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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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다마소 1세 (Damasus I)
같은이름 다마수스 축일 12월 11일 신분 교황 활동연도 +384년
성 다마수스 1세(또는 다마소 1세)는 아마도 에스파냐 혈통으로 305년경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태어난 듯하다. 그 외에 그가 교황이 되기 전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교황 리베리오(Liberius, 352~366년 재위) 때 부제가 되었고, 나중에 로마에 있는 성 라우렌시오 성당의 사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 리베리오가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337~361년 재위)의 명령으로 355년 말에 발칸반도 동부 트라키아(Thracia) 지방의 베로에(Beroe, 오늘날 불가리아의 스타라자고라[Stara Zagora])로 유배 갔을 때 동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로 돌아와 처음에는 대립교황인 펠릭스 2세(Felix II)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358년 교황 리베리오가 로마로 돌아온 후 성 다마소는 교황과 화해하였다.
366년 9월 24일 교황 리베리오가 선종하자 후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다. 교황 리베리오와 화해하지 않았던 대립교황 펠릭스 2세의 일부 추종자들이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 있는 율리아 대성당(Basilica Giulia)에 모여 우르시누스(Ursinus)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대다수 성직자와 백성들의 지지로 성 다마소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10월 1일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그 과정에서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성 다마소를 지지한 발렌티니아누스 황제(364~375년 재위)는 우르시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모두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이로써 반대파와의 분쟁은 표면적으로는 평정되었으나 나중에 로마로 돌아왔다가 밀라노(Milano)에 정착한 우르시누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성 다마소의 재임 중에 늘 반대와 도전을 일삼았다. 게다가 교황 성 다마소를 반대하기 위해 밀라노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아리우스파(Arianism)의 도움을 받아 부당한 고발을 이어가다가 결국 우르시누스가 갈리아 지방으로 추방되면서 조용해졌다.
교황 성 다마소는 혼란한 시대를 보내면서 무엇보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가는 아리우스주의자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다행히 아리우스를 지지하던 밀라노의 아욱센티우스(Auxentius) 주교가 374년에 사망한 후 새로운 주교로 선출된 성 암브로시오(Ambrosius, 12월 7일)가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정통교리를 지켰다. 교황 성 다마소는 도나투스파(Donatism)와 노바티아누스파(Novatianism) 등과 같은 이단과도 맞서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지켜야 했다. 또한 380년에 그라티아누스 황제(Gratianus, 375~383년 재위)와 테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I, 379~395년 재위)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여 교회 발전에 큰 전환점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였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는 대리자를 파견하여 아리우스주의를 단죄하는 교황청 교서를 수락하도록 했으며, 성령은 신성이 없다는 마케도니우스(Macedonius)의 교리를 단죄하였다.
교황 성 다마소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은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후계자라는 사실에 근거한다며 로마좌(Sedes Romana)의 수위권을 표명하기 위해 ‘사도좌’(Apostolica Sedes)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또한 전례 용어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바꾸었으며, 유명한 성서학자이자 자신의 비서였던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로 하여금 그리스어 원본에 기초한 신약성경의 라틴어 역본을 부탁하였다. 당시 다양한 라틴어 역본과 수사본이 존재했으나 순수성이 의심될 정도라 개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교황 성 다마소는 382년 개최된 로마 회의에서 성 예로니모의 도움을 받아 성경의 정경 목록을 선포하였다. 성 예로니모는 384년 교황 성 다마소가 선종하기 전까지 네 복음서 개정판을 완성해 교황에게 바쳤다. 그리고 교황 사후에도 성경 번역 작업을 이어가 후대에 불가타(Vulgata) 역본으로 불린 라틴어 번역본을 완성하였다. 16세기에 트렌토(Trento) 공의회는 칙령을 통해 불가타만이 라틴어 역본들 가운데 정통성을 지니며 라틴 교회의 공식 번역본이라며 그 가치를 인정하였다.
교황 성 다마소는 ‘카타콤바의 교황’으로 불릴 만큼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다. 그는 많은 카타콤바와 순교자들의 묘지를 복구하고 직접 비문을 쓰기도 하여 신자들이 순교자들을 공경할 수 있도록 권장하였다. 또한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는데도 열정적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고고학적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영웅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교황 성 다마소 1세는 384년 12월 11일 선종하여 아르데아티나 가도(Via Ardeatina)에 있는 성 마르코와 성 마르첼리아노 카타콤바에 묻혔다. 이 지하 묘지는 그가 어머니와 누이를 위해 마련한 무덤이었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작성했는데, 그 안에서 부활에 대한 굳은 신앙을 잘 표현하였다. 후대에 그의 유해는 그가 자신의 집 위에 직접 지은 다마소의 산 로렌초 대성당(Basilica di San Lorenzo in Damaso)으로 이장하여 안치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11일 목록에서 교황이자 증거자였던 성 다마소가 이단 주교인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를 단죄하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 베드로를 자신의 주교좌로 복귀시켰으나 나중에 그가 주교좌에서 쫓겨났다고 적었다. 그리고 다마소 교황은 수많은 거룩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그들을 기리는 시를 작성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교황 성 다마소 1세는 당시 어려운 시기에 분열과 이단으로부터 니케아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많은 시노드를 소집했으며, 성 예로니모에게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위임하고 순교자들의 무덤에 시를 새겨 장식하여 공경을 표했다고 기록하였다.♣
- 성 다마소 1세 (Damasu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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