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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12월 31일 (수)성탄 팔일 축제 제7일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 (John Francis Regis)
    같은이름 방지거 , , 요안네스 , 요한네스 , 이반 , , , 조반니 , 조안네스 , 조한네스 , , , 지오반니 , 프란체스코 , 프란치스꼬 , 프란치스쿠스 , 프랑수아 , 프랜시스 , 한스 , 후안
    축일 12월 31일
    신분 신부 , 선교사
    활동연도 1597-1640년

       성 요한네스 프란치스쿠스 레지스(Joannes Franciscus Regis, 또는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는 1597년 1월 31일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 지방 나르본(Narbonne) 교구의 퐁쿠베르트(Fontcouverte)라는 마을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가톨릭 동맹의 일원으로 종교 전쟁에서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았고, 어머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1611년부터 1616년까지 베지에(Beziers)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예수회원이 되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616년 12월 7일 툴루즈(Toulouse)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가 수련기를 시작했다.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친 그는 카오르(Cahors)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이어서 투르농쉬르론(Tournon-sur-Rhone)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투르농에 있는 동안 그는 주일마다 안당스(Andance) 마을에서 봉사하는 사제를 동행하며 사제가 고해성사를 주는 동안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그리고 신학 공부를 위해 1628년에 툴루즈로 돌아가기 전까지 르퓌앙블레(Le Puy-en-Velay)와 오슈(Auch)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실습기를 보냈다.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가 툴루즈에 가고 얼마 후에 페스트가 도시 전체를 휩쓸었다. 그는 직접 환자들을 돌보길 원했으나 아직 사제품을 받지 않은 수사들은 그 일에서 제외되어 시골로 보내졌다. 그는 환자를 돌보지는 못하는 대신 서너 시간만 잠을 자며 매일 환자와 봉사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다시 툴루즈로 돌아온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는 1630년 5월 19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다시 페스트가 재발하자 있는 힘을 다해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돌보았다. 사제가 된 다음 해에 그는 파미에(Pamiers)로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소임을 받았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주일이면 동료 예수회원과 함께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하다가 1632년에 프랑스 남동부 몽펠리에(Montpellier)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문맹 농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했다. 이 지역은 가톨릭 신자와 위그노(칼뱅파 프로테스탄트 신자) 간의 오랜 종교 전쟁으로 비극적인 고통을 겪은 곳이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저버리거나 냉담한 이들 그리고 배교자와 위그노 사이에서 선교 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몽펠리에 교구에서 2년을 보내고 주교의 요청으로 비비에(Viviers)로 가서 여러 마을을 순회하며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며 며칠씩 머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성사를 집전했다.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하며,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음식과 옷가지 등을 모았다. 그리고 전직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돕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도 힘썼다. 그들을 위한 피난처와 함께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 소녀들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과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다. 그가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성사를 집전했던 이유는 ‘부자에게는 고해 사제가 부족하지 않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종교적으로 혼란한 시대를 보내면서 일부 지역의 어떤 신자들은 20년 동안 성사를 받지 못한 예도 있었다. 반면 그의 열정적인 선교 활동에 불평하며 고발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비비에의 주교는 그것이 안락한 삶을 방해받은 게으른 사제들의 공격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몽펠리에와 비비에에서 8년 동안 선교 활동에 헌신한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는 1640년 12월 중순, 43세의 한창나이였지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선교지에서 하던 모든 활동을 멈추고 선교 본부가 있는 르퓌앙블레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3일 동안 피정을 하며 총고해를 하고 다시 3일이 지난 12월 17일 선교지로 돌아갔다. 12월 23일 다음 선교지로 이동해야 할 때 폭설로 인해 숲속의 버려진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베풀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고해성사를 주다가 쓰러져 잠시 의식을 잃었다. 겨우 의식을 찾은 그는 며칠을 침대에 누워있다가 12월 31일 자정 직전에 십자가를 두 손에 쥔 채 숨을 거두었다. 죽기 직전 그는 동료 수사에게 “주님과 성모님께서 나를 위해 천국 문을 활짝 여시는 것이 보이네.” 하며 “주님,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말한 후 평안히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라루베스크(Lalouvesc) 성당에 안장되었고, 그의 무덤은 곧 수많은 이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으며 기적의 장소가 되었다. 아르스(Ars)의 본당 신부였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Baptistae Maria Vianney, 8월 4일)도 그의 무덤을 순례하며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고 한다.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는 불과 10년 동안 예수회 신부로서 선교사로 활동했지만 17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활동 영역은 주로 랑그도크와 오베르뉴(Auvergne) 지역에 한정되었지만,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온몸으로 그들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그는 1716년 5월 8일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737년 6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6월 16일로 정해졌고,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그날 축일을 지내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16일 목록에서 예전에 비엔(Vienne) 교구에 속했던 도피네(Dauphine)의 라루베스크에 예수회의 사제이자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인내심으로 두각을 나타낸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가 잠들었는데, 그는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성인 목록에 올랐다고 전해주었다.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12월 31일로 옮겨졌다. 그래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31일 목록에서 프랑스 르퓌앙블레 근처 산악 지대인 라루베스크 지역에 예수회 사제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산과 마을을 돌며 주민들의 영혼 속에 가톨릭 신앙을 새롭게 하려고 쉼 없이 일했던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가 잠들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예수회에서는 7월 2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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