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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6년 5월 19일 (화)부활 제7주간 화요일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가톨릭 성인/축일
    성 첼레스티노 5세 (Celestine V)
    같은이름 베드로 , 베드루스 , 셀레스틴 , 첼레스띠노 , 첼레스띠누스 , 첼레스티누스 , 켈레스티노 , 켈레스티누스 , 코일레스티노 , 코일레스티누스 , 페드로 , 페트로 , 페트루스 , 피에르 , 피에트로 , 피터
    축일 5월 19일
    신분 교황 , 증거자
    활동연도 +1296년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켈레스티누스 5세(Coelestinus/Caelestinus V, 또는 첼레스티노 5세)는 1209년이나 1210년 또는 1215년경에 이탈리아 중부 몰리세(Molise)의 캄포바소(Campobasso) 근처에 있는 산탄젤로리모사노(Sant’Angelo Limosano) 또는 이세르니아(Isernia)라는 마을에서 소작농인 안젤로 안젤레리오(Angelo Angelerio)와 마리아 레오네(Maria Leone)의 아들로 태어나 피에트로(Pietro,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들에 나가 일했지만, 그의 영성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어머니는 그가 단지 농부나 양치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17살 때 몬타가노(Montagano) 인근 파이폴리(Faifoli)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입회해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더욱 고적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동경해 1231년경 아브루치(Abruzzi) 광야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움막을 떠나 1234년경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몇 년 동안 술모나(Sulmona)의 모로네(Morrone) 산에 있는 한 동굴에 머물면서 피에트로 다 모로네(Pietro da Morrone)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은수 생활을 원하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을 지도하다가,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해 1245년경 제자들과 함께 접근이 더 어려운 마이엘라(Maiella) 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생활했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이 계속 늘어남에 따라 처음에 만들었던 모로네 산의 공동체, 이미 당시에 수도원을 발전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설립하고 훗날 그의 이름을 따서 ‘첼레스티노회’(Ordo Coelestinorum, O.S.B.Coel.)로 불리게 된 은수자 공동체는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Urbanus IV)에 의해 인가되었고,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Gregorius X, 1월 10일) 때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교황 니콜라오 4세(Nicolaus IV, 1288~1292년 재위)의 선종 후 정치적 알력 때문에 2년간의 교황직 공백 기간이 발생했을 때, 이미 80에 가까운 고령의 은수자인 그는 교황 선출을 위해 페루자(Perugia)에 모인 추기경들에게 위협적인 언사로 새 교황을 즉각 선출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어찌 된 영문인지 추기경들은 1294년 7월 5일, 당시 고령에다 병든 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모로네 수도원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극구 사양했으나 더 오래 교황직을 공석으로 둘 수 없어서 결국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는 은수자 복장으로 아브루초(Abruzzo) 지방 아퀼라(Aquila)로 들어와 8월 중순에 산타 마리아 디 콜레마지오(Santa Maria di Collemaggio) 성당에서 주교품을 받고, 8월 29일 같은 성당에서 첼레스티노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라 혼란하던 교회의 방향을 바로 잡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행정 실무 경험이 전혀 없던 교황 성 첼레스티노 5세는 주어진 직무를 수행하기에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무능함과 건강상의 이유로 그는 더는 교황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베네데토 카에타니(Benedetto Caetani) 추기경과 상의한 후 교황에게는 스스로 물러날 권리가 있다는 마지막 교령을 발표하고 재임 5개월여만인 1294년 12월 13일 교황직을 사임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수도원을 되돌아간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그 후 베네데토 카에타니 추기경은 성 첼레스티노 5세를 승계하여 보니파시오 8세(Bonifatius VIII)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랐다. 그런데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를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자 후임 교황은 교회 분열을 우려해 1295년 7월에 성 첼레스티노 5세를 아나니(Anagni) 근교 푸모네(Fumone) 성(城)의 소박한 거처에 감금했다. 예전의 은수 생활로 돌아가고자 했던 성 첼레스티노 5세는 결국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푸모네 성에서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 첼레스티노회의 두 수사와 함께 은수자와 같은 고행을 실천하며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다가 1296년 5월 19일 종기로 인한 감염으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우선 페렌티노(Ferentino)에 묻혔다가, 1317년에 그가 교황으로 즉위했던 산타 마리아 디 콜레마지오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1313년 5월 5일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에 의해 아비뇽(Avignon)에서 증거자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19일 목록에서 모로네의 성 베드로가 은수 생활을 하던 중 교황으로 선출되어 첼레스티노 5세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교황직을 사임한 후 고독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덕행과 기적을 행하다가 하느님 곁으로 갔다고 전해 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라치오(Lazio) 지방 알라트리(Alatri) 근처 푸모네에서 성 베드로 첼레스티노의 선종을 기념하는데, 그는 아브루초(Abruzzo)에서 은수 생활을 하면서 성덕과 기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80세에 로마 교황으로 선출되어 첼레스티노 5세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같은 해에 교황직을 사임하고 은수 생활을 선택했다고 기록하였다. 교황 성 베드로 첼레스티노 5세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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