에두아르도가 선종한 1월 5일 목록으로 축일을 옮겨, 영국 런던에서 증거자라 불리던 앵글족의 왕 성 에두아르도가 위대한 자선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왕국의 평화를 확보하며 로마 교황청과의 친교를 끈기 있게 증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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