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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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데시데리오 (Desiderius)
같은이름 데시데리우스 , 디디에 , 디디에르 축일 5월 26일 신분 주교 , 순교자 활동지역 비엔(Vienne) 활동연도 +606년경
성 데시데리우스(또는 데시데리오)는 6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오툉(Autun)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오툉과 비엔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는 비엔의 베루스(Verus III) 주교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았고, 595년경에 그의 후임으로 비엔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5월 27일)가 로마에서 출발해 영국 선교를 위해 갈 때 그를 보호하도록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9월 3일)가 편지를 보낸 주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브루네힐데(Brunehilde)의 시대’(534~613년)라고 불리는 도덕적 타락과 격동의 정치적 혼란기에 살았다. 그가 여왕뿐만 아니라 테우데리크 2세(596~613년 재위) 왕의 방탕한 생활과 왕실의 부도덕한 행태에 대해 질책하자 그와 적대적인 이들이 거짓 모함을 퍼뜨려 왕이 그를 교구에서 쫓아내도록 했다. 브루네힐데 여왕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손자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몇 년 후 성 데시데리오는 비엔 교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으나 계속해서 궁정의 방탕함과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시금 유배 길에 올랐고, 왕과 여왕이 보낸 호위병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프리스키니아쿰(Prisciniacum)이라는 데서 돌과 몽둥이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주교직을 수행하려고 노력했고 또 그에 대한 악의적 누명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 권력자와 반대자의 거짓 모함이었기에 즉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그가 순교한 프랑스 동부 리옹(Lyon)의 북쪽 지역은 10세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생디디에쉬르샬라론(Saint-Didier-sur-Chalaronne)으로 명명되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 순교한 곳에 묻혔다가 몇 년 후 비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23일 목록에서 비엔의 주교였던 성 데시데리오가 테우데리크 2세 왕의 명령에 따라 돌에 맞아 리옹 지역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같은 날 같은 이름의 4세기 주교 순교자인 랑그르의 성 데시데리오에 대해서도 기록하여 종종 혼동을 가져오기도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26일로 축일을 옮겨 리옹 지방에서 순교한 비엔의 주교 성 데시데리오에 대해 전해주었다. 그는 브루네힐데 여왕의 근친상간 결혼과 그에 따른 타락한 행위를 질책해 추방당했고, 그 뒤에 다시금 여왕의 명령으로 돌에 맞아 죽음으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밧줄을 잡고 있거나 목이 졸린 모습으로 묘사된다. 성 데시데리오는 성 디디에(Didier)로도 불린다.♣
- 성 데시데리오 (Desiderius)