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돈암동성당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5년 5월 26일 (월)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엘레우테리오 (Eleutherius)
    같은이름 엘레우떼로 , 엘레우떼루스 , 엘레우떼리오 , 엘레우떼리우스 , 엘레우테로 , 엘레우테루스 , 엘레우테리우스
    축일 5월 26일
    신분 교황
    활동연도 +189년

       교황 성 엘레우테리우스(또는 엘레우테리오)는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본래 그리스인으로 로마제국의 속주인 에피루스(Epirus)의 수도인 니코폴리스(Nicopolis, 오늘날 그리스 북서부 에피루스 지방의 프레베자[Preveza] 북쪽에 있는 고대 유적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이름은 아분단티우스(Abundantius) 또는 히분디우스(Hibundius)라고 한다. 그는 로마(Roma)에서 교황 성 아니체토(Anicetus, 4월 20일)의 부제로 활동하다가 175년에 교황 성 소테르(Soter, 4월 22일)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그가 교황으로 즉위하던 때는 로마 교회의 권한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고, 동시에 교회 외적으로 평화가 유지되면서 한편으로는 이단들이 로마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용은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이레네오(Irenaeus, 6월 28일)가 쓴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교황 성 엘레우테리오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며 천년 왕국을 내세워 종말론적 내용을 설교하고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한 몬타누스주의(Montanismus)와 이원론에 기초해 고대 동방의 철학 사상과 성경의 가르침을 혼합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降生)과 인성(人性)을 취한 구원의 의미를 부정하는 그노시스주의(Gnosticismus)와 논쟁하고 맞서야 했다. 처음에는 다소 관대하게 평화적 해결을 도모했으나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자 점점 강력하게 맞서나갔다.

       교황 성 엘레우테리오와 관련된 한 전설에 따르면 그가 교황직을 수행하던 시기에 영국의 일부를 통치하던 루키우스(Lucius)라는 왕이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고, 그가 성 푸가시오(Fugatius)와 성 다미아노(Damianus)를 파견했다고 한다. 중세에 등장한 루키우스 왕의 개종과 관련한 전설을 프랑스의 교회사학자인 클로드 플뢰리(Claude Fleury, 1640~1723년)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개종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교황은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9월 3일, +604년)였기에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대 학자들은 “연대 교황표”의 저자나 필사자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브리티움(Britium, 오늘날 튀르키예 남동부의 샨리우르파[Sanlıurfa]인 에데사[Edessa]의 요새 이름)의 왕인 아그바르 9세(Agbar IX)와 혼동했다고 생각한다. 아그바르 9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그리스도교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나중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Lucius Aelius)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그 외에 교황 성 엘레우테리오의 주요 업적으로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주일에 지내던 관습을 그대로 고수하였고, 일부 신자들에 의해 지켜지던 음식의 청결과 정결에 관한 유대 관습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이 모든 종류의 육식을 먹을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채식 위주의 음식만 먹으며 극기를 강조한 몬타누스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177년경 프랑스 리옹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년 재위)의 박해로 인해 성 포티노(Pothinus, 6월 2일) 주교와 성녀 블란디나(Blandina, 6월 2일)를 비롯한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는데, 미래에 리옹의 주교가 될 성 이레네오는 혹독한 박해를 겪고 있는 리옹 교회의 상황과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박해를 유발하는 몬타누스주의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촉구하는 편지를 들고 로마를 방문했다. 하지만 교황 성 엘레우테리오는 그 당시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며 교회의 평화 유지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콤모두스 황제(180~192년 재위)가 즉위한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중지되면서 교회는 몬타누스 이단 문제 해결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 성 엘레우테리오는 189년 선종하여 바티칸의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무덤 근처에 묻혔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콤모두스 황제 때인 189년에 순교했다고 한다. 9세기에 비엔(Vienne)의 주교인 성 아도(Ado, 12월 16일)는 그의 “순교록”(Martyrologium Adonis)에서 교황 성 엘레우테리오를 순교자로 언급하였다. 하지만 그의 순교 여부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26일 목록에서 불확실한 내용을 많이 전해주었다. 즉 로마에서 교황이자 순교자인 성 엘레우테리오가 많은 귀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고, 성 푸가시오와 성 다미아노를 영국으로 파견하여 그들이 루키우스 왕과 그의 아내 그리고 거의 모든 백성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적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로마에서 교황 엘레우테리오가 감옥에 갇혀 있는 리옹의 유명한 순교자들에게 교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고귀한 편지를 썼다고 기록하였다. 순교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교황 성 엘레우테리오는 성 엘레우테루스(Eleutherus, 또는 엘레우테로)로도 불린다.♣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